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인간적인 학교생활,
하지~만!
학생인권법안이 출동하면 어떨까?


∞ 학생인권법안이 뭐야?

국회 교육위원회에 있는 민주노동당 최순영 의원이 2006년 3월에 대표로 발의한 초중등교육법 개정안!
담고 있는 내용은 두발자유, 체벌금지, 강제자율학습금지, 강제보충수업금지, 언론․표현․집회․결사․사상․종교의 자유 보장, 학생회법제화, 차별금지, 인권교육….


∞ 통과시키려면 어떻게 할까?

머리가 굳은 몇몇 국회의원님아들 머리를 좀 풀어주려면 청소년들의 강력 압박 마사지가 필수!
학생인권법안 통과를 위해 적극 활동하는 여러 청소년인권단체들에 참여하는 거쥐!!
민주노동당 청소년위원회,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청소년다함께 등등…. 단체는 많고 할 일도 많다!
서명이나 친구들한테 법안 알리기는 기본 중에 기본!

Posted by 오승희



언론자유에 힘쓰시는 교지편집부들께 사과드립니다. 위에 “교지”는 언론의 본분을 망각하고 검열과 압력에 자발적으로 굴종하는 비겁한 어용 세력들을 한정 지칭하는 것임을 밝힙니다.




《오답 승리의 희망》은 청소년들이 만드는 자유언론입니다. 글을 써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오답 승리의 희망》 사이트는 http://cantabile.mireene.com 입니다.

《오답 승리의 희망》은 매학기 초에 나올 듯. 돈과 글만 더 있음 1년에 4번도 가능!? 발행 한 번에 20만원 좀 넘게 돈이 듭니다. 자유언론질이 힘들어요. 100원만 주세효. 이건 절대로 구걸입니다. ㄱ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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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오승희




덜컹, 육중한 금속제 문이 열렸다. 그리고 K가, 그 열린 문을 통해 베란다로 나왔다. 눈이 부신지, 눈을 가늘게 뜨고 한 손으로는 야구모자의 챙처럼 펴서 햇빛을 가리고, 대충 그런 모습이었다. 삼월 하순의 햇빛은 그렇게, 눈이 부시
게 밝았다. 어디 밝기만 한가, 따뜻하기도 무지하게 따뜻해서, K는 평소에는 주머니에 찔러 넣던 손을, 석방해 주었다. 평소엔 잔뜩 움츠리고 있던 목도, 마치 지가 기린 목이나 되는 양 쭈욱 늘어나, 봄 햇볕을 만끽하고 있었다.

원래 건물이 자리잡은 터가 높은데다가, 그 건물에서도 최고층인 4층의 베란다였다. 높은 지대인 만큼, 주변이 모두 시야에 들어왔다. 오밀조밀, 빼곡히 들어선 건물들 위로, 그야말로 아무 것도 없이 텅 빈, 밝은 하늘색의 배경이 봄 햇볕 속에 빛나고 있었다. 말하자면, 밝은 하늘색의, 지문 하나 묻지 않은 깨끗한 새 도화지, 랄까. 가을하늘 같은 살기등등한 푸른색도, 겨울하늘 같은 뿌우연색도 아니었다. 푸른색은 푸른색인데, 왠지 따뜻할 것 같은 푸른색, 그런 색이었다.

다음 시간이 어떤 과목 시간이지, 하고 생각하다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그런 생각은 해서 뭐해, 하는 것이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50분 동안 부지런히 입력받았으니, 10분짜리 쉬는 시간만이라도 그런
생각 안 했으면-인 것이다. 대체 그게 뭐 하는 짓이야, 50분 내내, 무슨 인형인 양 의자에 앉아서, 눈은 칠판을 향해 레이저 빔이라도 날릴 듯, 귀는 ‘선생님의 말씀-중파 구백육십사 킬로헤르츠, 에프엠 백칠점삼 메가헤르츠’ 하는 라디오 방송을 수신하는 듯, 손은 샤프펜슬을 들고서는 칠판의 내용을 복사하듯, 대충 그런 자세로 있는 것이다. 에라, 인생이 수동태인 새끼.

