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고 싶은 개념, 전달하고 싶은 개념, 탑재시켜주고 싶은 개념이 있다면 여기에. 특정 개념의 탑재를 거부한다는 개념을 탑재시켜주고 싶을 때도 여기에. 주장과 개념이 만나는 그곳.]


<페미니즘인(in)걸?>

야오이, 그 곳에서 소녀 그리고 여성들이 만나야했던 이유

※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여성주의팀에서

여성주의와 청소년인권의 만남을 고민하는 글을 오승희 <인권오름> 등에 연재합니다.


여성들의 포르노, 야오이

 

야오이는 여성들의 포르노라는 말이 있다. 모든 야오이가 포르노는 아니지만, 상당수가 그런 성격이 강한 게 사실이니 맞는 말이다. 지금이야 ‘야한 것’을 약간 부담스러워 하는 정도지만 중고등학교 땐 거부감 수준으로 꽤 반감이 있었다. 덕택에 야동(야한 동영상)은 호기심에라도 한 번 본적이 없다. 그런데 그런 부류인 ‘야오이’에는 나는 유독 너그러웠다. 남자애둘이 손 붙잡고 뽀뽀하면서 ‘러브러브’ 모드를 펼치는 게 그렇게 훈훈하고 흐뭇할 수가 없었다. 섹스 수준의 야한 짓도 웬일인지 그냥 넘길 수 있었다. 어쨌거나 난 야오이 안에 있는 야한 것들엔 관대했다. 사실 난 야오이를 통해 욕구를 그 때 그 때 풀었기에 특별히 결핍이 없었던 걸 수도 있다는 생각을 최근 들어 했다. 그동안은 야오이와 성적욕구란 단어를 함께 놓을 생각조차 못했다. 내 안에 ‘성적 욕구’ 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조차 불편했던 탓이다. 남성들만 나오기에 ‘야해도 괜찮은 야오이‘가 아니었다면, 이런 내가 스스럼없이 성적인 욕구를 풀어낼 통로는 아예 없었을 것이다. 고집스레 자처한 성적인 무지에 갇혀 내 안에 있는 성적 욕구의 존재를 인정하고 나아가 긍정하게 될 기회였던 셈이다.

 

여자애가 야한 것을 알고

접한다는 것은 ‘죄‘다

 

어렸을 때부터 야한 건 더럽다고 생각했다. 딱히 사회가 원하는 ‘깨끗한 소녀’의 이미지를 의식했던 건 아니다. 깨끗한 소녀 따위 딱히 원한 적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더러운 년’이 될 수는 없었다. 더 나은 무언가가 되기 위해서도 아닌, ‘야한 것에 대해 무지한’ 정상과 ‘야한 것에 대해 박식한’ 비정상이라는 나뉨 속에서 정상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10대 여성의 성적 권리를 논하기도 전에 사회는 ‘애들은, 특히 여자애들은 성적인 것을 접해서는 안 된다’는 전제 위에서 모든 것을 시작하라 요구했다. 그 암담한 벽 앞에 10대 여성의 성적 욕구는 ‘자연스럽게’ 씹혀왔고, 성적 권리는 출발부터 가로막혀있었다. 혈기왕성한 사춘기 남자애란 말을 혈기왕성한 사춘기 여자애롤 바꾸었을 때, 분명 생소하게 또는 이상하게 들린다. 낯설고 이상스런 그 울림은, 성적 무지를 택하지 않는 10대 여성에게 ‘밝히는 여자애’ 의 딱지를 붙여왔던 사회적 폭력의 잔향이다.

여자애들은 순진하고 깨끗하다 또는 깨끗해야한다는 상식, 바꿔 말해 여자애들은 자신의 성적 욕구를 인정해서도 드러내서도 안 된다는 일방적인 강요이다. 이러한 폭력은 세간에서는 상식의 이름으로 통용된다. 여자애들이 남성들 간의 섹스를 표현한 야오이를 찾게 만든 상황은 ‘상식’의 뿌리 위에서 자랐다. 깊은 밤 케이블 TV에서 해주는 야한 영화를 처음 본 후 내가 느꼈던 감정은 스스로에 대한 역겨움과 죄책감이었다. 잠깐이라도 야한 것을 밝혔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해 짙은 자기혐오를 느꼈고, 뒤이어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를 죄책감이 찾아왔다. 웃기는 건, 같은 야한 영화라도 남성들이 주체인 영화를 보면 죄책감의 정도가 낮아졌다. 야오이 세계는 여성, 즉, 내가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성애관계를 재현하는 야오이

 

