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을 마치고 피폐해진 편집진)


  믿기 어렵지만, 6호가 나왔습니다. 믿기 어려워도, 늘상 하던 인사는 해야겠지요?

  청소년자유언론 「오답 승리의 희망」. 애칭 “오승희”, “승희”도 괜찮습니다. 대체로 한겨레결체를 씁니다. 계간지이고, <청소년인권모임 나르샤>(cafe.daum.net/jbhumanrights)에서 냅니다. 자매지는 「청소년의 눈으로」.

  오승희는 검열 없는 신문, 자유로운 신문, 하고픈 말은 하는 신문입니다. 청소년들의 투고를 받아서 만듭니다. 지면 부족할 때는 못 실어주기도 하지만, 용서해주시리라 믿습니다. 
  
  투고받은 글들은 오승희 편집진의 입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편집진의 입장은 좀 모호하지만…. 나름 편집진의 입장이랍시고 쓰는 건 1면의 <투덜리즘> 뿐이니 참고하시길.


  홈페이지에 들어와서 지난호도 보고 돈 좀 후원해주세요. 흑흑. 돈이 부족해서 원래 6호는 12월 20일 전에 내려고 했는데 무지 늦어지고 말았답니다. 이게 다 노무현이랑 이명박 때문인 거 같습니다. 라랄~ ㅠㅠ
Posted by 오승희

  입시성적도 최고, 학생이든 교사든 말하는 것이 상부로 반영되지 않는 점, 꽉 막힌 건물구조라는 학교 소개를 들으면 문득 소설 ‘1984’정도의 학교라고 상상할지 모르나 학교에 충성의식이 투철한 건 극소수 뿐. 대다수는 나처럼 느슨하게 현재의 행복과 미래의 행복을 줄타기하는 쪽이다. 그래도 혹시 기숙사 룸메이트가 충성파일지 몰라 걱정했지만 다행히 흔한 성격의 사람이었다. 

  학교생활은 꽤 순조로웠다. 학교 안에 기숙사가 있어서 밤샘 자율학습을 운영하긴 하는데 박카스도 주고, 교내 야식집도 있어서 꽤 할만한 편이었다. 그래도 힘들 때엔 성공해서 잘 사는 모습을 상상하며 견딜 수 있었다. 나중에 밤샘학습을 같이 했던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대체로 비슷했다 한다.

  또 너무 조용했냐 하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가끔 등록금을 늦게 내는 학생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평소 학교에 반항적이었던 녀석들이 퇴학을 당한 일이 있었다. 아마도 이 사건에 관련된 모습들이 내가 처음으로 보았던 ‘해방11월’의 조짐이었을 것이다. 이 사건 이외에도 ‘해방11월’에 영향을 준 사건은 많다. 다만 이 사건은 ‘해방11월’이 어떤 분위기 속에서 일어났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대표적 사건 중 하나이다.

  학교의 식사시간에는 학생과 교사가 각기 다른 식당에서 식사를 한다. 그래서 학생들만의 여가와 잡담은 식당에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교사의 눈치를 볼 일도 없고, 학생들끼리 쉽게 모일 수 있기 때문이다. 조용히 지내고 싶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 일은 꽤나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였다. 벌써부터 일부 선생들이 그 학생을 일방적으로 내쫓는 것에 부정적인 입장을 이야기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런 소문들은 은근히 입장의 차이를 띈 논쟁의 형태로 변해갔고, 평소에 고민할 기회가 없던 사람들은 갑작스런 선택을 요구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당황했다. 그 중에는 논쟁을 극단적으로 싫어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지켜보면서 한마디씩 자신의 생각을 거들었다. 처음에는 누군가의 주도 하에 이야기가 시작되었지만 그것은 갈수록 불필요했고, 그런 식으로 시작된 논쟁은 결론도 뻔했으며 결정적으로 재미없었다. 결국 사람들은 제각기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앉아서 작은 그룹을 형성하고 각각의 관심사를 가지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서 몇몇 그룹에서는 학생들과 친한 교사를 데리고 와 식당에 있는 학생들을 경악하게 만들었지만, 교사와 대화하는 것이 위험할 것이란 우려와는 다르게 꽤 좋은 이야기들이 오가는 것을 본 다른 그룹들은 제각기 마음이 맞는 교사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물론 마음이 맞는 교사가 같을 경우 그룹간의 소통도 활발했는데 이것을 계기로 학생들과 친해진 교사들이 조금 있었다. 물론 모든 교사들과 친해진 건 아니었는데, 수업과 마찬가지로 지겹게 이야기하는 교사들은 학생들과 친해지기 어려웠으나 비교적 협조적인 교사들 축에 낀다는 이유로 학생식당에 초청받고는 했다.

