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설의 인권만화「꿈도 성적순으로 꾸는 건가요?」중에서…(국가인권위블로그 별별이야기 blog.naver.com/nhrck)


이 족쇄는 “스터디볼”이란 이름의 학습 보조기기이다. 9.5kg의 무게로, 발목에 한 번 채우면 4시간 동안 풀 수 없고, LED화면에 남은 ‘공부시간’을 표시하게 되어있다.

 

이걸 보고서 확실하게 절감한 것. 학생은 죄수다. 아님 최소한 죄수와 비슷한 지위다….

일제고사와 학교자율화 등의 여파로 초등학교부터 보충수업이 늘고 있다고 한다. 강제야자가 강화된 곳도 많다.

‘교육’이 우리를 감금하고 있다.

Posted by 오승희


이 글은 [불안정노동철폐연대]의 『질라라비』에 청소년인권활동가 따이루가 정기적으로 연재하는 글 중 두 번째 글(2009년 2월 제71호)을, 글쓴이의 허락을 구해 싣는 것입니다. ^^ 앞부분의 "두 번째 글" 어쩌구는 그런 성격의 글이라서 나오는 이야기이니 신경쓰지 마시길;; (편집진)



어느덧 시간이 흘러서 두 번째 글을 쓸 시간이 됐네염.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따이루는 글재주가 뛰어난 사람이 아닌지라 글을 쓸 때마다 항상 고민이 된답니다. 어떤 주제로 글을 어찌 써야 할까... 크.... 이번에도 막 고민을 했는데 따이루가 요즘 일제고사 때문에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청소년농성을 같이 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교육을 가지고 글을 쓰면 할 이야기가 많을 거 같아서 주제를 ‘교육'을 가지고 글을 쓰기로 했어염!

사실 ‘교육’이라는 주제 가지고 글을 쓰면 지금까지 써진 글도 많아서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 같은 뭔가 비슷하고 식상한 느낌이 있는 게 사실이잖아요. 지금 쓰고 있는 이 글도 노력은 하겠지만 신선할 거라고 장담은 못하구요. ㅋㅋ 하지만 ‘교육’이 사회와 개인에 미치는 엄청난 영향력을 생각해보면 너무너무 중요한 이야기인지라 뻔할 수도 있지만 이야기해야 뭔가 다른 이야기들도 쉽게 할 수 있을 거 같아염. 거기다 청소년인권을 고민하는 사람으로서 지금까지 안고 오던 고민들도 있고 요즘 교육문제를 가지고 농성을 하다 보니깐 교육에 대한 다양한 고민과 생각들이 마구마구 들어서 한번쯤 글을 쓰고 싶었어요. 하지만 글을 쓰자니 이거 만만치 않네요 ㅋㅋㅋ

 

뜬금없는 이야기 하나로 본격적으로 글을 시작해 볼까요? 왜 갑자기 뜬금없는 이야기로 시작하냐면요...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난감해서 그래요;; ㅋㅋ

‘학교 가기 싫다고 밍기적밍기적거리는 소년이 한 명 있었어요. 평소에는 촛불집회 간다, 기자회견 간다 하면서 학교땡땡이를 밥 먹듯이 하더니 이제는 아예 학교가 싫다고 늦잠 자면서 버티면서 학교를 안 갔어요.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은 결국 출석일수 부족으로 졸업을 하지 못하고 유급을 당하고 말았어요.’ 크... 너무 슬프지 않나요ㅠㅠ 그래요 이 이야기에서 나오는 밍기적밍기적거리다가 유급당하는 소년이 바로 따이루랍니다. 따이루가 이번에 학교 졸업을 해야 하는 학년인데 졸업을 못하고 유급당하고 말았어요. 주변 선생들은 모두 따이루가 게을러서 그렇다면서 쯧쯧 혀를 차는데 이거에 대해서 본인은 할 말이 많아요.