그러나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쉬는 시간은 그런 것이다. 바람 한 점이 지나갔다. 그 바람에 K의 긴 머리가 살짝 흩날렸다. 주위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그의 평소 바람대로, 그렇게 기른 머리였다. 누구누구는 ‘바람직한 머리 모양은 이런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해라, 요렇게 해라, 조렇게 해라,’라며 어쩌고저쩌고 하곤 했지만,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또 다른 누구누구는 ‘머리 기르는 건 문제 삼지 않겠지만, 너 같은 태도는, 자유가 뭔지 잘 모르는 거야.’라며 이러쿵저러쿵 했지만, 정말이지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한텐 이게 바람직한 건데.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새 몇 마리가, 푸른 도화지 위를 지나갔다. 햇빛이 워낙 강렬해서 어떤 새인지는 확실히 알기 어려웠지만, 꼭 그걸 알아야할 필요도 없다. 그냥, 저건 새다. 타조나 에뮤나 닭 같은 녀석들이 아닌 이상은, 다 두 날개로 하늘을 날아다니
는 것들 아닌가. 다른 특징이야 없을 리가 없지만, 아니, 하나하나가 다 고유하고 독립적인 개체들이니 한 가지 기준으로만 묶는 건 좀 불합리하다고 생각되기도 하지만, 어차피 중요한 건 날아다닌다는 거니까.

그는 문득, 날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중력의 족쇄를 풀어버리고 푸른 하늘과 빛나는 태양을 배경 삼아 신나게 날아다니는 것, 그건 생각만으로도 유쾌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또 멋지기는 얼마나 멋져? 저 새들을 봐, 온 몸이 멋으로 도배되어 있는 걸. 그는, 이렇게 생각하며 하늘을 향해 자신을 내던지기 시작했다. 날고 싶다면 날아라, 라는 것이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 백만 스물 하나, 백만 스물둘, 백만 스물 셋, 앗, 까먹었다. 처음부터 다시, 하나, 둘, 셋, 넷, …….

이렇게 백만 번도 더 자신을 하늘을 향해 내던졌다. 자세도 한 번 한 번 바꿔가면서-이번엔 크리스 벤와의 다이빙 헤드벗이다, 이번엔 에디 게레로의 프로그 스플래쉬다, 그냥 평범한 다이빙 자세다, 공수부대가 강하하는 자세다, 이런 자세다, 저런 자세다, ‘아몰라귀찮아아무렇게나날아보자’자세다, 기타 등등. 그러나 곧, 그는 진짜 날고 싶어 뛰어내리는 거라면 어떤 특정한 자세를 취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게, 얼마나 부자연스러운가 말이다. 평소에
단 한 번도 취해보지 않은 자세가, 해탈의 순간이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취해지느냐, 그런 것도 아닌 것이다. 그냥, 될 대로 되라지, 그래, 이게 진정한 자유인의 자세야.

다시 바람 한 점이 지나갔다. K의 머리칼이 다시 한 번 흩날렸다. 아니, 흩날리지 않았다. 왼 손으로 머리칼을 살짝 누르고 있었던 탓이다. 바람은 금세 멎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다시 하늘을 보았다. 조금 전까지 날아다니던 새들이,
보이지 않았다. 없었다. 다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건, 아까 불던 바람들과는 다르다. 느낌이 다르다. 다르다기 보다는…… 틀리다! 중국 황하 유역의 황토층에 쌓여 있는 흙먼지들은 기압이 낮아지면 상승기류를 타고 하늘 높이 올라갔다가 기류를 타고 한반도로 옵니다, 이게 바로 황사입니다, 하는 지리 선생님의 멘트가 생각날 정도의, 꽤나 강력한 모래먼지가 바람에 일었다. 숨이, 콱콱 막히기 시작했다. 이런 걸 조건반사라고 하나.

“띠리리리리링- 띠링디리리리링-”

수업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다시, K는 저 숨 막히는 가스실로 들어가야 한다. 그는 금속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서도, 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나 그 하늘은 그 하늘이 아니었다. 모래먼지 때문인지, 약간 뿌옇게, 그리고 누르스름하게 변해 있었다.