  언제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교사들은 학생들의 초청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 학교에서 압력을 넣었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들렸다. 그로부터 며칠 후 학생부에서는 학생식당에 교사를 파견했다. 학생식당에서 일어나는 학생들 간의 폭력사건을 방지한다는 것이 학생부의 명분이었다. 애당초 별로 일어나지 않던 주먹질도 금지되었지만, 학생들끼리 몰려서 이야기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학생부에선 위화감 조성을 방지한다고 하였다. 평상시에 가만히 있던 녀석들 중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던 녀석들도 있었다. 학생식당에서의 소모임을 경험한 사람들은 제각기 자신들의 소박한 일상을 빼앗긴 것에 분해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도 그렇다할 움직임은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체념하고 공부를 하는 쪽과, 음식에만 열중하는 녀석들도 있었으며 제각기 탈출구를 찾아 조용히 있는 쪽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역시 그 사건의 클라이맥스는 쇠고기 사건이었다. 다른 학교가 여름방학을 하고 있을 시기에 이 학교는 여전히 배식을 포함한 밤샘학습을 하였다. 방학시즌에도 학생부 교사들은 철수하지 않았다. 학생부 교사가 있음에도 소모임을 하려던 녀석들은 다음날 얼굴이 심하게 퉁퉁 분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도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고 조용히 넘어가려던 순간 일은 터지고 말았다. 쇠고기였다. 그것도 썩은 쇠고기였다. 학생들이 배식 받은 쇠고기에는 양념같이 보이는 구더기들이 요리되어 있었다. 이 날만큼은 파견된 학생부에서도 학생들의 분노에 찬 소문을 막을 수 없었다. 식탁을 매개로 해서 모든 식당에 썩은 쇠고기에 대한 분노는 퍼져나갔다. 결국 아무도 수저를 들지 않았다. 학생부에서 협박조로 재촉하자 교내 엘리트들과 선도들은 먹기 시작했으나 나머지는 먹지 않고 밤샘학습으로 들어갔다. 결국 먹지 않았던 사람들 중 일부가 주모자가 되어서 중형을 받고 사건은 종결되는 듯 보였다.


(다음호에 계속)

[표절만땅]
Posted by 오승희



3cf(3ryu cartoon family : 3류만화패밀리), 그리고 “보노”, “촌갱”…. 그런 이름들이 있었다. 그게 뭔지 모르는 사람들도, 아마도 인터넷에서 “촌갱”이 그린 「생존류 호신술」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피떡이 되도록, 체벌하는 교사들에게 "거절권"을 구사하던 그 만화. 아니면, 은근 유명해진 『학교대사전』의 삽화를 3cf의 “보노”가 그렸다고 하면 모르던 분들도 좀 다시 봐주시려나?

  3류만화패밀리. 거기엔 삼류스러운 허무개그 만화들도 있었고 독기 어린 만화들도 있었다. 참 개발새발 삼류스러웠지만 재미는 있었다. 