야오이 안에 여성이 없다고 단순하게 말한다면 이는 거짓이다. 야오이에는 공,수 개념이란 게 존재하고 이 둘의 결합은 남성 역할을 하는 남성(공)과 여성 역할을 하는 남성(수)의 결합이다. 외모도, 성격도, 관계 구도도 이성애 관계를 상당 부분 비슷하게 재현한다. 말하고 보는 이들이 대부분 여성이기에, 야오이 소설이나 만화의 시점은 ‘수’일 때가 많다. 이 점에선 보통의 연애소설과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10대 여성들이 읽는 이성 연애소설에는 섹스 장면이 거의 절대로 나오지 않는다. 반면 야오이의 경우 섹스장면의 존재는 횟수에만 차이가 있을 뿐 독자들에게나 작가에게나 당연시 된다. 여성들은 분명 수에게 감정이입을 하긴 하지만 이때의 감정이입은 동일시가 아니다. 수가 남성임을 인지한 부분적인 감정이입이다. 막을 하나 쳐둔 셈이기 때문이다. 야오이를 즐기는 여성들의 심리는 일정 거리를 둔 채 공간 바깥에서 관찰자처럼 연애를 지켜볼 수 있다. 나를 직접 대입하기 쉬운 여성과 남성의 섹스를 보는 것보다 훨씬 덜 불편하다. 성적인 것을 즐기고 있는 내 자신을 들키지 않아 자유로운 건지도.

또 야오이 속의 여성이란 유령 혹은 잘 나와 봤자 엑스트라일 때가 많다. 나온다 해도 비중이 낮을 때가 많다. 야오이를 즐기는 여성들이 자신을 이야기 외부에 둔다는 건, 이야기에 나오는 강간에 대한 반응으로만 봐도 알 수 있다. 10대 여성들이 주로 보는 이성 연애소설에서 강간은 흔히 쓰이는 소재가 아니다. 그에 비해 야오이에서는 강간이 이야기 장치로 자주 이용된다. 자주 나온다는 건 그만큼 무리 없이 받아들여진다는 뜻이고, 보는 여성들이 야오이에 나오는 강간에 대해서는 그만큼 무디다는 반증이 아닐까.

 

감시의 눈길을 피해 10대 여성들의 욕구를 간접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여성-자신’이 없는 공간을 통로인 야오이를 택한다. 야오이를 즐기는 것은 비단 10대 여성들 뿐만이 아니다. 왜 하필 여성들의 포르노가 남성으로 가득한 ‘야오이’가 됐을까? 남성의 성욕구만이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것’으로 인정되는, 욕구에 대한 인정조차 불평등한 사회에서, 야오이는 ‘여성의 욕구 드러내기’였던 동시에 또한 ‘자기 지우기’이다.

 

여성들의 체념과 자기 지우기

 

나는 ‘야오이’를 좋아한다는 말을 쉽사리 하지 못한다. 쓰레기라는 표현이 너무도 잘 어울리는 야오이가 못해도 야오이물의 70, 80%는 되는 실정이다 보니, ‘동인녀’임을 알았을 때 눈살을 찌푸리는 상대의 반응에도 짐짓 이해가 가는 것이다. 야오이를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야오이물이 갖고 있는 ‘쓰레기같은 점’까지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강간 같은 끔찍한 폭력을 가볍게 다루는 점, SM물 등 인간 본성에 대한 회의가 밀려오게끔 만드는 야오이 안의 이상한 장르들, 수가 공에게 삽입을 더 해달라는 몸짓을 하며 ‘앙앙’소리를 낸다거나 하는 식으로 남성들이 만들어낸 야동의 패턴을 똑같이 따라하고 있는 점 등 말이다.

 

그 외에도 야오이에 나오는 남성들은 지독할 정도로 마초적이다. 남자인물은 여성에 대한 음담패설을 하고, 여성을 성노리개쯤으로 여기는 듯한 언행을 구사한다. 분명 여성작가가 거의 대부분 일텐데 말이다. 물론 현실에 대한 반영이겠지만, 그렇더라도 똑같이 줄줄 읊어대야 하는거야? 열도 안 받나? 현실에 대한 체념은 쓰는 이들이나 읽는 이들이나 기본적으로 있다. 야오이 안 마초들을 자연스럽게 받아 넘기는 그 태도엔 ‘남자들이 짐승 수준으로 성 욕구로 충만하고, 거칠고, 여자 우습게 아는 건 원래 그런 거니까. 어쩔 수 없지.’라는, 말도 안 되는 포용이 이미 완료되어 있다. 분노조차 생략한 상태에서 야오이 속 남성들이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을 무감각하게 수용한다. 여성들이 야오이라는 공간으로 들어오며 ‘여성’의 존재를 지울 땐, ‘여성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의지 역시 함께 지운 것인가.

