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교회에 다니는 친구와 함께 TV를 보던 중에, 교회 안에서 폭력과 살인이 벌어지는 장면이 나온 적이 있었다. 교회에 별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나는 "교회"라는 이미지보다는 그 폭력에 이어질 것만 같던 신의 처벌과 그 폭력의 액션에만 관심이 있었지만, 종교의식이 강했던 내 친구는 "교회에서 폭력이 일어나고 있다."라는 사실에 흥분했다. 나는 그제서야 ‘교회와 폭력’사이의 불협화음을 이해하고, 그 불협의 공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당황해 했었다. 하지만 그 불협화음을 깨뜨려줄 신의 처벌은 없었다.

 내가 이 기억을 지금까지 수년간 내 머릿속에서 지우지 못한 이유는, 내가 조금씩 커가면서 내 주위엔 그 사건과 너무나도 흡사한 불협의 공존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현실사회에서의 그것은 어릴 적 나의 머릿속에 남았던 그것보다 훨씬 가혹한 것이었다.

 수업이 끝나기 5분전, 모든 학생이 지루한 수업이 끝나기만을 기다릴 때, 끝 종이 두려워 떨고 있는 학생의 마음을 아는가? 참고서를 산다고 부모님께 받은 돈을 같은 학교 학생한테 줘야만 하는, 아니 바쳐야만 하는 학생의 마음을 아는가? 그 학생의 마음까진 아니더라도, 그러한 학생이 있다는 사실조차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공공연한 비밀로 지켜지는 불협의 공존, ‘학교폭력’이다.

 "학교폭력의 피해자는 학교의 보호를 받을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본 영화엔 신의 처벌이 없었듯 현실은 더 가혹했다. "신의 처벌"을 기다린 우리 모두를 배신하고, ‘학교'라는 울타리는 양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울타리처럼, 한 학생의 인권보다 그 학교의 명예를 위해서, 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은폐시켜 학교폭력의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를 보호하는 것이다.

 과연 교회에서의 살인을, 하느님은 용서하실까?

 태양은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똑같은 빛을 보낸다. 하지만 우리는, 그 빛을 프리즘에 통과시키고 나서야 자기가 좋아하는 색깔의 빛만 보게 된다. 이렇게 현대의 사회구성원은 각자의 생각과 안목이 모두 다르지만, 진리에 대해서만은 모두 같은 생각을 한다. "학교폭력은 사라져야만 한다."

 이 생각은, "사라져야한다"의 바람이 아니라 "사라져야만 한다"라는 의무와 진리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국가의 미래가 자라는 학교, 교회나 절보다 더 성스러운 장소인 학교에서 일어나고 있는 교육과 폭력의 공존, 그 불협의 공존은 없어져야만 한다. 사회가 ‘법’이라는 신과 ‘가정’이라는 안식처로 구성원의 안전을 우선시 하는 것처럼 학교는, 학생들의 울타리가 아닌 학생들의 안식처가 되어야 하고, 사회 구성원을 키우기 위한 작은 사회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전주고등학교 손주혁
Posted by 오승희
 요즘 한창 시끄러운 북한 인권 문제. 그 문제로 양쪽의 논객들이 갑론을박하는 것을 보고 있자면 쓴웃음이 절로 지어진다. 그 이중 잣대 때문이다. 군사정권 시절에는 현실론을 내세우며 민주주의와 인권의 원칙을 유보시켰던 세력이 지금 북한에 대해서는 ‘인권’의 이상론을 내세우고 있고, 마찬가지로 그 당시에는 이상론을 들고 군사정권에 반대했던 세력이 이제는 현실론을 말하며 인권의 원칙을 유보시키고 있는 모습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로 꼽을 수 있을 현실―이상의 줄다리기조차도 자신의 이익에 맞춰 선택적으로 적용한다고 생각하니 씁쓸할 따름이다.

 이중 잣대는 저 경우에서만 보이는 것은 아니다. 비교적 멀게 느껴지는 정치판을 떠나 가까운 학교를 봐도 그런 모습은 쉽게 발견된다. 예를 들어 내가 본교에서 높은 자리에 앉아 계신 선생님께 일전에 두발규제나 용의복장규제에 대해 건의를 드렸을 때 들은 답변은, 요약하자면 "해야 하는 것은 하게 해야 한다."였다. 인권적 원칙에 때로 배치되는 것이란 점을 눈감아주면, 이는 나름대로의 원칙주의요 이상론인 셈이다. 그러나 학교의 머리라 할 수 있는 분들께서 그런 정신으로 학교를 운영하신다면 왜 입시위주수업을 시행하는지는 도무지 모를 노릇이다. 교육이 학벌주의·대학입시에 종속되어버린 게, 수업시간에 수능문제집이나 붙들고 있어야 하는 게 제대로 된 것이라 여기는 분들이 진실이 아닌 물은 마시지 않으며 선하지 않은 과일은 따먹지 않는다는 건학이념이 걸려 있는 학교의 중책을 맡으실 리는 없으니 말이다. 입시위주교육에 대해 따지면 "현실이 그렇고 또 너희들이 원하기 때문이다."라 하는 학교가 어떤 것은 "해야 하니까"를 고집하는 이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을지.