  학교와 사회의 부조리, 폭력, 비리…. 그것에 적극적으로 순응하거나 희생당하는 사람들…. 팽배하는 교육에 대한 불신…. 심심찮게 보이는 사회에 대한 개김성/풍자성 내용들은 참으로 가차없고, 때로는 절망적인 감정을 담고 있었지만, 여하간 웃기긴 했다.

  3류만화패밀리의 몇몇 만화들은 분명 1990년대후반과 2000년대라는, 격동의 시대가 낳은 아이들이었다. 뭐, 출생신고는 안 되어 있지만.

  여기 첫 부분을 실어둔 「급식해저드」를 비롯해서 추천작으로 「개혁가의 죽음」, 「아침조회학교」, 「쇼생크 탈출」, 「생존류 호신술」, 「Devil Qoo」 등등을 볼 것을 추천한다. 3류만화패밀리에 있었던 작품들 중에서도 일부는 작도닷넷(xacdo.net/3cf)에 남아있다.


[익명]

 

Posted by 오승희




(위그림) 경쟁적 교육은 다양성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획일적 가치를 기준으로 “더한놈”과 “덜한놈”을 찍어내고 고르고 버릴 뿐이다. 다양성을 보장하는 것은, 오직 여러 다른 것들을 서열화하지 않고 ‘평등’하게 대할 때만 가능하다.
  획일화와 경쟁의 입시교육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한, 우리의 현실은 공장에서 만들어내는 기계일 뿐.
(그림은 월간<사람>11월호에서.)


(아래그림) 이번에 당선된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이명박 씨. 그러나 이명박 씨의 “경쟁해서 살아남은 것들만 성공하세요.” 교육정책을 보고 있자니, 싱하형을 부르고픈 유혹이 치솟는다.
  쳇바퀴 속에서 뛰게 하던 획일화와 경쟁교육이, 이제 최신식 런닝머신 위에서 이루어지겠지. 바뀐 건 별로 없다. 더 열심히 뛰어야 하고, 기계의 속도를 못 쫓아가면 더 쉽게 낙오될 거란 것만 빼고는.
(그림은 http://rokcha.tistory.com 에서.)

Posted by 오승희


2007년 11월 15일 수능날, 수능을 거부한 한 수험생이 교육부 앞에서 1인시위를 하고 있다♥



  학교라는 곳은 정말로 자신이 배우고 싶은 것들을 배워야 한다. 학생 개인의 적성에 맞는 교육을 해야 할 것이다. 학생은 절대로 공부하는 기계가 아니다. 학교가 ‘입시지옥’이라고 불려서는 안 된다. 또한 학생들이 시험, 점수 등 때문에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길을 택하게 해선 안 된다.

  지금의 입시제도는 중산층과 같은 돈이 많은 집들을 위한 것이다. 특목고나 외고와 같은 가진자들을 위한 학교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사교육은 이미 공교육을 뛰어넘었고, 학교를 다니는 이유는 졸업장을 얻기 위한 것뿐으로 전락해 버렸다. 

  강남에서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은 한 과목에 수 백만원씩 하는 과외를 하는가하면 집안형편이 안 되는 학생은 과외는 물론이고 학원도 다니지 못한다. 얼마 전 전기세를 내지 못해서 촛불을 키고 공부를 하다가 불이 나서 죽는 사건도 있었다.

  이런 점들을 볼 때 빈부격차가 교육에서도 엄청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문제점을 해결하기위해서는 무상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모든 학생들이 비슷한 조건에서 교육받을 권리를 줘야할 것이다. 돈이 없다고 공부를 못하는 상황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또한 입시제도는 본고사, 내신, 논술 등 청소년들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고 있다. 새벽 일찍 일어나서 학교를 가고 야간자율학습, 학원을 끝마치고 늦은 밤에 귀가한다. 청소년들의 삶이 좋은 점수, 좋은 대학을 위한 삶이 되어 버렸다. 

