둠코

 

요즘 전국 이곳저곳에서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고 있다. 서울에서도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가 성사되고, 서울시의회를 통과했다. 전국에 학생인권의 바람이 불자, 이를 반대하는 진영에서 학생인권조례가 학교폭력을 부른다는 논리로 학생인권조례를 사정없이 까대고 있다. 체벌 등의 징벌을 할 수 없어 교권이 추락하고 일부 날라리 학생들이 조례로 인해 자유를 얻게 되어, 인권 같은 거 없이도 행복하게(?) 학교생활을 할 수 있는 다수의 선량한 학생들을 괴롭히게 된다는 것이다. 보수언론들은 연일 학교폭력에 대한 기사를 쏟아내어 가해학생들의 악마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폭력 모두가 학교폭력이 아니라 학생들 간에 일어나는 폭력만 학교폭력이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됐을 때, 학교폭력이라는 말은 많은 것을 가려버린다. 학생 간의 폭력 이외에 학교의 제도가 부추기는 폭력들을 숨긴다. 체벌이나 언어폭력, 과도한 경쟁 등이 그것이다. 또한 학생 간의 폭력이 학교의 폭력적 구조 때문에 일어난다는 사실 역시 얼버무린다. 학생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폭력적 상황은 아무 이유도 없이, 극악무도하고 이해 할 수 없는 학생들에 의해 일어나는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학교에서 일어나는 폭력은 그것이 전부인 양 말한다. 그래서 학생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폭력 상황만을 분리해서 표현하는 ‘학생 간 폭력’이라는 단어와 함께, 이런 폭력 상황에 대해 뜯어보고, 학생인권의 눈에서 해결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학생 간 폭력은 크게 두 가지의 경우가 존재한다. 하나는 학교 어디에나 있는 힘 재기에서 비롯되는 폭력이고, 두 번째는 사회적인 차별에 의해 가해지는 폭력이다. 학교 안의 힘 재기는 학생들에게 습관처럼 일상적으로 이루어진다. 학기 초가 되면, 서로 모르는 이들이 가득한 교실 속에서 학생들은 모두 자신이 잠재적 왕따가 될 수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그래서 쉬는 시간, 점심시간에 전혀 안면도 모르는,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도 모르는 누군가를 붙잡고 같이 화장실에 가자거나, 같이 점심을 먹자고 하며 친해지기를 시도한다. 그렇게 학기가 반쯤 지나가면 누구는 누구와 친하고, 내가 소속된 그룹은 어디이고 자신이 어떤 위치인지가 명확해 진다. 그리고 그 안에 누구와도 친해지지 못하거나, 그런 데 관심이 없는 학생들도 있게 마련이다. 이런 참으로 피곤한 교우관계의 유지는 학교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의 경쟁과 맥을 같이 한다. 학교는 학생들의 관계를 성적과 마찬가지로 위와 아래로 나누게 만든다. 외모, 성적, 자신 외의 다른 교우관계, 교사의 신임 등등 수많은 사항들을 고려해서 거스르면 안 될 사람과 좀 더 거만하게 굴어도 되는 사람을 선별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한다. 이 과정에서 자신이 가장 밑바닥에 있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신보다 아래에 있다고 생각되어지는 누군가에게 폭력을 휘두르게 된다. 차별에 의한 폭력의 경우, 그 차별 사유는 사회에서의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성(性)소수자나 장애인에 대한 차별 등이 그것이다. 이런 사회적 소수자들은 차별의 대상에서 더 나아가서는 혐오의 대상이 되고, 폭력의 대상이 된다. 이는 그들이 말 그대로 소수자, 그러니까 힘 재기의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자의 축에 속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학교는 사람을 여러 항목에서 끊임없이 줄 세우게 하고, 힘이 약한 누군가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을 용인하는 구조로 되어있다. 타인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관계가 결정된다. 끊임없는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는 그대로 폭력성이 된다. 자신이 다른 누군가보다 가치가 있음을, 조금 더 가진 게 많음을 증명하기 위해 폭력이라는 수단을 선택하는 것은 그 중압감 때문이기도 하다. 폭력적인 구조로 만들어진 학교가 그 안의 학생들을 폭력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지금까지 학생 간 폭력을 해결하는데 있어서, 교사의 역량이 주로 이야기 되어왔다. 매를 휘두르던지, 아니면 사랑으로 아이들을 끌어안던지, 교사의 권한을 증대시키는 것이다. 요즘은 교사가 해결하기에는 짐이 무거우니 학교 안에 학생 간의 폭력 사건을 전담하는 경찰을 두자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어느 쪽이든 이 담론들에서 학생은 불쌍한 피해자이거나 혹은 이해 할 수 없는 극악무도한 가해자로 그려진다. 자신들을 둘러싼 상황과 구조들에 대해 학생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전무하다. 이런 방법은 학생인권의 이야기가 본격화 되지 않았을 때부터 계속 논의되고 존재했던 방법이고, 그 때나 지금이나 학생 간 폭력은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학생 간 폭력의 그 다양한 이유들은 점점 더 가려지고 뭉뚱그려 져서 알 수 없는 위험한 10대들이 하는 짓으로 비춰진다.

학생 간 폭력의 이유가 차별일 때, 학교에서 해야 하는 가장 첫 번째는 인권교육이다. 다수의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은 나쁜 것, 더러운 것, 열등하거나 배척해야 할 것이 아님을 확실히 전달하고 몸에 배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누군가에게 소수성을 이유로 폭력을 가하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하는 문화를 조성하는 것이다. 단지 인권교육에 수업시간을 할당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학교에서의 생활에 나타날 수 있도록 하는 것 또한 학교의 역할이다. 또 학생들이 학교의 운영에 참여하고 인권이 보장되는 학교에서 생활하는 것으로 일명 ‘찌질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학생 간 폭력에 대한 해답도 찾을 수 있다. 서로 비교하고 등수 매기는 기존의 환경에서 자신도 같은 방식으로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그런 상황에 처하게 하는 조건들을 바꾸어 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학교 안에서의 폭력적 상황에 대해 권력자인 교사의 처분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권리를 가지게 되면, 학생 간 폭력의 귀결은 ‘징벌’이 아니라 폭력적으로 망가져 버린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고민으로 바뀐다. 학생 간 폭력에 대한 교사의 중압감, 권위를 세우기 위한 인권침해도 사라질 수 있다.

학생들이 최소한 타인에게 폭력을 휘두르지 않을 수 있는 환경. 자신과 남에 대해 힘의 논리가 아니라 존엄한 인간이라는 인식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이라면 학교는 달라지지 않을까? 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윗사람의 처분이나 결정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직접 두 팔을 걷어 부치고 해결하는 것이 당연해 진다면, 학생 간 폭력은 지금처럼 ‘난제’로 남아있는 일은 없지 않을까?

Posted by 오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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