여전히, 봄햇볕은 따뜻했다. 주번은 커튼을 쳤다. 햇빛 때문에 칠판이 잘 안 보인다고 했다.


전주 상산고등학교 권혁일

Posted by 오승희

- BoA 싱글 [Everlasting] 중에서 Everlasting -

BoA의 이번 싱글은 살까 말까 망설였다. 그 이유는 순전히 내가 ‘Everlasting’이라는 단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국 구입하고야 말았고 언제나 그러하듯 감성과 이성의 경계에 있으려고 하는, 주관적이지만 객관적이려고 노력하는(?) 감상을 쓰기로 했다.

이 싱글의 제목이자 타이틀곡의 제목이기도 한 ‘Everlasting’이라는 단어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단어이다. 이 단어는 ‘불후한, 영원한, 변함없는’이라는 뜻뿐만 아니라 ‘지겨운, 지루한’이라는 부정적인 뜻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싱글, 그리고 타이틀곡의 제목이 순전히 ‘불변의; 끊임없는; (지조, 애정 따위가) 변함없는, 흔들림이 없는’이라는 뜻을 가진 ‘Constant’였다면 이 곡이 주는 효과는 반감되었을 듯하다. 또한 연약한 느낌을 주는 모음 ‘E’라는 음운과 강한 느낌을 주는 ‘C’라는 음운의 차이도 어느정도 존재하는 것 같다. 왠지 모르게 ‘E’라는 음운으로 시작하는 ‘Everlasting’이라는 단어는 ‘C’로 시작하는 ‘Constant’보다 영원성에 대해 그다지 강하지 못한 기대를 품게 만든다.

“영원히 영원히 잊지 않죠 어떠한 미래가 기다려도 / 긴 시간 멀리서 살아가도 그대와 잡은 이 손 놓치지 않을게요”라는 대목에서는 ‘Everlasting’이 지닌 영원성의 의미가 드러나며, “무리해서라도 널 잊지 않으면 내일의 나에게로 갈 수 없죠”라는 대목에서는, 이 대목에 현실에 대한 변화를 꾀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변화는 현실이 지겨워졌다는 걸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Everlasting’이 지닌 ‘지겨움, 지루한’이라는 의미가 드러난다.

이 노래의 선율은 비교적 한 음에 많이 머물러 있거나 상당히 완만한 차례가기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 선율은 밝지만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믹싱과 함께 다소 착 가라앉은 분위기를 조성한다. 그래서일까, 이 노래에서 BoA의 음색은 물이라든가 공기 같은 느낌이라기보다는 비교적 변화가 적은 흙이나 나무 같은 느낌이다. 이별노래임에도 불구하고('안녕이란 인사가 여행을 위한 거면 가장 예쁜 미소로 나는 웃어줄텐데'라는 대목) 장조(G장조- 그리고 중간에 A장조로 옮겨가는)이다. 이러한 조성으로 “너 지금 떠나도 언젠가는 꼭 돌아올 거라고 믿어” 내지는 ‘쿨함’을 대변하려고 한 게 아닐까.

지금까지의 내 글이 ‘역시, 꿈보다 해몽이야’라는 느낌을 준다고 해도, 이 곡이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는 곡이라는 건 분명하지 않은가.

(익명)
Posted by 오승희

집어쳐!
<여고생해방전선>, 「음악의 무정부」

왜 우릴 가둬놓니
이 새끼들아 날 내보내줘
학교는 감옥이 아니다
감옥이 아닌 학교에서 나는 살고 싶어
시험도 경쟁도 석차도 싸움도
학교는 모든 게 없는 곳이지
왜 우릴 가둬놓니
이 새끼들아 우릴 이 감옥에서
이제 내보내줘
(「학교는 감옥이 아니다」)
집어쳐
그런 교육따윈 집어쳐
더 이상 듣기 싫어
학교 선생 교육 모두 엿먹어라
학교 선생 교육 모두 엿먹어라
교장 교감 좆까
(「집어쳐」)


〈여고생해방전선〉은 한국 최초의 아나키펑크라 평가. 2001년 만들어져서 약 1년 활동. 음반 「음악의 무정부」. 음악은 음반 제목이 잘 어울린다, 라고 하면 유남쌩? 대략 정신이 멍해지는 곡도 있음. 앞에 달아둔 곡들은 「음악의 무정부」에 실린 곡들 중에 교육 관련된 것들.