 일부 교사들도, 학생들도, 이런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이중 잣대 혐의로부터 자유롭진 못하다. 일부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규칙은 지켜져야 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들은 등교시간이나 자율학습 등에 관한 교육부 지침이나 교칙에 관한 국가인권위원회 권고안 등은 당당하게 어기고 있다. 그러면서 이를 입시공부를 강제로라도 시키고 많은 수의 학생들을 통제해야 하는 현실의 책임으로 돌린다. 학생들도 혹 어떤 선생님께서 입시와 동떨어진 수업을 계속 한다 싶으면 현실론을 들먹이며 불만을 토로하지만 한편으로는 헌법의 원칙을 논하며 자신들의 자유를 보장해달라고 한다. 인격을 도야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하며, 민주국가 발전과 인류 공영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 이바지하게 하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라고 밝히고 있는 교육기본법 제2조는 흙발로 짓밟고 있으면서도 유리한 것은 끌어다 쓰고 있는 것이다. 하긴, 이는 학교나 교사나 학생이나 학부모나 별 차이 없는 부분일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언급한 사례가 아니더라도, 정도 차는 있을지언정 누구도 그런 이중 잣대를 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말하기는 힘들 듯하다.

 지금 여기서 이중 잣대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는 사실 이중 잣대가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그 속을 들여다보면 "내 입맛, 내 편견에 맞는 대로, 내가 편한 대로 한다."라는 일관된 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즉, 자기 이익에 따라 적당히 끌어다 붙이고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어떤 결정을 내릴 때 현실을 무시하고 원칙과 이상주의만을 고집하는 것은 현실성이 결여된 헛소리가 될 것이며, 아무런 원칙도 이상도 없이 현실만을 바라본다면 그것은 비젼 없는 죽은 소리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익이나 자기 편의에 맞춰 현실론과 이상론을 오가는 것은 어떻든 바람직한 모습이라고는 할 수 없지 않겠는가.

 인간은 현실과 이상 어느 한 극단에 있는 게 아니다. 인간은 현실과 이상 사이 어디쯤에 있다. 그래서 나는 인간을 표현하는 많은 말들 중에서도 "서있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를 좋아한다. 대지에 발을 딛고 있지만 머리는 하늘을 향하고 눈은 멀리를 바라보는 그 중간자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만큼 우리는 자신에게 엄격해야 한다. 서있다가 다리 좀 아프면 땅에 누우면 된다고 하고, 누워있다가 질리면 서있으면 된다고 하는 변덕스러운 태도는 좀 아니지 싶다. 어느새 이중 잣대를 꺼내들려고 하는 우리의 모습을 경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은 어렵기에, 나는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이중 잣대는 균형을 잡으려 하던 와중에 까딱 실수한 것이라고 믿고 싶다. 그런 실수를 피하는 방법, 그 정답은 상황에 따라 다르다. 그렇기에 중용이라는 애매한 말 정도로밖엔 답할 수 없다. 그렇지만 미흡하게나마 그에 대한 대답을 겸하여 마지막으로 이제는 너무 도용되어 다소 빛을 잃은 인물 중 하나인 체 게바라의 평전에 나오는 말을 인용하고자 한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전주상산고등학교 유윤종
Posted by 오승희
 2월 7일 국회 인사청문회에 그동안 언론 매체를 통해 참 많은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었던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이 지나치게 단정해 보이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유 장관의 지난 모습들을 접한 이들이 보면 어김없이 "내숭"이라는 단어를 내뱉을 정도였다. 깔끔한 정장에 반짝반짝 윤이 나는 안경과 입가에 살짝 띄운 미소. 모르는 사람이 보면 "참 깨끗하고 청렴결백해 보인다."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할 것이다.