따이루가 출석일수가 부족할 만큼 학교를 안 간 건 물론 따이루가 시간약속을 잘 안 지키는 안 좋은 습관도 꽤 큰 영향을 줬지만! 그 습관이 고쳐지지 않도록 가로막고 있는 그 무엇이 있단 말이죠! 생각을 해보자구요. 대한민국처럼 학벌에 미쳐 돌아가는 학벌사회에서 초졸로 살아가는 게 얼마나 힘든지 따이루는 알고 있어요(다행힌지 아닌지 아직 절실히 느껴보지는 못했지만) 근데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우울한 내일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도 따이루의 약속시간 안 지키는 습관을 더욱 악화시키고 등교를 가로막은 원인이 있었다는 거지요!

 

원인이야 말하자면 매우 많지만 본인이 생각하는 등교를 가로막는 핵심적인 원인은 ‘막장교육’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솔직히 까놓고 말하면 지금 학교에서 하는 교육이라는 게 받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은 교육 같지도 않은 교육이라는 말이지요. 요즘 막장드라마, 막장연기를 능가하는 대책 없고 손발이 오그라드는 막장교육이랄까요? 남 탓이긴 한데 이유 없는 밀어붙이기 식의 남 탓이 아니에요. 생각해봐요, 관심도 없는 국어/수학 같은 이상한 과목들만 하루 종일 지루하게 나불나불거리고, 쉬고 싶을 때 쉬지도 못하고, 놀고 싶을 때 놀지도 못하고, 시험 때만 되면 애들끼리 서로 감시하고, 선생이라는 사람들은 공부공부거리면서 잔소리만 나불거리고, 쉬는 시간은 고작 10분이고 이것도 제대로 못 쉬게 잡일이나 시키고, 등교시간은 직장이 삐까치거나 직장인보다 빠르고... 이건 아무리 봐줄려고 해도 봐줄 수 없지 않나요-_- 거! 기! 다! 평소에도 안습인 학교가 시험기간만 되면 더더욱 캐안습! 그나마 평소에는 잔소리에 굴하지 않고 말뚝박기 하고 소리지르면서 학교를 점령하던 애들이 시험 볼 때쯤 되면 책상에만 달라붙어 앉아 좀비처럼 변해있고, 교사들은 ‘공부공부.’ ‘성적성적...’ 하면서 평소보다 잔소리를 몇 배로 쏟아내고, 거기다 시험 끝난 후에는 등수대로 앉히고, 점수 낮으면 틀린 개수대로 때리면서 등수/점수에 따라서 우수한 애들과 띨띨한 애들로 나눠지는/나눈단 말이지요. 못할 수도 있는 거고, 잘 할 수도 있는 건데 이런 당연한 차이를 이유로 무시하고, 무시당하고, 소외시키고, 소외당하는 매우 우울한 분위기가 만들어져요. 학교가 교육을 위한 공간인데 교육이 이따구인데 학교 갈 맛이 나겠어요? 따이루의 유급은 이딴 교육과 학교현실에서 쫌 즐겁게! 제대로! 인생을 살고픈 몸부림이었다구!

근데 참 독한 거 같아여. 일년에 시험 때문에 몇 백 명의 학생들이 자살을 할 정도로 학생들이 무지무지 싫어하고 증오하는 캐우울한 시험을 왜 이리 많이 보는 걸까여? 학생들이 너무너무 좋아해서 보는 건 절대절대 아닌데 말이지요. 그래서 개이버에 쫌 검색을 해봤더니 교육과학기술부님들과 교육청님들이 외치는 공통 멘트가 있떠군. "교육적 효과가 기대된다" 교육적 효과? 교육적 효과라는 게 상당히 다양한 개념들을 묶는 애매한 표현인 거 같은데. 시험이 주는 교육적 효과라는 건 도대체 무엇이길래 사람들을 죽어나도록 하는 건지 따이루는 골똘히 고민 해 봤다구. 근데 현재 시험제도가 주는 교육적 효과라는 게 ‘경쟁’을 통해서 모두들 입시공부를 할 수밖에 없도록 채찍질하는 효과밖에 없는 거 같아. 경쟁의 채찍질을 교육관료님들이 교육적 효과라는 건지. 잠 못 자고, 못 놀고, 목표도 이유도 제대로 없이 공부만 죽어라 하는 폐인의 삶을 만들어내는 효과인 건지. 원래 시험을 보는 이유가 자기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측정해보는 거가 이유라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측정한 다음에 점수/등수 같은 결과를 가지고 줄 세우고 비교하면서 내가 앞서야 한다는 경쟁심리를 부추기기 위한 게 주 이유인 거 같다는 거지요. 생각하다 보니 쫌 블랙코미디 같은 게, 시험이 교육의 전부라는 생각이 들어요. 학교에서 수업을 하는 이유는? 시험에서 높은 성적 받으려고. 공부를 하는 이유는? 시험에서 높은 성적 받아서 좋은 학교/직장 갈려고. 정말 ‘모든 대한민국의 교육은 시험으로 통한다’고 표현해야 할 거 같지 않아요? 거의 대한민국 교육제도에서 시험을 빼면 아무것도 안 남는 수준인 거 같아요.