갠적으로 아쉬운 점은 〈여고생해방전선〉임에도 학교 노래들에서는 「엄마 나 군대가기 시러요」 수준의 인식을 가사로 보여주지 못하고 불만을 미친 듯이 토해낸 가사만 있다는 부분일까. 「엄마 나 군대가기 시러요」 “그 지배계급 씹새끼들을 왜 지켜줘야 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요 엄마도 아들아, 군대가 싫단다 사람을 죽이는 훈련을 배울 수는 없어요 (중략) 양심적병역거부! 비양심적병역거부! 상식적병역거부!”

그렇긴 하지만 어쨌건 「집어쳐」에 공감하는 현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언제까지 그따위로 살 텐가!! 뷁.
「일하기 싫어」 등도 재밌음.

(익명)
Posted by 오승희




『모모』를 읽어보았는가. 그래, 모 드라마에 나왔다고 하여 유명해진 그 책 말이다. 미하엘 엔데 씨의 동화인지 소설인지 애매한 책. 그 책에서 첫 번째로 인상 깊었던 것이 귀기울 줄 아는 모모와 한 번 쓸고 한 번 숨쉬는 청소부
베포, 이야기꾼 기기의 삶이었고, 두 번째로 인상 깊었던 것이 회색신사들이었다. 회색신사라는 존재는 미하엘 엔데씨가 사람들에게 던지는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모』를 읽어도 알지 못하는 듯하다. 난독증일까? 아니면 읽고 나서 곧장 잊어버리는 건망증? 자기 안에 얼마나 많은 회색신사들이 기생하고 있는지. 그리고 자기 자신이 회색신사에 가까워져 가고 있는지.

벼슬이라는 웃기지도 않는 수식어를 달고 있는 고등학교 3학년의 삶을 보자. 예를 들어 담임선생님들은 종종 수능이 200일도 안 남았다고 아침에 20분 일찍 와서 공부하고 점심시간에 40분 일찍 와서 공부하라고 성화를 부리고 있
다. 시간을 아끼라고 성화를 부리고 있다. 지금 열심히 해서 나중에 여유가 있을 때 쉬라고 하고 있다. 이런 태도가 사람들에게 찾아와서 하루에 몇 초를 낭비하고 있는지 아시느냐고, 계산기를 두드려 현란한 숫자로 사람들의 기
가 질리게 만든 다음 시간을 아끼라고 하고선 그들의 시간을 훔쳐 먹고 사는 회색신사들의 행태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지금 열심히 일해서 저축한 시간을 가지고 나중에 여유롭게 살라는 논리,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라는 논
리.

『모모』가 9주 연속 베스트셀러였다고 하는데, 그 많은 사람들이 『모모』를 읽었다지만 과연 그 중에 자기 삶을 변화시킨 사람이 몇이나 될지 의심스럽다. 『모모』를 읽어도,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읽어도,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모양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를 봐도 알지 못하는 모양이다. 말이야 좋지만 실제로는 별 수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회색신사는 허구나 과장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진짜 회색신사는 자기 안에 있는 거라는 사실을.

『모모』가 아니더라도 문명비판서는 넘칠 정도로 많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지루한 책도 있지만 재미있는 책도 있고, 논리적이거나 감명 깊은 책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문명비판서들이 나오는데도, 왜 이 사회는 그리 바뀐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 걸까. 사람들은 읽어도 알지 못하는 상태에 빠진 걸까.

사람들이 특이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때때로, 초등학교 도덕교과서의 일부나 인권선언, 대한민국 헌법 같은 것들을 곧이곧대로 믿고 있는 사람들일 뿐이다. 현실이 그렇지 않다면 당위적으로 그래야 하며,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순진한 사람들일 뿐이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다. “합리적인 사람은 자신을 세계에 조화시킨다. 비합리적인 사람은 세계를 자신에게 맞추려고 노력한다. 그러므로 모든 진보는 비합리적인 사람 손에 달려있다.”(조지 버나드 쇼) 괜히 “내가 정말 배워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라고 하겠는가.