 이날 청문회에서 유 장관은 질문하는 여/야당 의원들의 추궁과 해명요구에 여러 잘못을 시인, 요구에 순순히 응하는 등 참으로 양처럼 순하고 온순한 모습을 보였다. 유 장관의 온순함에 청문회는 평화롭게 끝나는 듯 했으나 문제는 뒷일이었다. ‘서울대생 민간인 폭행사건'의 피해자들이 기자회견을 가졌고, 여러 의원들이 가면을 쓴 사람의 가면은 오래 지나지 않아 벗겨진다며 비판을 일삼았다. 그렇다. 호박에 줄긋는다고 수박이 되는 것은 아니고, 돌멩이에 물감을 칠한다고 과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유 장관의 과거를 아는 이들로서는 "장관 되니 사람이 변한다."보다는 "꼴에 장관이라고 내숭떤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지당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이들의 비판어린 목소리를 느끼고 기가 막히는 것은, 이들은 국회의원이라는 점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하나의 거대한 상류집단을 형성해 남부럽지 않게 떵떵거리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 과연 유 장관을 비판할 자격이 있을까? 이 사람들은 과거가 없고 부정부패한 삶이 아닌 청렴결백한 국회의원으로서의 삶을 살았을까? 우리 국민들의 여론이 유 장관의 장관직 반대 65% 라는 데에 반발하는 것이 아니다. 유시민 보건복지부장관을 두둔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유 장관에게 비판을 퍼붓는 다른 국회의원들의 뻔뻔함이다. 애써서 들추어내본다면 이 사람들에게도 유 장관 부럽지 않을 과거가 있을 것이다.

 이들이 유 장관에게 던진 질문을 보면 어이없는 웃음이 나올 뿐이다. "비교적 반미 성향 이면서 딸을 외국어고에 보면 이유가 무엇이냐?" 아니, 그럼 자기 자식들은 자신이 반미 성향이라고 자식들 영어공부도 안 시킨다는 말인가? 여하튼 이번 인사청문회를 통해 "비슷한 부류끼리 어울린다.(속된 말로 끼리끼리 논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자신의 상은 차리지도 않고 남의 상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을 보며, 우리나라는 발전하려면 아직도 멀었구나 하고, 감히 생각해 본다.

대구경북고등학교 이지원
Posted by 오승희
 학교 입학식이나 졸업식 등 중요 행사가 있을 때 국기에 대한 경례는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의례이다. 이런 국기에 대한 경례를 왜 하는지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국기에 대한 경례는 행해졌다. 우리는 국기에 대한 경례를 왜 하는 것인가? 또, 이런 국기에 대한 경례가 왜 필요한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애국심을 고취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국기를 향해 오른손을 가슴에 올리고 맹세문을 생각하면 자연스레 애국심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많은 학교에서 이것을 강제적으로 하다 보니 문제가 생겼다. 지금은 아니어도 20~30년 전에는 국기에 대한 경례는 의무였고 하루에도 몇 번씩 해야 할 때가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강제성 면에서 정도 차이는 있어도 국기에 대한 경례를 의무적으로 하게 하기 때문에 이를 좋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먼저 이 맹세문에 대한 것인데, 그 기원이 유신정권시대 애국심 고취를 목적으로 맹세문을 외우고 의무적으로 경례를 하게 한 데 있다는 것이다. 곧 유신시대의 잔재를 없애야 한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문교부에서 원래 맹세문의 일정 부분을 의도적으로 바꾸었다고도 한다. 또, 종교나 신념의 자유라는 측면에서도 문제가 된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여호와의 증인에서는 이런 맹세를 우상숭배로 간주하여 종교적으로 금하고 있다. 종교적인 이유로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하자 학교에서 퇴학 조치를 취해 문제가 더욱 커진 일도 있다.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목적이 애국심 고취에 있는 만큼 의무적으로 하게 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아무 생각과 마음 없이 단순히 경례만 한다면 그것은 본래 취지에 부합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부정적인 결과만 낳게 된다. 실제로 주위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진지하게 하는 학생들을 보기는 어렵고, 심지어 어떤 이들에게는 이 행위가 귀찮은 의식일 뿐이다. 그리고 종교와 신념에 대한 자유는 인권 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권리에 해당한다. 경례를 강요하는 것은 기본권을 침해한다. 그러므로 경례는 강요해서도 안 되고, 하지 않아서 받는 물리적 불이익도 없어져야 한다.