  지금의 제도는 학생들이 SKY (Seoul대학교, Korea대학교, Yeonsei대학교)대학만을 추구하게 만들고 있다. 대학들의 서열은 정해져버렸고, In Seoul만을 추구하고 있다.

  학생들은 유명한 몇 대학을 가기 위해 친구들과의 눈에 보이지 않는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다. 

  대학의 서열화는 없어져야 한다. 대학의 평준화는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좋은 대학만을 추구하는 학벌중심주의도 사라져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이 복합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루터기]
Posted by 오승희





2007년 5월 10일. 옥동중 학생들의 학내시위 모습♥

그리고 시위 당시 학생들이 학교 안에 붙인 스티커♥



(* 이 글은 2007년 5월에 학교 안에서 인권보장을 주장하며 시위를 했던 옥동중학교와 신정중학교의 학생들이 보내준 이야기입니다.)

신정즐: 안녕~! 오랜만이네. 망할 연합고사도 쳤으니 이젠 거의 파행수업이네-_-; 흠 이야기할 건 우리들의 ‘6개월간의 싸움’이었지 아마?

옥동자: 올만~ 응. 체벌금지, 두발자유, 조기등교 폐지, 휴대폰 압수 금지를 주장하면서 시위를 했었던 것 말이지.

신정즐: 너희 학교하곤 5분 거리고 규제수준도 거의 쌍둥이 같아서 너희 학굔 체육선생은 남학생 성기잡고 체벌도 했고, 우리도 단체기합은 기본이고, 휴대폰 원천금지나 상고스타일의 두발규제… 하나 다른 것은 우리학교는 전교생 조기등교가 있단 점이겠지; 우린 그 모든 것들을 반대하면서 시위를 했잖아.

옥동자: 그러니까 그 일이 일어나고 거기나 여기나, 시위 이후에 가담한 애들 불러서 본인, 부모한테 각서 쓰게 했잖아 협박하고.

신정즐: 말도 마. 우린 수업도 안하고 긴급전체소집이란 거해서 애들 매타작하고 외부단체 가입자들 엄벌하겠다고 협박도 했어 ㅎㅎ;

옥동자: 우리는 너희학교 눈치 보면서 조용히 조졌어 ㅋㅓㅋㅋㅓㅋ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카페에 강제로그인 해서, 모자이크 안 된 사진들 보고 찍힌 애들 다 불렀잖아.

신정즐: “이 일을 졸업 때까지 묻어가면 진학에 지장은 없을 것”이라고까지 하던데-_-; 우린 그 후에 학생회에서 서명운동했는데, 3시간만에 학생부에서 부르더니, 중단하라며 협박하더라고. 그래서 200명에서 멈췄어.

옥동자: 걔네야 원래 그렇다 해도. 우리는 9월에 체육교사를 한 여학생이 체벌로 교육청에 고발해서 장학사가 왔었는데 바뀐 게 없더라?

신정즐: ㅋㅋ 우리는 10월에 언론에 알리고 외부단체에서 성명서 내서 장학사 왔는데 별거 없더라. 진짠지 묻고만 가더래. 뭘 바라 ㅋㅋ

옥동자: 그래! 그 이후로도 많은 일이 일어난 것 같아. 너희학교에선 학생부장이 신발압수도 하고 가위로 강제이발도 했다며?

신정즐: 그 일로 우린 학생회장하고 어떤 애가 교장실에 찾아가 교장에게 직접 신발압수, 강제이발에 항의했는데, “겉만 번지르르한 것은 또라이”라면서 오히려 강제이발을 옹호하더란 거야.ㅋㅋ 성명서 이후엔, 그 두 학생 불러서 묻어가자 하고, 신발자유 해주겠다고 그걸 마음대로 평화적 타협안이라고 했대~ㅋㅋ 그리고 부모님 부르고, 학생회장한테 사과편지 강제로 쓰게 했잖아-_-