여성이 ‘남성’을 얘기한다는 것은 남녀 권력구도에 대한 전복이 되기도 했지만, 결국 ‘남성’의 이야기를 한다는 점에서 크나큰 한계이다. 야오이를 좋아하는 여성들이 곧잘 하는 장난 중에 망상놀이가 있다. 주변 남성들을 멋대로 이어 붙여 커플로 만들어버리는, 말 그대로 망상을 지멋대로 펼쳐놓는 놀이다. 학교 다닐 때 반 남자애들을 대상으로 나 역시 자주 했었다. 남성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내 맘대로 요리하는 경험은 위치전복의 쾌감을 준다. 여성들에겐 남성을 관람한다는 것 자체가 마녀의 기분 같은, 속 시원한 못된 짓이기도 하니 야오이는 그런 면에서 위치전복의 쾌감을 마음껏 제공하는 셈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야오이 속에 나오는 앙앙거리는 수 또한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시켰던 짓을 남성들에게도 똑같이 시켜 깔아뭉개기 위한 시도일 수 있다.

 

여성들이 자신을 지우지 않으며 얘기할 수 있는 날까지

 

하지만 그렇게 만든 남성은 결국 여성 자신의 모습이다. 공(남성)의 지배욕구와 쾌감을 충족시켜주는 수는 그냥 ‘남성’이 아닌 ‘기지배’ 같은 수이다. ‘기지배’ 같기에 그런 일도 할 수 있다. 공 같은 진짜 남성은 하지 않는다. 공이 수에게 가한 폭력은 공수구도에 배어 있는 ‘남성적’ ‘여성적’이라는 분리로 인해 결국 여성들 자신에게로 되돌아온다. 남성들의 억압은 야오이 공간에서조차 존재한다. 자신들의 성 욕구를 드러내기 위해서라는 긍정적인 목적으로 야오이를 찾았지만, 여성 스스로 재현한 남성의 언어와 방식은 결국은 ‘자학’ 과도 같은 야오이 세계 내부를 만들었다. 애시당초 여성의 입으로 자신들의 이야기가 아닌 남성들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에서부터 한계가 생긴 게 아닐까. 화자는 여성인데 남성을 매개로 이야기하고 남성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결국은 남성을 위한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은 아닌지.....

남성만 있는 세상-야오이를 만들 정도로 여성들이 지우고 싶어 했던 ‘여성’이란 뭘까. 아마도 지금 현실과 ‘부정 받고 억압받는 약자로서의 여성’을 지우고 싶어 했겠지. 소녀라는 굴레에 갇혀 어딘가 모르게 억눌리고 있었던 여성 청소년들이 남자애들의 이야기를 찾게 되었던 것도 마찬가지 맥락일 테고. 여성들이 자신을 지우지 않고 자기 이야기를 하며 자신의 욕구를 드러낼 수 있는 그 날까지, 결론은 하나다.(여러 개일 수도 있지만 일단 ㅋ)! 여성 청소년이여, 자신의 이야기를 할지어다. 에블바디 걸 페미니즘!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여성주의팀 엠건]

지금 이 글을 읽고자 하는 분께 묻고자 한다. 한국에서 상상력을 발휘하는 작품이많이 나오지 못하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환경이 자라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학습지 회사가 항상 광고에서 말하는 것처럼 어렸을 때 '창의력 학습'을 받지 못해서 인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를 댈 수 있겠지만, 나는 ‘청소년 보호법’이 가장 문제가 많은 요소라고 대고 싶다.

솔직히 아무런 생각 없이 보면 ‘청소년 보호법’은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스스로 행동을 결정할 능력이 없는’ 아이들을 위하여 어른들이 ‘친히’ 법을 만들어서 ‘나쁜 길’로 가지 못하도록 지켜주는 법이 뭐가 문제가 있을까. (이미 많은 독자 분들은 깨달으셨겠지만) 앞 문장의 작은 따옴표 속에 있는 말이 다 맞는다면 말이다. 과연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또는 그 정도의 나이가 되는) 청소년들은 스스로 옳고 그름을 결정하지 못할 정도의 정신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물론 사회적 경험이 어른들에 비하면 많지 않은 편이기는 하다. 하지만 경험은 체험하고 느낌으로서 쌓아나가는 것, 적어도 옳고 그름과 자신에게 유리한 것을 고

Posted by 오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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