 중요한 것은 경례나 기타 형식적인 행위 없이도 애국심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가져야 할 책임과 사명을 이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이 없으면 사회 조직이 없지만 사회 조직이 없으면 개인도 존재할 수 없다. 이 둘은 서로 필수불가결한 관계이므로 개인이 사회 조직에 요구하는 권리와 받는 복지 혜택만큼 그 의무도 다 해야 한다. 국기에 대한 경례는 의무적으로 하지 않아도 되지만, 학교나 기타 기관에서는 중요 행사시에 행사 순서에 넣을 필요가 있다. 이는 충성 맹세나 희생의 다짐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의 국가에 대한 의무를 생각해보자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전주상산고등학교 노용호

Posted by 오승희
 남들 다 공부하는 시간에 소설책을 읽는 예비 고3 학생을 보면서 "지금 이 시점에 소설책을 읽다니, 시간이 넉넉한가 보구나?"하며 "공부나 해라."의 투로 비꼬는 어른들 또는 친구들을 꽤 많이 볼 수 있다. 물론 시간이 넉넉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부를 잘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지만 난 책을 읽는 시간이 결코 헛되이 보낸 시간이 아님을 알고 있다.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는 그 사실을 내게 더 확고히 심어준 책이다.

 내가 이 책을 알게 되고 읽기로 마음먹게 된 계기도 참 독특하다.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이 한 분 계시는데, 어느 날 선생님이 이 책을 읽고 계신 것을 보고 ‘아, 나도 읽어봐야지.'하며 무작정 읽어야 할 책 목록에 끼워 넣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솔직히 읽기는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다. 시험이 끝나고 시간이 좀 넉넉해지며 결국 손에 쥐게 된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는 늘 시도하는 다이어트나 책 읽기 때, 정말 미루기 좋아하는 내게 하루하루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닫게 해 준 책이다.

 이 책을 읽은 사람들 중에서 베로니카의 자살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무료한 일상이 똑같이 반복되는 것이야말로 정말로 끔찍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배경이 되는 슬로베니아는 혼란스러운 곳이다. 베로니카는 이런 국가의 전형적 국민일지도 모른다. 혼란스러운 나라를 변화시킬 수 없는 무력한 국민들 중에 베로니카가 특별해지는 것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이 아닐까 싶다. 나는 이것을 일종의 용기라 정의하고 싶다.

 그러나 죽기로 결심한 베로니카는 자살에 실패하고, 죽음이 일주일이 남았다는 사실을 아는 일주일을 얻게 되었다. (물론 그녀의 일주일은 이고르 박사에 의해 꾸며진 거짓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베로니카는 그 일주일동안 삶과 죽음은 함께인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삶의 끝은 죽음이라고 생각하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베로니카는 메시지를 남긴다. 삶은 죽음의 가능성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기에 그것은 일체인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베로니카가 이런 깨달음을 얻기까지는 에뒤아르라는 절대적인 사랑이 있었다. 그는 세상에서 탈피하기 위해서 정신병자라는 가면을 쓴다. 세상을 향한 일종의 탈선행위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에뒤아르는 사회로의 새로운 발걸음을 베로니카와 함께한다.

 만약 우리들에게 일주일의 시간이 남았다고 가정해보자. 우리는 베로니카처럼 깨달음을 얻어 사회로 새롭게 도약할 수 있을까. 역시 확신할 수 없다. "내일이 있잖아!"라고 마음속에 굳은 다짐을 하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이라는 질문은 우문 중에 우문이 될지도 모르겠다.

 베로니카가 삶과 죽음이 일체라는 것을 깨달았다면, 그녀의 깨달음을 우리는 다시 우리의 마음으로 흡수해야 할 것이다. "오늘 할 일은 오늘 끝내자."라는 귀에 익숙한 말들을 그저 흘려버릴 수 있는 귀에만 들려주지 말고, 미루기 좋아하는 게으른 마음에게 들려주는 것이 더 현명한 일일 듯하다.

전주솔내고등학교 조유미
Posted by 오승희
 방 창문을 통해 나는 철새들이 떠나간 자리를 본다. 서부 신시가지 조성사업은 전주시의 장기발전을 위한 도시 공간 구조 개편이라는 목적 아래 진행되고 있다. 그리하여 나무가 베어지고 그 자리엔 고층 아파트들이 하나씩 들어서고 있다. 그렇게 창문 너머의 모습이 갈수록 말라가고 있다. 국어사전에서는 "개발"을 "천연자원 따위를 인간 생활에 도움이 되게 하는 일."로 풀이하고 있다. 개발이 인간의 생활을 편리하게 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그것이 진정으로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것인지는 의심스럽다. 게다가 그 나무를, 또 그 나무들이 이룬 숲에 살고 있었을 여러 가지 동물들과 곤충들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이 책, "오래된 미래"의 저자는 현대 산업사회의 토대인 서구식 개발의 본질을 이야기하며 미래에 가능한 삶의 방식을 모색하고 있다. 그리고 저자는 그러한 미래를 라다크인의 ‘오래된’ 생활방식에서 찾아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서구의 개발 방식은 오랜 세월 형성되어 온 라다크 고유의 삶의 형태에 서구적 균질화를 강요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그것은, 라다크의 자연환경에 완벽히 적응한 야크 대신 해발 1600피트에서는 살 수도 없을 뿐더러 그곳까지 올라갈 수조차 없는 저어지 암소를 키우도록 강요한다.