옥동자: 우리학교랑 너희학교에 전교조 샘들 많다는데 왜 안 도와줄까? 전교조 샘들은 좋은 샘들 아니었나?ㅋㅋ;;

신정즐: =_=휴… 우리학교에선 한 애가 전교조가 성명서에 있다고 전교조 교사한테 활동 그만두란 소리까지 했었대. 교장이 성명서에 전교조가 있다고 자기한테 선동했다고 욕했다나 뭐라나

옥동자: 허걱 정말로?! ㄱ-…그런데 학내시위로 우리가 얻은 것은 뭘까. 아직 국가인권위 진정도 진행 중이고 결국 규정은 내년에 바뀔 것 같고ㅜ 우리 시위에 문제라도 있었었을까?

신정즐: 일단 전교조 샘들이 귀찮아했던 것 같아. 그리고 방향에 대한 생각을 하긴 해. 서명운동을 시작하면서 대중적 움직임으로 갔어야 했는데, 역방향은 아니었냐는 생각도 들고…^^;

옥동자: 그렇구나. 근데 우리학교는 학생회장마저 머리는 단정해야 한다고 해!ㅜㅜ

신정즐: -_-; 하지만 무언가 바뀔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는 계기였기도 한 것 같아. 이런 시위가 울산에서 처음으로 일어났잖아. 사실 대부분 학생들에겐 학내시위 자체가 몽상이잖아?

옥동자: 그래, 누구나 한 번씩은 꿔보는 꿈이잖아. 우리도 그랬었고. 다함께 꿈을 꾼다는 것. 다만 우리는 꾸지만 않았을 뿐이지.

신정즐: 자유를 얻는 것도 중요했지만 그것만큼 중요한 게 우리들의 변화가 아니었나 싶어. 시위 이후로. 단적으로 평소에 장애인 주차장과 엘리베이터를 선생님들만 이용했는데 따갑게 보는 애들도 생기고, 민감해졌단 생각이 들어. 두발자유 같이 보이는 변화는 없더라도, 학교를 다니던 ‘우리’들이 바뀐 것 같아. 그냥 맞던 너희 학교도 교육청에 알리고, 체벌동영상 찍어서 유포하고 하잖아?ㅋ 되는 데까지 교장하고  싸워야지~! ㅋㅋ

옥동자: 맞아!ㅋㅋ 우리는 어떻게 보면 조금 먼저, ‘불가능한 것’들을 요구한 것 같아. 하지만 후회하지 않아. 처음으로 학교는 우리의 것이었어. 함께 소리 질렀고, 우리들은 모두 누구보다 행복하게 웃고 있었어. 그 기억을 잊지 않고 살아갈 거야. 왜냐면, 우린 몽상가니까 ㅎㅎ


[신정즐, 옥동자]
Posted by 오승희



▲ 효정고 중앙현관의 안내문 



  효정고 교감선생님 안녕하세요. 전 작년에 졸업한 덕기라고 합니다. 얼마 전에도 효정고에서 교사가 학생 머리에 금이 가게 한 체벌사건의 대책위 일로 뵈었으니 절 따로 기억해내실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근데 졸업 후 첫 만남이었지만 씁쓸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제가 청소년인권단체에서 검찰에 첫 고발한 교사가 모교교사고, 교감/교장선생님은 그런 체벌들을 묵인, 방조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실 학창시절 때 교사들에게 착하단 소릴 많이 들었습니다. 3분 지각해 운동장을 수십 바퀴 돌라면 돌았고, 주말에 ‘블랙리스트’들을 체육관에 소집해 오리걸음을 시키고 매타작하는 대로 맞았던 기억이 납니다. 반듯하게 머리를 자르던 건 말할 것도 없고 벨트를 매지 않아서 친구의 벨트를 빌려 착하게 재검사까지 맡았던 기억은 압권입니다.