우리에게 미래는 현재의 일종일 뿐이다. 나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다보면, 계속 보류하다보면 그 보류된 마음이 쌓여서 미래에는 풀 수 없는 마음의 앙금이 되어버린다. 현
재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미래. 공허하지 않은가? 나중에 생각해보면 지금의 욕심이나 그런 게 별거 아니고 논 게 후회만 된다고 지금 열심히 공부하라는 선생님에 대해 어떤 선배가 이렇게 말한 것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그렇게
따지면 죽고 나서 보면 삶이란 아무 의미 없는 것이잖아. 그런 논리를 들이대서 강요할 거라면, 모범을 보여서 그냥 지금 삶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죽어야지.”

(익명)

Posted by 오승희

한 통계조사 자료에 따르면 한번이라도 담배를 피워본 경험이 있다는 학생들의 수가 전체 학생 수의 절반이 넘었다고 한다. 날로 심각해지고 있는 청소년 흡연 문제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오늘날 우리들의 학교에서 담배를 피우는 학생이 단 한명도 없는 학교란 찾아볼 수 없다. 간단하게 모든 학교에서 담배를 피우는 학생들이 몇 명씩은 있다는 것이다.

학교에서는 이런 소수의 학생들을 찾는 데에 혈안이 되어있다. 각종 두발불량, 복장불량 등과 더불어 학생의 흡연문제는 교사들에게 있어서 ‘반드시 적발해야하는’ 그래서 ‘반드시 수위 높은 징계로서 엄중히 다스려야 하는’ 사항임에 틀림없다. 그렇다. 많은 일반인들이 생각하기에도 그럴 것이다. 학생은 미성년자이고, 미성년자에게 담배를 판매하는 것은 불법이니 미성년자들은 담배를 절대로 피워서는 안 된다. 이는 물론 지당한 말이다. 지극히 당연한 생각이고, 징계에 처해져야할 행위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 더욱이 학습을 본분으로 하는 학교에서.

그러나 학교에서 교사들이 흡연하는 학생들을 잡기 전에 반드시 알아둬야 할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남자 교사들 중 다수가 흡연자라는 사실이다. 물론 교사들은 성인들이다. 그래서 담배도 마음대로 살 수 있고, 마음대로 피울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청소년 흡연 문화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교사들은 알고 있을까. 흡연자인 교사가 담배 피우는 학생을 처벌한다는 것은, 교사를 성인으로, 학생을 미성년자로 두고 보았을 때에는 당연한 것이지만, 교사와 학생을 동등한 인간으로 바라보았을 때는 흡연자가 흡연자 나무라는 꼴이 되고 만다. 우습지 않은가?

흔히들 전통 있는 명문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면, 교장 선생님의 훈화나 선생님들의 말씀에 이런 말이 꼭 섞이게 된다. “자랑스러운 선배들을 본받도록 하여라.” 옛말에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는 말이 있듯이 선배들이 바람직한 학교생활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그것만으로 신입생들의 본보기가 될 수 있다. 선배들이 모범적으로 봉사에 솔선수범하고 학습태도가 우수하면, 자연히 그 후배들도 그 선배들을 본받게 되어있다. 하지만 선배들이 교칙을 피해 다닐 궁리만 하고, 성적은 전국에서 밑바닥을 기고 있다면, 그 후배들은 선배들을 자랑스럽다고 할 수 있을까?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은 것이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윗물은 더러운데 갑자기 밑으로 흐르는 물이 깨끗하게 정화될 수는 없지 않은가.

청소년의 흡연 문화. 먼저 교사들부터 금연운동을 실시해야 한다. 교사들이 우선으로 본보기가 되어야 학생들의 흡연 문제도 차츰차츰 해결 될 수 있을 것이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대면할 수 있는 성인들은 모두 교사들이다. 그런데 교사들부터가 흡연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어떻게 “담배는 몸에 좋지 않고, 또 너희들은 미성년자이니 담배를 절대 피워서는 안 된다.” 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가. 물론 학교 측은 이렇게 변명할지도 모른다. ‘담배란 것이 학생들의 학습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줄 수도 있고, 또 담배와 같은 중독성이 강한 물질에 중독되면 후에 마약과 같은 사회적 문제가 심각한 것들에도 호기심을 가지게 될 수 있으며, 또 미성년자들이 흡연을 하기에는 담배라는 것이 너무나도 몸에 해롭다.’ 그럼 먼저 그렇게 해롭고 중독성이 강한 흡연을 교사들부터 학생들에게 보이지 않아야 할 것이다.