 서구인들이 말하는 개발의 목적은 제3세계에 그들이 만든 물건을 팔 시장을 구축하는 데 있는 것이지, 인간 복지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나아가 지역, 민족, 국가 경제를 모조리 하나의 체제 속으로 통합시켜 더 많은 이득을 얻으려는 의도를 ‘발전', ‘근대화'라는 명분으로 정당화하려는 측면도 분명 존재한다. 아무런 윤리적 토대가 없는 이러한 개발 방식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인간의 삶을 무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이라는 시스템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불행으로 이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맹목적인 서구식 개발보다는 지속 가능한 개발이 필요한 것이다. 재생 가능한 에너지를 기초로 하는 소규모 기술(적정 기술)을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적용하는 것도 지속 가능한 개발을 하는 한 방법이 된다. 적정 기술은 생태적, 문화적 다양성을 지탱해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라다크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라다크는 우리에게 성찰의 계기를 제공해준다. 예를 들어 정부는 무조건 개발 정책만을 취해서는 안 되며, 환경 단체들은 무조건 개발 사업에 반대만 해서는 안 된다. 그 개발 사업이 사회적으로는 국민의 복지에 기여하고 환경의 측면에서는 지속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연구와 토의가 사회에서 충분히 이루어진 다음에 결정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은 우리 자신이 주변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자연의 일부임을 새삼스레 되돌아보아야 할 때이다.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삶의 가치를 깨닫는 날 비로소 부탄 국왕의 말처럼 사회의 발전 지표가 ‘국민총생산'이 아닌 ‘국가총행복'이 될 것이다.

전주솔내고등학교 서경원
Posted by 오승희
 안녕하세요~♡ 오답노트 코너를 진행할 승희라고 해요. 먼저 제 소개를 하자면, 저는 설정 상으로는 질문하길 좋아하는 소녀랍니다. 그 이상은 비~밀♥ 첫 코너다보니 쪼오금 어색하네요. 자, 그래도 힘내서 <오답노트, Anything but ordinary>!

 ☞ 오늘 소개할 것은 최시한 씨의 연작소설 다섯 편을 묶어놓은 책,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 「구름 그림자」, 「허생전을 배우는 시간」, 「반성문을 쓰는 시간」,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 「섬에서 지낸 여름」. 이 5편이 6,500원의 저렴한 가격으로~★
주인공인 선재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문학소년이랍니다. 선재의 눈에 비친 고등학교 생활은 어떤 걸까요?

☞ 어떤 분은 이 소설이 1인칭임에도 문장이 고등학생 것 같지가 않아 읽는 맛이 떨어진다고 하기도 하더군요. 확실히 읽다보면 선재가 애늙은이처럼 보일 수도 있을 거에요. 하지만 표현이 다르다고 해서 선재가 본 세상과 다른 고등학생들이 보는 세상이 정말 다른 걸까요? 저 같은 경우는 선재가 "구름 그림자" 이야기를 사람들의 고정관념 같은 것을 말할 때 연결하는 것을 읽고 정말 신선한 느낌을 받았어요. "아무래도 대학이란 구름 그림자 같은 게 아닌가 싶다. 모두가 그 속에 들어 있으면서도 그런 줄을 모르는 구름의 그림자. 왜 그놈은 하늘에서 그렇게도 꼼짝을 하지 않을까." 선재는 우리와 같은 것을 보면서도 그 핵심을 엿보는 것 같아요. 선재의 말투는 애늙은이 같을지 몰라도 현실에 찌들지 않았기 때문에 또 다른 의미에서는 순수한 것도 같구요. 꿈 많은 사춘기의 문학소년! 우리가 설령 선재랑 꼭 닮은 모습은 아니라고 해도, 우리들에게는 그런 모습이 조금씩은 있기 때문에 그런 선재에게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자, 이젠 선재와 그 친구들이 억압의 장인 고등학교를 어떻게 살았는지, 그 기록을 들여다볼게요. (그래도 여기에서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진 않을 거에요. 이건 어디까지나 소개니까 미리니름도 최대한 피할 거구요. 안 그럼 재미없으니까!