  그러다가 효정고를 다니던 고3인 작년 여름, 청소년인권운동을 아수나로란 단체에서 시작했습니다. 비록 규모는 작을지라도 마음을 함께하는 친구들과 모임을 만들어 활동한다는 자체가 행복했습니다. 첫 활동으로 8월 20일에 울산교육청앞 1인시위를 계획했고, 동료들과 성남동에서 함께 가기로 했는데 돈이 없어 달랑 3천원을 주머니에 넣고 교육청으로 향했습니다. 사실 교육청이 그렇게 외진 데 있는지도 몰랐고, 그냥 대충 갈 생각으로 지금 생각해보면 무작정 길을 나섰던 것 같습니다.


  ‘학교는 학생인권의 도살장인가’와 ‘교육청은 학생인권 시책 수립하라’란, 전날 4시간 동안 밥도 안 먹으며 기쁘게 만든 피켓을 들고 교육청을 향했고 가던 중 정말 우연히도 만난 사람이 지금 미술선생님이었습니다. 미안해서 못 받겠다했지만 끝까지 2만원을 손에 쥐어주셨습니다, 덕분에 걸어선 30분이상 족히 걸리는 교육청을 땡볕에서 땀 흘리며 가지 않고 택시를 타고 가도 됐고, 음료수 페트병 두 병까지 사들고 갈 수 있었습니다.


  교육청에선 이례적인(거의 처음인) 일인지라 경찰에 정보과 형사도 오고, 학교 올 때마다 학생들을 청소기계로 작동하게 하던, 장학사가 다섯은 넘게 나와 의견을 들어주겠단 모습은 청취보단 협박에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어디서 나온 자신감이었는지, 언론과 장학사한테 실명을 공개했습니다.


  그때가 살면서 처음으로 나에게 입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나 자신이 스스로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구나.” “장학사란 힘들게 우릴 청소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었구나.”를 느끼며 세상을 새롭게 본 계기였습니다.


  교감(교장)선생님이야 학생들이 중앙현관을 ‘감히’ 다니는 것도 싫으셨을 테고 장학사 오는 날은 청소지도까지 각반으로 하달하시니 별로 이해는 안 가시겠죠. 근데 말입니다. 학생은 청소할 때만 주인이라 불리라고 만들어진 존재가 아님을 아시면 좋겠습니다.


  시위 끝내고 집에 가는 중 학생부장에게서 “교감선생님 화났다.”식의 전화가 오더니 역시나, 다음날 학교로 가니 바로 다단계형식으로 1차로 담임이 “어른이 되보면 그게 아니더라.”식의 이야기를 하고 다음으로 학생부장에게 불려가 “정말 그만둘 생각 없냐.”며 아수나로가 어떤 단체인지 설명하라 했고, 마지막으로 지금도 남아있는 교감선생님과 대면한 기억이 납니다. 미성숙하다느니, 시기상조라느니 같은 지루한 말을 늘어놓으셨죠.

  “미성숙의 기준을 제시하라, 신체의 성숙도가 정신적 성숙까지 판가름하나.” “시기상조가 아닌 사고나 행동으로 새로운 역사가 개척된 일이 있었나.” 