“선생님도 피우시면서 우리들은 왜 못 피우게 하나요?” 라는 반박에 “너희들은 미성년자이기 때문이다.” 라는 해명으로는 학생들의 흡연을 막지 못한다. 먼저 교사들부터 금연하는 모습을 학생들에게 보이고 차츰 청소년 흡연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면, 학교에서 담배를 입에 문 학생들의 모습을 조금은 덜 보게 되지는 않을까.

ToujoursPur Justhin
Posted by 오승희

스크린쿼터가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노무현정부의 “한미FTA추진 4대 선결조건”으로 한국영화의 M/S(Market Share:시장규모)가 반 날아간 것은 확실하다. 해외에 뒤지지 않는 대형배급사와 자본을 가진 한국이지만, 적어도 이제 전처럼 섣불리 뛰어들 수 없다는 것이 업계 지론처럼 되고 있다.

물론 한국영화가 주먹구구식 개발을 해왔고, 블록버스터 등의 경우 전적으로 감독에 의존, 성소-2424-태풍의 참극을 막지 못한 후진적 시스템이라는 것은 상당부분 옳다. 또한 이러한 둔중한 관리에는 “144일 의무상영”의 스크린쿼터가 보호벽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영화가 나름대로 기반을 잡고 인도/홍콩/중국/프랑스와 더불어 자국에서 헐리우드와 맞장 뜰 역량을 갖추게 한 배경 역시 스크린쿼터다. 한국영화 암흑기라 불리는 80년대 말~90년대 초에 한국영화의 M/S를 지탱해주었던 것 역시 스크린쿼터다. 이러한 것이 97년 쉬리를 필두로 한국영화가 부활
의 서곡을 울린 배경인 것이다.

스크린쿼터, 지금 당장 없어도 큰 일 안 벌어진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위기가 오면? 영화판 살아있고 관객 유지된다면 “재기의 기회”가 있지만, 완전히 죽어버리면 끝이다. 헐리우드 말고 선택지가 없게 된다. 위기는 2~3년마다 반복
되고 있고, 최근에도 일어났다. 한반도 이하 올여름 만들어진 영화들이 부진을 면치 못하다가, “괴물”로 겨우 재기하고 있는 실정이다. 만일 “괴물”이라도 없었으면? 펀드사 2-3개 투자중단 선언하면 4-5년은 한국영화 구경하기 힘들 것이다.

올 7월을 보자. 스크린쿼터 축소가 나오자마자 해외배급사들은 “본사개봉일정을 조정해가면서(의혹일 뿐이지만, 충분히 추측가능)” 물량공세를 폈다. 6~7월 개봉한 대작들 때문에 몇 년 만에 처음 한국영화가 M/S 1위를 헐리우드에게 넘겨준 것을 기억하자. 문화는 빼앗기면 되찾기 매우 힘든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즐거움과 웃음을 찾
는 일. 간단한 일 같아도 그런 힘을 빼앗긴 수많은 나라들의 국민들은 헐리우드, 미국․유럽 대형자본만으로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스스로의 힘으로 웃을 수 없는 비극적 국가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민중이 스스로를 지키는 일이다.

정부당국자에게 한 마디. 핸드폰으로 국 끓여먹을 수 없고, 애니콜 CF로 안구 습기찰 일 없다. 그 자랑하는 SD램 가지고 만들어내는 것이 결국 무엇인가? 문화상품이다. 인간 욕구의 정점을 누가 컨트롤하는가가 1세기 이후 경제주도권을 결정할 것이다. 이런 것을 무시하고 기간산업만으로 쇼부치려는 당신들, 정말 인간이하다. 당신들은 영화보고 쌀밥 먹을 자격 없다.