 

이런 식으로 시험에 의한, 시험을 위한, 시험의 교육이 되면 참 피곤해진단 말이지. 시험 보고 시험결과 점수 가지고 등수 매기고 차별하고, 무시하고 이러면 당연히 경쟁이 생길 수밖에 없잖아요? 근데 이 경쟁이라는 게 그냥 경쟁도 아니고 살기 위해서는 0.1%의 특권층을 제외하고 무조건 달려야 하는 생존경쟁이라는 거지요. 좋은 고등학교 가야 좋은 대학교 가고 좋은 대학 들어가야 좋은 직장 구하는 이어달리기랄까나. 처음 시작할 때 잘 시작해야 1등할 수 있는 이어달리기 식의 경쟁이에요. 차라리 이어달리기 할 때는 모두 똑같은 위치에서 출발하기라도 하지 대한민국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돈지랄해서 성적 높일 수 있는 사람이 이미 정해져 있으니... 이거 참. 그럼 잘 살지는 못하더라도 어떻게든 살아보려 해도 직장이 있어야 하는데 정규직은 당연히 명문대 엘리트가 접수하고 나머지 비정규직도 4년제 대학 안 나왔음 대책 없는 상황이라, 살려면 다른 사람보다 높은 점수/등수를 얻기 위해 발버둥 쳐서 4년제 대학은 필수로 들어가야만 하는 참 안습적인 상황에 막장무한경쟁에 참여할 수밖에 없겠지요. 근데 더 우울한 건 현재의 안습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명박이 은 일제고사/3불폐지/엘리트고교300프로젝트 같이 경쟁+경쟁으로 지금보다 더 강한 무한경쟁으로 학생과 학교의 실력을 키우겠다고 거침없이 질주하는 상황이라는 거지요. 그 거침없는 질주 덕에 학생들을 야자에 0교시에 학원에 과외에 쉬지도 못하고 죽어나고 있구요. 근데 명박이는 모르나봐요. 유엔 아동권리위원회가 '한국의 매우 경쟁적인 교육시스템이 학생들의 발달권을 침해하고 있다'면서 고치라고 2003년 때부터 말했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명박이 은 경쟁이 부족하다고 부르짖는데... 명박이가 원하는 경쟁수준은 도대체 얼마나 되는 건지 상상이 안 되네요.

꼬리에 꼬리를 무는 궁금증!! ‘왜 이런 걸 교육이라고 하는 걸까?’ 궁금하지 않나요? 저는 매우 궁금해요. 아무리 양심이 없더라도 한 해에 몇 백 명의 사람들이 막장교육 때문에 죽어나는 상황인데 왜 이런 교육 정책을 바꾸지는 않고 오히려 더 강화시키면서 더더욱 막장의 길로 거침없이 달려 갈려고 몸부림 치는 걸까요? 보수언론에서 좌파정권이라고 까던 김대중/노무현 때도 경쟁이 줄기는커녕 경쟁을 늘렸잖아요. 난 이 막장경쟁교육 뒤에 숨겨진 음모가 있다고 생각해요.