  그 나이 때는 약간은 거창해 보이는 답변을 하니까, 종용이 안 될 것 같으셨는지 자신도 후에 교장이 되면 학생들을 위한 민주적 토론회도 열고 싶다는, 그래서 결국은 안하면 좋겠다는 말이었는데 수업도 못 듣게 하면서 2시간을 끌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교육청의 지시였는진 모르겠습니다만 “시위를 하려면 선동하지 말고 혼자 하라.”고 강조하셨는데 그때 같이 시위를 했던 친구들이 신정중과 옥동중에 다니던 친구들이었고 저번 5월 신정중 옥동중 학내시위를 있게 한 친구들이란 걸 생각하면 안 들은 게 천만다행이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교육부/교육청이 두발자유, 체벌금지를 안 시키니 도리가 없다며 교육구조를 탓하시던데, 교육부->교육청->학교->교육부로 이어지는 책임 떠넘기기 도식은 10년 정도는 유통기한이 지나서 이젠 식상하니 다음엔 써먹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효정고에 다닌다는 것이 행복했고 자랑스러웠습니다. 학생의 날엔 등굣길에 해맑은 인사를 해주며 빵과 우유를 나눠주던 교사들 때문에 행복했고, 학생들의 눈물을 이해해주는 교사들이 있어서 자랑스러웠습니다. 보충수업 때 문제집 대신 불법(!)으로 5.18을, 인권을 말해주시는 선생님들이 있어 자랑스러웠고, 더운 날 시위한다며 2만원을 쥐어주시는 선생님이 있기에 행복했습니다. 강자엔 강했기 때문에, 교감(교장)선생님에겐 말 안 듣고 귀찮은(혹은 못된) 교사들이었기 때문에 학생들은 행복할 수 있었던 겁니다. 친구 중엔 미술선생님을 보고 ‘전교조를 하고 싶어서’ 교사가 되고 싶다는 친구가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 선생님들이 바로 전교조 선생님들입니다.


  그리고 그 미술선생님의 고발로 묻힐 뻔했던 이번 사건이 알려졌습니다. 학생이 머리가 길다고 때려서 머리에 금이 가게 한 것을 교감, 교장선생님이 은폐하려 했지만 가능합니까? 전에도 주먹으로 학생 머리에 상해를 입힌 그 ‘착한교사’가 1학년 학생부장으로 계속 있었는데 또 감추는 게 가능합니까?


  최근 대책위에서 면담을 갔을 때 작년 담임과 교감선생님을 봤습니다. 두 분께서 꺼낸 첫말이 “어느 학교 갔냐”였죠. 어떻게 사는지보단 학교를 물어보는 것이 교감선생님과 작년 담임의 의식수준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번 일에 저도 학교의 졸업생으로서 나부터 반성하고 책임을 느끼는 시간을 가집니다. 근본적으로 이 사건은 학교와 교육구조의 탓이겠지만, 제가 재학 중에 조금이라도 더 ‘착하게(고분고분하게)’ 살았던 결과 중 하나라고도 생각합니다. 조금이라도 더 학내 인권침해에 귀기울이지 못하고 행동하지 못한 탓이라고도 봅니다.


  “지금은 준비단계니까 열심히 시키는 대로만 해. 나중에 언젠가 꽃 피울 날이 있을 거야”란 식이지요.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하루하루 생활이 행복한 과정의 연속이어야 하고 또 그렇지 않은 것과의 싸움이어야 합니다.
  행복은 어떤 이유로든 유예되거나 희생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학생들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불온하게 저항, 불복종할 권리와 의무가 있고 교사와 학부모는 그것에 지지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잘 지내시고, 다음에 또 뵐 일이 있을 테니 그때 뵙도록 하겠습니다.


추신: 이 편지는 몇몇 언론에 기고합니다.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덕기]
Posted by 오승희

  아이들이 달려서 내옆을 스쳐간다 홀쭉한 가방들 빵빵한 가방들 제각기 흔들리며 학생들의 휜등을 리드미컬하게 탁탁탁 때려가며 재촉한다 돌기둥 녹슨철문 반듯한 교문 교문을 지키고선 대머리 교사가 늦겠다 뛰어라 연거푸 소리쳐도
  나는 태연하게 걷는다 교실에 도착하자마자 종이 운다 평소완달리운이좋네 감탄하건 말건
  걷고 싶으니까 걸었어 어쩌면 그건 주위 사람들이 뛰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여하간 난 걷고 싶어 특히 아침엔