☞ 선재와 그 친구인 윤수, 왜냐 선생님 등은 끊임없이 학교나 사회와 마찰을 빚어요. 이 소설 전체가 마찰과 갈등의 기록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그들이 맞서게 되는 사회와 학교는 어떤 학교냐구요? 음… 예를 들어, 전교조에 가입했다고 해서 선생님을 쫓아내는 학교. 친구들과 어느 집에 모여서 "놀이판"을 계획했다는 것 때문에 경찰에 끌려가야 하는 사회, 그리고 그런 아이들에게 무기정학을 주는 학교. "기원의 밤"에 학생들이 모두 우수 대학에 합격하여 "승리자"가 되길 기원하며 입시경쟁에 적극적으로 순응하는 학교. 그들이 갈등을 일으키는 대상은 사회나 학교 그 자체일 때도 있고, 그 사회나 학교에 적극적으로 순응하는 선재의 누나나 몇몇 선생님들, 아니면 동철이 같은 애일 때도 있어요.

☞ 선재뿐 아니라 윤수도 이 소설에서 주인공이라 할 만해요. 다소 소극적인 성격의 선재가 생각하고 고민할 때, 윤수는 항상 먼저 행동하고, 또 윤수의 행동은 선재의 삶에도 영향을 미치거든요. 「허생전을 배우는 시간」에서는 윤수와 선재 사이의 공감대가 얼핏 보이고, 선재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윤수는 먼저 행동에 나서기도 하죠.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에서는, 선재가 기원의 밤에 시 읽는 일을 거절하지 못한 데 반해 윤수는 당당하게 행동하고 학교에서 쫓겨나죠. 선재는 "윤수의 그 말이 바로 내가 찾던 말 같다. 어쩌면 그보다 훨씬 나은 말일지도 모른다. … 이제서야 윤수의 마음을 알 것 같다."라고 하더니만, 어머머 「섬에서 지낸 여름」 때는 외딴 섬으로 훌쩍 떠나버려요. 섬에서 바다를 보고 고민하며 여름을 보낸 선재가 마지막에 윤수와 같은 길을 가기로 했는지, 아니면 또 다른 길을 찾기로 했는지는 명확히 나오지 않지만요.

☞ 고등학교 생활은 선재나 윤수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고, 시련이 된 것만은 분명한 일이죠. 그래서 전 이 소설을 읽으면서 안구에 습기가 많이많이 차더라구요, 흑. 눈물도 흘리면서 저는 선재를, 윤수를 정말 좋아하게 됐답니다♡ 선재나 윤수는 정말 순수하고 아름다운 아이들이에요.
물론 우리 모두가 선재나 윤수와 똑같은 경험을 하며 사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그와 비슷한 경험은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한 번쯤은 하게 되지 않을까요? 정도는 더할 수도 있고 덜할 수도 있지만 말에요. 안 그런 쪽이 좀 이상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구요. "모두 아름다웠던 그 아이들은 / 어디 갔느냐." 이 시구를 읽으며 선재 누나나 경석이 아버지 같은 분들도 고등학교를 살며 사실은 선재나 윤수와 같은 갑갑함을 느끼지 않았을까, 나름대로 일그러진 체제에 상처입고 패배한 경험이 있는 건 아닐까, 동철이도 사실은 선재만큼 아름답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답니다.