따이루가 생각한 음모는, 지금의 교육이 죽어나는 사람들보다 더 사회적으로 힘있는 누군가들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에 추진되는 거라는 거죠. 쉽게 말해서 사회에서 권력/빽/돈 좀 있는 기득권층님들의 이익을 위해 나머지 찌그러기님들이 죽어나고 있다 이거지요. 전반적인 이 사회 시스템이 노동자/서민/여성/청소년/장애인 같은 사회적으로 차별받고, 억압받는 그런 약자들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돈 좀 있고, 힘 좀 있는 저분들을 위해서 있는 게 대한민국 사회인데 이 사회의 모습이 들통나지 않도록 파헤쳐 볼 여유를 주지 않는 거죠. 경쟁교육이라는 쳇바퀴에서 앞만 보고 미친 듯이 뛰느라 힘들지만 자신을 뛰게 만드는 쳇바퀴를 보지 못하고 쳇바퀴가 도는 대로 따라 뛰도록 만든 거죠. 초등학교6년/중학교3년/고등학교3년 총12년 동안 말이지요. 그렇게 12년 동안 익숙해진 쳇바퀴는 이제 자연스러운 생활이 되고 무감각해지면서 발견하지 못하게 되고, 발견했다 치더라도 그냥 이렇게 살도록 만드는 거지. 이게 바로 명박이가 이 막장교육의 끈을 못 놓고 더 강하게 잡아당기는 이유 아니겠어? 명박이처럼 대놓고 부자정책을 펼치는 상황에서 이 사람들이 떼쓰지 못하도록 원천봉쇄 하는 거지요. 그래서 경쟁을 더더욱 강화시키고, 늘리는 거지요.

 

우리가 언제까지 이딴 막장교육에 미쳐 살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언제까지 명박이의 능멸에 놀아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근데 아까도 말했지만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시키기 위해 이 사회의 주인으로 올라가 있는 기득권층님들이 쉽게 바꾸지는 않을 거예요. 사실 교육을 바꾸겠다는 건 자폭하겠다는 뜻이니깐요. 그분들이 바꿔줄 일은 거의 전무하고 비기득권 층들이 바꿔내야지요. 교육의 주체라고 불리는 학생/교사/학부모가 제대로 된 교육, 막장 아닌 교육을 외치면서 바꿔내야 하겠지요. 파업도 하고, 항의방문도 하고, 시위도 하고 하면서 말이지요. 근데! 위에서도 말했지만 교육이라는 것은 사회에도 엄청난 영향을 준단 말이지요. 즉 이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서민/노동자 모두가 교육문제의 당사자라는 거죠. 근데 따이루는 가장 규모 있는 노동운동단체인 민주노총에서 지금까지 교육문제 가지고 총파업을 결의하는 걸 본 적이 없어요. 그만큼 노동과 교육을 분리시키고 자신들의 절박한 문제로 여기지 않고 있다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혁명을 일으키고, 노동자의 권리가 지켜지는 사회를 만들더라도 교육이 이따구라면 그 혁명은 오래 갈 수 없고, 경쟁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사회 속에서 노동자의 권리는 절대 지켜질 수 없다고 생각해요. 사실 교사도 학부모들도 대부분 노동자인 건데 교사와 학부모를 중심축으로 하든 어찌하든 이 사회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 모든 노동자들이 교육을 바꾸는 데 나서길 바래요. 쉽게 말해서 민주노총이 교육개혁을 외치면서 총파업을 하라는 거지요.

 

물론 노동자들의 저항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절박하고, 중요한 저항이 그 교육을 받고 있는 학생들이라고 생각해요. 짱돌과 화염병을 들고 나오든 피켓을 들고 나오든 뭘 하든지 구석에 짱박혀 '피할 수 없음 즐겨라', 이러면서 공부나 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가 원하는 공부/교육/학교를 만들기 위해 피하지 말고 싸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인생을 담보로 싸우는 거라 쉽지 않은 싸움일 거라 생각해요. 그렇지만 그렇게 이유도 목표도 없이 시키는 대로 노예처럼 공부만 하다가 직장에 들어가도 스스로의 삶은 절대 행복하지 않을 거라 생각해. 나중에 프랑스처럼 노동자와 학생들이 함께 파업투쟁을 하는 모습을 보고 싶군요. 일제고사에 반대하는 청소년들의 등교거부/체험학습에 맞춰서 노동자들도 항의하는 액션 ㄱㄱ싱? ㅋㅋ 따이루가 아침 일찍 일어나서 설레이는 마음으로 등교할 수 있는, 막장스럽지 않은 학교/교육을 기대하면서 이번 글은 이렇게 허접하게 끝!