이태우
Posted by 오승희

교사가 학부모에게 무릎 꿇은 사건, 학생이 교사를 때린 사건. 스승의 날이 있는 5월은 ‘교권추락’ 기사로 넘쳐났다. 사실 이 ‘교권추락’이란, 전교조결성 이후 보수세력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교사가 노동자라고 하면 ‘스승의 권위’가 추락한다는 식이었다. 이후 두발자유, 체벌금지 등 청소년인권요구가 공론화되자, 일부 학부모의 간섭이나 일부 학생의 반항을 놓고 ‘교권추락’이 발전(?)해왔다. 교권이 대체 뭔데 그렇게 난리일까.

자 교권1, 전문가로서의 권리. 교사는 그 자질과 지식을 공인받은 전문가이며, 비전문가들의 부당한 간섭을 안 당할 권리가 있다. 교권 2. 양심적 권리. 교사는 자기 양심에 따라 교육하며, 교장, 교감 등 부당한 압력을 넣을 수 있는 사람들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교권3. 노동자의 권리. 대개의 교사는 임금을 받고 가르치는 노동자이며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가진다.

헌데 교권이 추락한다고? 그럼 전엔 교권이 높았나? 독재를 민주주의라 가르쳐야 했는데 무슨 양심적 권리? '교련' 과목에선 군출신 교사도 교사행세를 했는데 무슨 전문가의 권리? 민주화이후 교권이 더 침해당한다니, 참 어불성설이다.

학생들을 때릴 권리나 두발을 규제할 권리는 교권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3가지 중 어느 것도 그런 권리를 내포하지 않으며, 교권은 기본적 인권을 침해할 권리가 아니다. 예컨대 체벌의 근거는 현행 초중등교육법인데, 이는 UN아동권리조약에도 어긋나며 헌법상 신체의 자유도 침해하므로 정당성이 없다. 최근 교권추락 주장을 펴는 자들은 인권을 맘대로 침해할 권리가 교사에게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외의 다른 권리를 무시하는 자들이다.
 
만일 교권이 높은 곳에 있었다면 그건 바로 학생들보다 높은 곳에 있던 것이리라. 학생 위에 군림하는 교사가 이상적이라고 하는 자들이 ‘권리’ 운운할 자격은 없다. 학생이 교사를 때린 사건은 교권침해라기보다는 교사의 인권이 침
해당한 것이다. 체벌금지에 동의하는 사람들도 체벌에 대한 저항으로 교사를 패는 것에는 비판적이다.

학부모의 간섭은? 학부모가 교육 과정에 부당한 압력을 가하는 것은 분명 교권침해다. 그렇다면, 학부모가 두발규제를 강화하라고 하는 것은? 학생들이 자주 듣는 말이 교사들은 해주는 게 편한데 학부모들이 싫어한다는 말이다. 두발규제가 학부모 전화로 강화된 학교도 있다. 이런 게 교권침해 아닌가? 그러므로, 청소년인권운동이야말로 이런
교권침해에 맞서 싸울 때 교사에게 가장 강력한 우군이 될 것이다.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분량관계상 허락받고 줄였습니다. 죄송.)
Posted by 오승희

중고등학교가 정치적 불모의 시기라는 주장은 일반적이다. 투표권 없고 공직담임권 없다. 언론·표현․집회·결사의 자유? 착해빠지신 어른들이 침해한다. “아직 미성숙해서” 교활한 꾐에 빠질까봐서란다. 그래도 지키는 일말의 자존심. “어른들은 자유라고 생각하고 있으나 그것은 큰 잘못이다. 그들이 자유로운 것은 의원을 선거하는 기간 동안만이며 의원이 선출되자마자 어른들은 노예가 되어 버린다.” 루소 따라하기. 하하. 그런데 이런 식으로 자존심을 지켜도 그 별 거 아닌 투표권이 부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사실 투표권보다 더 부러운 건 언론·표현·집회·결사의 자유같은 것들이긴 하지만.


예컨대 2006년 4월에 양동중학교에서 두발자유 체벌금지 시위했더니 누군가가 “니넨 기본권 없다.”라는 요지의
말을 했다고 한다. 징계위협은 덤. 여기서 갑자기 좀 진지하게 묻는데, 과연 중고등학교는 당연한 정치적 불모‘였’을까? 천만에 말씀 만만에 콩떡! 치사찬란원단빤스인 자들이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 나는 고발한다. 그런 거짓말을.