☞ 자, 제 소개를 듣고 책을 읽고픈 마음이 생기셨나요? 제가 이렇게 열심히 말해줬으니까, 우리, 꼭 읽기로 약속해요! 안 그럼 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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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오승희
 한 때 "아침밥 먹기"가 대세가 된 적이 있었다. "아침을 거르면, 두뇌 활동에 필요한 탄수화물이 어쩌고, 저녁을 먹은 뒤 다시 음식을 먹기까지의 시간 갭이 너무 커서 저쩌고, 그러니까 니들 꼭 아침밥 쳐 드셈, 특히 수험생……." 하는 멘트를, 거의 매일같이 TV에서 무한반복 재생해주던 때였다. 그래서 해장국 전문점들이 오랜 불황을 벗어나게 되었는지 어쨌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최소한 하나는 확실하다 - 아침밥은, 여전히 찬밥신세란 사실.
 필자야 워낙 위대(胃大)하여 밥을 안 먹고는 도저히 1∼4교시를 버틸 자신이 없어 꾸역꾸역 먹는다지만, 그런 필자조차도 요즘은 아침밥을 먹는 데 애로사항이 꽃피곤 한다. 왜 그럴까? 이유는 간단하다. ‘시간이 없어서'다. 필자가 늦잠꾸러기인가? 글쎄, 6시30분 기상이면 나름대로 늦잠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매일 아침 노현정 아나운서의 낭랑한 목소리를 들으며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감으니까. 그럼 무엇이 문제인가? 교복이 무슨 기모노처럼 복잡해서 옷 입는 데 몇 시간 걸리는 것도 아니고, 신발 끈 묶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니며, 학교에서 먼 곳에 사는 것도 아니다. 정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등교시간이 너무 이른 것이다.
 필자가 다니는 S고의 등교시간은 1․2학년이 7시40분, 3학년이 7시20분이고, 수업은 8시10분에 시작한다. 집에서, "커피 한 잔의 여유", "한 박자 천천히" 따위 광고를 믿고 ‘음, 바쁘지만 여유롭게-'라는 생각을 잠깐이라도 하게 되면, 정말로 ‘여유롭게' 오리걸음이나 앉았다 일어나기 등의 하체근육 강화훈련을 받아야 한다. 그렇게 고된 근육 강화훈련을 마치고 교실로 들어가면 이번엔 담임선생님 차례다. 아앗, 선생님, 일사부재리의 원칙… 시끄러! 그리고 자리에 앉으면, 의자가 왜 이리 포근하니, 어머 웬일이니, 눈을 뜨면 2교시다. 뭐야∼ 안 되겠네∼
 그럼 아침에 더 일찍 일어나면 안 되나?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에게 필요한 수면시간은, 물론 개인차가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우리 또래의 청소년에게는 7∼8시간 정도다. 야간 자율학습이 몇 시에 끝나나? 필자의 S고는 10시, 기숙사생은 한 시간의 프리미엄이 붙어 11시다. H고는 11시, 전주 시내의 또 다른 S고는 10시에 끝나는 등, 일반적으로 10시 이후에나 학교에서 나오는 것이 가능하다. 아주 호화로운 학교라 교실 안에 침대며 이불이 구비되어 있어 야자가 끝나자마자 바로 잔다고 쳐도 8시간을 채우자면 다음날 6시다. 실제 학생들이 잠자리에 드는 시각이 12시 전후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미 잠을 줄일 대로 줄여 놓은 상황에서 더는 줄일 수 없다는 계산이 나온다. 아니, 따지고 보니 실로 국회의원들은 심야온라인게임규제 따위보다 학교부터 규제하는 게 청소년 수면권을 보호하는 일임을 알아야 한다.
 아침에 더 이상 일찍 일어나기란 곤란하다고 봤을 때, 결론은 하나뿐이다. 등교시간을 조금 늦춰서 아침밥만이라도 먹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강약약 강강강약 강중약 패턴으로 청원서 40단컴보를 교육인적자원부 앞으로 보내기라도 해야 하나?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입시경쟁 위주의 교육이 철폐되고 대학서열화가 무너지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나오는 것이겠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설프게 손댔다가 "내신 등급제" 따위의 배틀로얄 정책이 또 나오지 말란 법은 없다. 대신, 비교적 간단한 방법으로도 소기의 효과를 볼 수 있다.
 S고에서는 2005년, 그러니까 작년 1학기에 한시적으로 등교시간을 10분씩 늦춘 적이 있었다. 단 10분이었지만, 그 10분으로 인해 학교생활이 얼마나 윤택해졌는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늘어난 10분의 시간을 차분히 학교생활을 준비하는 데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단 10분 늦추는 것만으로도 소기의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에 그치지 않고 과감하게 아침'자율'학습을 없앨 것과 8시 이후로 등교시간을 늦출 것을 주장한다. 기숙사와 스쿨버스가 갖춰진 학교라면 8시10분 정도면 적절할 것이고 그렇지 못한 학교면 8시30분 이후가 적절할 것이다. 이 정도 시간이라면 수업시간을 조금씩 뒤로 밀고 야간'자율'학습을 줄이는 선에서 충분히 확보 가능하며, 이렇게 20분 이상 늘어난 아침 시간을 학생들이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게 되어 복지 및 능률 향상을 기대할 수 있게 된다. 허둥지둥 잠이 덜 깬 모습으로 학교에 와 20분 공부하는 것과 말짱한 정신으로 공부할 준비가 되어있는 것, 어느 것이 효율적이겠는가? 무엇보다 건강에 필수적인 ‘규칙적 아침식사'가 가능해진다.
 물론 이런 방안도 근본적 해결책이 되지 못함은 인정한다. 대학의 첫 강의는 일반적으로 9시에 시작하며 따라서 대학생들은 여유 있게 하루를 준비하고 강의에 임할 수 있다. 본인의 의지나 상황에 따라서는 아침에 학원을 다니며 자기계발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한국의 인문계 고등학교라는 것이 ‘상식적으로' 운영되는 상태가 결코 아니지 않은가. 랠리 포인트를 ‘서울대'에 찍어 두고 목숨 건 달리기를 강요하며 입시서바이벌에서 살아남는 것을 그 최우선 목표로 삼는 한국의 인문계 고등학교에 근본적 해결책을 요구하는 것은 억지에 가까울 수도 있다. 그러려면 아침‘자율'학습을 위한 강제등교뿐 아니라 야간‘자율'학습도 없애야 할 테니. (우리를 걱정해주시는 어르신들께서 그런 것을 용납하겠는가? 고등학교 교장이 인터뷰에서 최고의 학생인권은 명문대 보내는 거라고 하는 나라다.) 그러나 등교시간을 늦추는 방안은 결코 무리한 것이 아니며 당장이라도 시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의식동원(醫食同源)이라는 말이 있다. 적절한 식사가 보약이라는 뜻이다. 규칙적인 식사야말로 건강의 기초이자 지름길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건강을 챙길 시간도 없다. 등교시간을 늦추는 것은, 바로 아침밥 먹는 시간을 보장하는 것이다. 일단 몸이 건강해야 힘내서 공부하여 서울대건 어디건 도전해볼 것 아닌가. 학교에 묻는다. 20분가량을 무르고 학습 효율을 배가하는 것이 효율적인가, 시간을 빡빡하게 쓰면서 정작 수업시간엔 소화기관의 관악 4중주를 감상하며 몽롱한 정신으로 앉아만 있는 것이 효율적인가?
Posted by 오승희
 작년의 일이다. 어느 고등학생이 교육청 홈페이지에 "우리 학교 급식의 질이 내는 돈에 비해 좀 후지다, 혹시 중간에서 누가 스리슬쩍 어찌저찌 한 것 아니냐."라는 요지의 글을 올렸다. 결과가 어떻게 됐을까? 급식이 개선되었을까? 천만에, 그 학생은 아주 ‘신속하게' 퇴학 처분을 받았다. 이유는? 근거 없는 비방으로 학교와 교장의 명예를 훼손했다나. 그런데 그 학생의 친구들은 이런 반응을 보였다.  "급식 진짜 해도 너무하던데……."