[ 따이루 ]

Posted by 오승희

지금 이 글을 읽고자 하는 분께 묻고자 한다. 한국에서 상상력을 발휘하는 작품이많이 나오지 못하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환경이 자라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학습지 회사가 항상 광고에서 말하는 것처럼 어렸을 때 '창의력 학습'을 받지 못해서 인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를 댈 수 있겠지만, 나는 ‘청소년 보호법’이 가장 문제가 많은 요소라고 대고 싶다.

솔직히 아무런 생각 없이 보면 ‘청소년 보호법’은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스스로 행동을 결정할 능력이 없는’ 아이들을 위하여 어른들이 ‘친히’ 법을 만들어서 ‘나쁜 길’로 가지 못하도록 지켜주는 법이 뭐가 문제가 있을까. (이미 많은 독자 분들은 깨달으셨겠지만) 앞 문장의 작은 따옴표 속에 있는 말이 다 맞는다면 말이다. 과연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또는 그 정도의 나이가 되는) 청소년들은 스스로 옳고 그름을 결정하지 못할 정도의 정신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물론 사회적 경험이 어른들에 비하면 많지 않은 편이기는 하다. 하지만 경험은 체험하고 느낌으로서 쌓아나가는 것, 적어도 옳고 그름과 자신에게 유리한 것을 고를 능력은 지니고 있다. 과학 시간에 배우지 않았는가. 사람의 뇌는 14~15살 정도가 되면 대부분 완성된다고. 결국, ‘청소년 보호법’은 청소년의 지적 능력을 무시하는 차별적 의도가 충만한 법이다.

그런데 ‘청소년 보호법’이 청소년의 능력을 무시한 것에서 끝나는가. ‘청소년 보호법’은 한 단계 더 나아가서 90년대 중후반의 자생적으로 번성해나가던 문화를 죽이는데 아주 큰 일조를 하였다. 우리가 가끔씩 책이나 음반에서 볼 수있는 크고 시뻘건색의 ‘19세 미만 구입 금지’ 딱지는 ‘청소년 보호법’의 산물이다. 이렇게 크고 아름다운 딱지를 붙인 이유는 매우 단순했다. 너무도 폭력적이서, 선정적이어서 ‘너무도 순수하고 때가 묻지 않은’ 청소년들이 보고 듣기에 문제가 많다는 이유였다. 이쯤에서 푸른 기와집에 사는 ‘어떤 분’이 좋아하는 선진국의 얘기를 하고자 한다. 선진국에서는 ‘순수하고 때 묻지 않은’ 청소년들을 보호하지 않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마약이나 범죄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 청소년들의 권리가 한국 아저씨들에게는 무척이나 유해해 보이는 매체에도 적용된다.

