기특하다 내지는 안쓰럽다, 집회에 교복을 입고 가면 십중 팔구 이런 시선이 쏟아진다. 부담스럽다 못 해 짜증난다. 확실히 말해둔다. 어른들, 난 당신들이 기특해하라고 집회에 나오는 게 아니다. 쥐박이 하고 싶은 대로 되는 꼬라지는 절대 볼 수 없어서 나오는 거지, 사람들한테 칭찬이나 받자고 나오는 게 아니란 소리다. 청소년이 성인한테 “회사 안 가고 집회에 나오다니, 아이 기특해!” 해봐라. 그 말 듣는 성인이 얼마나 웃기고 어이없어 하겠냐. 그거랑 똑같은 거다. 당신들의 미안한 맘을 자극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도 아니다. 추측하건대, 촛불소녀 마스코트를 만든 인간들이 유도한 것이 바로 이 ‘죄책감 자극’이었을 거다. “애들도 하는데 어른인 난 쪽팔리게 집에서 뭐하는 거냐.” “(공부해야 할) 아이들이 정치문제에까지 나서게 만들다니! 미안하다, 우리 죄다.” “이 불쌍한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우리들이 나서자! 어른들이 지켜주자!” 처음 촛불소녀 얘길 들었을 때, 왜 하필 소녀인가 의아했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서야 이게 소년이 아닌 '소녀'에서 느껴지는 연약한 느낌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음을 알고, 앞에선 10대가 촛불집회의 주역 어쩌고 추켜세우고 뒤에선 집회에 사람들 끌어 모으는 ‘홍보수단’으로 어떻게 하면 청소년을 효과적으로 이용해먹을까 골몰한 이중성에 구역질이 났더랜다.


  단순히 이번 집회에서 일어난 일종의 10대 신드롬을 반영하고자 했을 수도 있다. 그 과정에서 팬클럽 등으로 집회 초반 이슈가 됐던 10대 소녀들을 ‘촛불을 든 10대’의 대표격으로 삼기로 별뜻없이 결정했던 걸 수도 있다. 그러나 청소년의 존재를 특별시 한 것부터 어느 한 쪽의 성을 강조한 것까지, 유도했든 유도하지 않았든 촛불소녀라는 이미지는 청소년을 ‘어린데다 약하기까지 한’ 보호의 대상으로 전락시켜 동등한 시위 참가자로 여기지 않게 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특히나 청소녀들의 경우엔 ‘귀여움. 순수함. 연약함' 에 편중된 거북한 이미지를 부여받고, 그 이미지를 집약한 집회의 마스코트로 이용당하고 있기도 하다.


  ‘기특함. 미안함’의 시선은 성인들로 하여금 이번 촛불집회에서 청소년들이 보여준 ‘청소년의 정치참여 가능성’을 깨닫지 못하도록 막는 장벽으로 작용한다. 개인적으로 난, 이 확고한 오만과 편견의 장벽에서 아집으로 똘똘 뭉친 현 정부의 명박산성을 연상한다. 대다수의 성인들이 10대의 정치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을 ‘촛불집회에 국한된 한 때의 특별한 현상’으로 치부하고 있다. 또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치는 성인들의 전유물이라는 생각에 갇혀있기 때문에, 청소년과 정치의 연결 자체를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는 비단 촛불집회에서만의 문제가 아니라 기존사회가 갖고 있는 고질적인 청소년 배제의 문제이기도 하다. 촛불소녀가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런 청소년·아동에 대한 기존의 보호주의 시각을 전면에 내세우고 널리 퍼뜨려 기존의 인식을 더 공고히 했다는 점에 있다. 10대의 집회참여를 보며 성인들이 느껴야 했던 것은 ‘청소년 역시 정치.사회에 참여할 수 있다.'라는 그간 무참히 씹어먹히고 있던 사실이어야 했지, ‘아이고 애들까지 나서게 하다니. 미안해 죽겠네.’ 따위의 죄책감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후자이기 쉬웠던 것을 더 후자가 되기 쉽도록 몰아갔다는 것이 ‘촛불소녀’의 죄다.


  촛불소녀는 ‘여자애'다. 시위현장에서 차별받고 있는 대표적인 두 존재의 결합이다. 진정한 촛불소녀를 한 분 본 적이 있다. 촛불소녀의 정신을 내면화 하신 듯 남성들의 보호주의를 당연한 듯 받아들이고 알아서 빠져 계신 여성분이었다. 그 분은 심지어 ‘여자애들은 빠지자’라며 전경버스를 끌어내는 밧줄 옆에 선 ‘여자애’들에게 끈질긴 태클을 걸었다. 차별하지 말라고 항변하자 누군가는 “차별이 아니라, 차이 때문인거죠.”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 차이가 있다. 여성 청소년인 나는 남성과 다르고 비청소년과 다르다. 하지만 다르다는 것이 무조건적인 보호와 배제의 근거가 될 순 없다. 결과적인 얘기긴 하지만, 난 세네 번 줄을 당기면서 한 번도 넘어지지 않았고 조금도 다치지 않았다. 여성으로서, 청소년으로서 가지고 있는 ‘차이’ 때문에 그 일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설사 다쳤다 해도, 그건 내가 ‘여자애’이기 때문이 아니다. 상황에 따라 개인에 따라 다칠 수도 있고 다치지 않을 수도 있는 거지, 여자라서 다치고 애라서 다치는 건 없다. 동참하고 싶어 하는 의지가 있다면 마땅히 존중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의지를 가지고 있는 이상 모두가 동등하며, 성과 나이 등의 차이는 무의미하다.

  모든 보호는 어쨌거나 걱정에서 나온다. 걱정하는 것까진 안 말린다. 단, 걱정은 걱정으로 끝내라. 걱정을 차별로 끝맺지 말라. 여성과 아이의 ‘약함’에 대한 걱정은 시위현장에서 종종 여성과 청소년의 역할을 구경꾼으로 제한시키는 역할을 했다. 의도는 걱정이었을지 몰라도, 결과는 분명 시위에서의 배제였고 동등한 시위 참가자로 여기지 않는 차별이었다.


  촛불소녀에 대한 거부는 ‘청소년의 집회-정치참여는 전혀 특별한 일이 아니다’라는 주장이다. (기특하다, 거부한다!) 청소년들을 보호-통제함으로써 성인들의 우위를 유지하려는 기존사회에 대한 저항이다. (지켜줄게, 때려치워라!) 청소년 그 중에서도 여성이기 때문에 특히 더 자주 노출되는, 보호를 명목으로 한 차별에 대한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진정한 촛불소녀 따위 되지 않겠다!) 마지막으로, 신문에 실렸다는 이유로 ‘공식 촛불소녀’가 되어버린 내 위치에 대한 거부이기도 하다! (촛불소녀, 그만 불러! 캭!)




/ 보너스
  촛불소녀가 싫은 이유 첫 번째, 그 소녀는 단정한 교복차림에 귀밑 5센티의 단발머리를 하고 있다. (학생부의 사랑이 그리도 받고 싶더냐!) 두 번째, 방글방글한 눈동자를 빛내며 ‘어른들아, 저희를 지켜주세효' 깜찍한 척 연약한 척 내숭을 떨고있다. 세 번째, 청소녀들을 다 자기 같은 인간으로 오해받게 만들고 있다.(대표적인 피해자, 나!) ... 쓸데없이 유명해져서-_-. 스티커 모델은 왜 하니, 대체.



[엠건]
Posted by 오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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