 학교 교칙에 이런 조항이 있다. "불온한 문서나 유언비어를 유포하면 이러이러한 징계를 받는다." 이런 조항은 웬만한 학교의 교칙에는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조항이고, 징계의 수위도 높은 편에 속한다. 아마도 학교 측은, 근거 없는 유언비어나 그런 내용을 담은 문서, 혹은 학생들의 정서에 심각한 악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무런 제재 없이 유포될 경우에 학생들이 겪을 심리적 고통을 생각하면 너무도 가슴이 아파서 그런 조항을 넣어야 했다, 라는 주장을 할지도 모르지만, 그렇다면 무엇이 불온한 문서이고 무엇이 유언비어인지, 명확한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대체 무엇이 불온한 문서이고 무엇이 유언비어인가? 설마 "우리 급식 좀 후지네." 하는 글이 근거 없는 유언비어고 불온한 문서인가? 오, 이런.

 이것은 엄연한 언론통제고, 좀 더 강한 표현을 쓰자면 탄압이다. 전주 시내 모 학교의 이곳저곳에 붙어 있는, "검인" 도장이 찍힌 문서들이 그것을 반증한다. 즉, 학생들이 만든 문서 중에서 "검인" 도장을 받지 않고 교내에 게시한 것은 모두 불온한 문서이며, 불법이라는 것이다. "검인" 도장을 찍는 역할은 누가 하는가? 학교 측이다. 말하자면, 학교 측의 기분을 나쁘게 할 수 있는 것은 게시 허가가 날 리가 없고, 따라서 모조리 불법이라는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두발자유를 위해 뜻을 모으자는 내용의 글도 불법이었고, 그래서 학생부에서 글쓴이를 찾느라 혈안이 되었던 것이다. 어디 마빡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감히 건방지게 이런 글을 쓰고 있어?

 그렇지만 공교롭게도 이런 교칙은 ‘위헌'이다. 그냥 잘못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언론·출판·집회·결사 등의 자유"를 명시한 헌법 조항에 아주 철저하게 위배된다는 것이다.(제 21조 1항 모든 국민은 언론ㆍ출판의 자유와 집회ㆍ결사의 자유를 가진다.) 1998년에 문화관광부에서 발표한 청소년 헌장에도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자유롭게 펼칠 권리"가 명시되어 있으며, UN 어린이·청소년 권리 조약에도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가 명시되어 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그 자체로 ‘불법'인 조항을 왜 우리가 지켜야 하는가? 우리는 헌법을 따르고 싶다.
개인이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권리는 민주주의의 기본 전제에 해당한다. "검인" 도장이 찍힌 생각과 느낌, 의견만으로는 민주주의를 이룰 수 없다. 언제까지 마냥 ‘유신의 추억' 속에서 지낼 텐가.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다.
Posted by 오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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