  수업이 시작하면 우리는 끝날뿐 난 창가에서 찾는 것이 있을 따름 집중집중 선생마다 시간마다 한마디씩 난 창틀에서 찾는 것이 있어서 하나둘 시체를 헤아려 본다 딱딱딱 경쾌하게 분필이 칠판에 우는 게 거슬린다 여기봐요다죽었어 딱딱딱 몇 명이 졸고 있다 짝이 교과서에 낙서를 한다 앞자리는 필기한다 난
  무엇을 찾고 있니 그런 것도 모른 채. 여기봐요다죽었어 여기봐요다죽었어

  적자생존이라고자연도태는아니 청소년은 진화해왔다 사춘기는 도태되어 멸종돼왔다 아무도 보호지정 따위 해주지 않았다 희귀종이라 해도 모기를 보호지정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드물기 때문일지도 모기약이 치익 뿌려진다 시대가 변했다구 칙칙 침을 뱉는

  갱지에 비가 내린다 빨간 비 함박눈이 내리지 않는다 씁쓸해하지 마 나의
  은하수 밖에서도 별은 반짝인다 어라흘러내렸네
  배가 고파 저녁 식산 이미 끝이 났어 목이 말라 자판기에서 빼먹지 날 뱉어줘
  밥은 먹었으려나 아아 걱정할 필요 따위 없지 좋은 애니깐 나를 걷어차렴 사랑 사랑 달콤한 미사여구 따위 동원하기 싫어졌다 별은 때론 너무 빨리 흘러내리니까 나를 걷어차렴

  별이 흘러서 꽃이 시들었다 지는 꽃을 보고 우는 나이라지 하지만 구르는 낙엽을 보고 웃는 나이라고도 해 날씨만큼 변덕쟁이구나 구름이 꼈네 눈을 감아도 햇빛이 빨개 구름이 껴도 햇빛이 느껴져 머리가 아프게 더 따갑고 부셔
  목욕탕에서 온탕물이 열탕물보다 뜨거울 때처럼 기분이 나빠졌어 날 뱉어줘 찢어졌어 짜졌어 흘러내리고 있지 그냥 미련없이 날 뱉어줘 난 버렸어 진통을 버렸어 흰자위를 부릅뜬 아스피린이 위를 할퀴기 전에 아 토하고 싶어

  엉뚱한걸 난
  청소시간 우린 벌레시첼 치워내야 하는 걸까 거미집도 걷어내야 하는 걸까 생일날을 축하해야 하는 걸까
  그런 거 물어봐야 하니 꼭?
  그래 그러니까 난 열등한걸


[공현]
Posted by 오승희

무거운 하루


어둠은 이불에 덮여
별과 전봇대만이
눈을 뜨고 대화 할 때
책장을 넘기듯
하루가 펼쳐진다.

얼굴은 낙엽같이
어깨는 갈대같이
허수아비 모양으로
바늘구멍 같은 교문을 향해
무거운 발자국만 남기며
한 걸음 한 걸음 끌려 들어간다.

한 권의 교과서처럼 생긴
교실 안에는
새싹 하나 뿌리내리지 못하는
책상과 의자
흙 대신 먼지에 심겨서 살아간다.

다시 어둠의 이불이 덮이고
별과 가로등만이 대화할 때
책장은 다시 넘겨진다.


[나그네]
Posted by 오승희

  지부리에서 애니메이션화까지 된 바 있는 2차대전 배경의 반전소설 "반딧불의 묘".
  그 원작자 노사카 아키유키에 관한, 유명한 일화.
  노사카의 딸이 학교에서 국어수업을 하던 도중, 아버지의 그 작품에 대해 이야기가 나왔다.
  당시 선생님이
「이 작품을 집필했을 당시, 저자의 심경을 대답하라.」
라는 문제를 숙제로 내었는데, 딸은 집에 돌아가서 곧장 아버지에게 물었다.

「그 때 어떤 기분이었어요?」
「마감에 쫓겨 필사적이었다.」

  다음날, 학교에 가서 그대로 답한 딸은 오답판정을 받았다.
  
(출처 : 2ch)
Posted by 오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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