자, 1920년대. 학생들의 항일운동이 있었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대표적. 그날 기념하려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정해놓았다. 헌데 그거 아시는지? 광주학생항일운동은 마르크스주의 단체인 성진회(독서회)가 이끌었다. 학생들의 독립운동 뒤에는 빨갱이들이 있었다! 4.19 때도 그랬고, 중고등학생들의 사회운동 명맥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왔다. 민주화 시위대라도 중고등학교 앞 지나가면 안에 있던 학생들이 호응도 해주고, ‘불온’한 유인물, 신문도 찍고….


80년대, 이야기가 좀 달라졌다. 대학교육이 직업훈련이 되어버렸다. 먹고 살려고 대학입시 공부하는 애들이 늘면서 학벌 중요해지고 내신 도입되면서 입시경쟁 전보다 더 빡세졌다. (요새 내신강화하고 내신등급제한다는 것도 음모다.) 86년에 중학생이 쓴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유서가 유명하지만 여기선 좀 짧은 거 소개한다. 88년에
잠실여고 학생이 쓴 거.


노동이다 노동
아니 징역 3년을 받은 죄수에게
던져진 가혹한 형벌이다.
새벽녘 어제의 달이 미처
지지도 않은 무거운 하늘을 이고,
돌캐러 간다.
죄수번호 21060, 소속 00여자 수용소
손이 부르트도록 머리가 깨지도록
돌을 캔다.
선생님들은 다이아몬드가 있다고
열심히 쉬지 말고 파보라고 하시지만
내 앞에 쌓이는 건 내 손에 쥐어지는 건
쓰잘 데 없는 자갈뿐이다.
사랑이란 단어, 잊은 지 오래이고
꿈이란 풍선, 터져버린지 이미 오래다.


계속 그렇게 몰아대니까 꿈틀한 게 80년대 중반부터. 중고등학생들은 산발적이긴 했지만 사학비리 척결, 두발규제철폐, 보철투(강제보충수업철폐투쟁), 입시경쟁 반대 외치며 시위, 수업거부 등에 나섰다. 그러던 게 87년 6월항쟁 하면서 “대통령부터 반장까지 직선제로!” 구호 나오고 서울지역고등학생연합회가 명동성당에서 노태우반대농성도
했다. “노동해방”, “조국통일”도 고등학생들 입에서 이야기되었다고 한다. 89년~90년에는 전교조랑 참교육운동도 해서 한 해 동안 46만 중고생들이 들고 일어났다. “굴종의 삶을 떨쳐 반교육의 벽 부수고”(전교조테마 「참교육의 함성으로」 中)


시위, 투신, 철야농성…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그 흐름들이 다 이어지지 못했다. 91년 강경대 열사 김철수 열사 사건 갖고 유인물 뿌린 고등학교 학생회도 있었고, 91년부터는 '참배움일꾼청소년회' '청소년회 샘' 같은 단체들이 활동했지만 94년에 샘이 국보법에 걸리면서(백과사전 ‘샘 사건’.) 전부 위축되었다. 결국 중고등학교를 정치적 불모로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중고등학생운동 박멸에 성공하신 분들에게 주먹으로 인사 대신 하고프지만 나는 평화주의자인지라 참는다. 열 받는다고 주먹질하면, 폭력으로 교육하는 몰지각한 인간들과 다를 게 뭐람, 나무아미타불.


이렇게 정치적이던 중고등학교를 비정치적 공간으로 만들어놓고는 태연하게 중고등학생이 비정치적인 것은 당연하다고 말하는 당신은 누구? 여긴 어디? 아리스토텔레스 왈, “인간은 정치적인 동물이다.” 비정치적인 중고등학생들은 인간도 아니니 내가 누구인지 통 알기가 어렵다. “나는 누구?” 청소년도 적 극 정치적 동물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좀 인간답게 살지. 권리주체, 변혁주체. 유남쌩?


(익명)

Posted by 오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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