물론 그냥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일본에서는 성인용 도서나 음반을 팔 때 작게 나마라도 성인용 도서라는 표시를 해야하며, 미국에서는 음반에 ‘부모 권고 하에 청취 가능’ (Parental Advisory) 표시를 하고 청소년 시간대에는 방송이 불가능하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한국처럼 정부에서 칼을 들고서 이 모든 것을 행하지 않으며 설령 성인용 매체에 대해서 ‘유해 매체물’ 판정을 내려도 판매를 막거나, 구속시키지는 않는다. 즉, 민간단체의 권고 판정 수준이며 성인용 상품을 구입함으로서 생기는 책임은 전적으로 판매점과 청소년들에게 맡겨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은 어떠한가. 한국은 정부 산하의 기관에서 모든 매체의 심의가 이루어진다. 문제는, 심의위원들의 생각이 참 독특하시다는 것이 문제이다. 원래 심의가 개인적인 판단이 좌우한다지만 비슷한 분위기의 가사라도 심의위원들이 ‘꼴리는대로’ 판단이 이루어진다. 게다가 일반 문학보다는 로맨스, 라이트 소설(일반 소설보다 문체가 약간 가볍거나 일러스트 같은 문학 외의 표현을 강조한 소설)이나 만화 쪽에 더 많은 핸디캡이 부여된다. 같은 수위의 묘사라도 문학이라면 슬렁슬렁 넘어가지만, 로맨스, 라이트 소설이나 만화라면 가차 없이 ‘19세 미만 금지’ 딱지가 붙게 된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 영화로 개봉해서 약간의 인기를 끌었던 독일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열린책들)에서는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죽이고 나서 옷을 모조리 벗기는 장면, 그리고 마지막에는 주인공이 처참하게 거리의 부랑자들에게 토막난 뒤 먹히는 장면이 세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 작품은 초판 출간이 91년으로 오래 전에 나왔지만, 한 번도 국가 심의 기관에서는 이 소설의 수위를 문제삼은 적이 없다. 반면에, 일본의 유명 라이트 소설 작가 오츠이치의 ‘GOTH’(학산문화사)는 작중에 등장하는 ‘리스트컷 살인마’(사람을 죽인 뒤에 손목을 잘라 가져간다.)가 포악하다는 이유로 출간 3개월 만에 ‘유해 매체물’로 지정되었다. - 도대체 두 작품의 차이는 무엇인가? 단지 문학과 라이트 소설이라는 차이?

이런 심의가 일상화 되어있는 곳에서 상상력을 발휘하는 작품이나, 상상력이 자극받는 환경을 만드는 것은 무척이나 힘들다. 거기에다가 문화의 주 소비층이자 제작층이 될 청소년들은 정작 자신들의 생각을 가로막는 ‘청소년 보호법’에다가 각종 학생 인권 차별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문화 발전을 논한다는 것이 과연 쉬울까. 10년 동안 건재한 청소년 보호법에, 이제 출범한 지 1년하고 몇 개월이 지난 정부가 각종 삽질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상상력 넘치는 미래는 점점 빛이 바래간다.

 

[ Skyjet ]

 

Posted by 오승희

[말하고 싶은 개념, 전달하고 싶은 개념, 탑재시켜주고 싶은 개념이 있다면 여기에. 특정 개념의 탑재를 거부한다는 개념을 탑재시켜주고 싶을 때도 여기에. 주장과 개념이 만나는 그곳.]


<페미니즘인(in)걸?>

야오이, 그 곳에서 소녀 그리고 여성들이 만나야했던 이유

※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여성주의팀에서

여성주의와 청소년인권의 만남을 고민하는 글을 오승희 <인권오름> 등에 연재합니다.


여성들의 포르노, 야오이

 

야오이는 여성들의 포르노라는 말이 있다. 모든 야오이가 포르노는 아니지만, 상당수가 그런 성격이 강한 게 사실이니 맞는 말이다. 지금이야 ‘야한 것’을 약간 부담스러워 하는 정도지만 중고등학교 땐 거부감 수준으로 꽤 반감이 있었다. 덕택에 야동(야한 동영상)은 호기심에라도 한 번 본적이 없다. 그런데 그런 부류인 ‘야오이’에는 나는 유독 너그러웠다. 남자애둘이 손 붙잡고 뽀뽀하면서 ‘러브러브’ 모드를 펼치는 게 그렇게 훈훈하고 흐뭇할 수가 없었다. 섹스 수준의 야한 짓도 웬일인지 그냥 넘길 수 있었다. 어쨌거나 난 야오이 안에 있는 야한 것들엔 관대했다. 사실 난 야오이를 통해 욕구를 그 때 그 때 풀었기에 특별히 결핍이 없었던 걸 수도 있다는 생각을 최근 들어 했다. 그동안은 야오이와 성적욕구란 단어를 함께 놓을 생각조차 못했다. 내 안에 ‘성적 욕구’ 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조차 불편했던 탓이다. 남성들만 나오기에 ‘야해도 괜찮은 야오이‘가 아니었다면, 이런 내가 스스럼없이 성적인 욕구를 풀어낼 통로는 아예 없었을 것이다. 고집스레 자처한 성적인 무지에 갇혀 내 안에 있는 성적 욕구의 존재를 인정하고 나아가 긍정하게 될 기회였던 셈이다.

 

여자애가 야한 것을 알고

접한다는 것은 ‘죄‘다

 

어렸을 때부터 야한 건 더럽다고 생각했다. 딱히 사회가 원하는 ‘깨끗한 소녀’의 이미지를 의식했던 건 아니다. 깨끗한 소녀 따위 딱히 원한 적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더러운 년’이 될 수는 없었다. 더 나은 무언가가 되기 위해서도 아닌, ‘야한 것에 대해 무지한’ 정상과 ‘야한 것에 대해 박식한’ 비정상이라는 나뉨 속에서 정상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10대 여성의 성적 권리를 논하기도 전에 사회는 ‘애들은, 특히 여자애들은 성적인 것을 접해서는 안 된다’는 전제 위에서 모든 것을 시작하라 요구했다. 그 암담한 벽 앞에 10대 여성의 성적 욕구는 ‘자연스럽게’ 씹혀왔고, 성적 권리는 출발부터 가로막혀있었다. 혈기왕성한 사춘기 남자애란 말을 혈기왕성한 사춘기 여자애롤 바꾸었을 때, 분명 생소하게 또는 이상하게 들린다. 낯설고 이상스런 그 울림은, 성적 무지를 택하지 않는 10대 여성에게 ‘밝히는 여자애’ 의 딱지를 붙여왔던 사회적 폭력의 잔향이다.

여자애들은 순진하고 깨끗하다 또는 깨끗해야한다는 상식, 바꿔 말해 여자애들은 자신의 성적 욕구를 인정해서도 드러내서도 안 된다는 일방적인 강요이다. 이러한 폭력은 세간에서는 상식의 이름으로 통용된다. 여자애들이 남성들 간의 섹스를 표현한 야오이를 찾게 만든 상황은 ‘상식’의 뿌리 위에서 자랐다. 깊은 밤 케이블 TV에서 해주는 야한 영화를 처음 본 후 내가 느꼈던 감정은 스스로에 대한 역겨움과 죄책감이었다. 잠깐이라도 야한 것을 밝혔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해 짙은 자기혐오를 느꼈고, 뒤이어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를 죄책감이 찾아왔다. 웃기는 건, 같은 야한 영화라도 남성들이 주체인 영화를 보면 죄책감의 정도가 낮아졌다. 야오이 세계는 여성, 즉, 내가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성애관계를 재현하는 야오이

 

야오이 안에 여성이 없다고 단순하게 말한다면 이는 거짓이다. 야오이에는 공,수 개념이란 게 존재하고 이 둘의 결합은 남성 역할을 하는 남성(공)과 여성 역할을 하는 남성(수)의 결합이다. 외모도, 성격도, 관계 구도도 이성애 관계를 상당 부분 비슷하게 재현한다. 말하고 보는 이들이 대부분 여성이기에, 야오이 소설이나 만화의 시점은 ‘수’일 때가 많다. 이 점에선 보통의 연애소설과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10대 여성들이 읽는 이성 연애소설에는 섹스 장면이 거의 절대로 나오지 않는다. 반면 야오이의 경우 섹스장면의 존재는 횟수에만 차이가 있을 뿐 독자들에게나 작가에게나 당연시 된다. 여성들은 분명 수에게 감정이입을 하긴 하지만 이때의 감정이입은 동일시가 아니다. 수가 남성임을 인지한 부분적인 감정이입이다. 막을 하나 쳐둔 셈이기 때문이다. 야오이를 즐기는 여성들의 심리는 일정 거리를 둔 채 공간 바깥에서 관찰자처럼 연애를 지켜볼 수 있다. 나를 직접 대입하기 쉬운 여성과 남성의 섹스를 보는 것보다 훨씬 덜 불편하다. 성적인 것을 즐기고 있는 내 자신을 들키지 않아 자유로운 건지도.

또 야오이 속의 여성이란 유령 혹은 잘 나와 봤자 엑스트라일 때가 많다. 나온다 해도 비중이 낮을 때가 많다. 야오이를 즐기는 여성들이 자신을 이야기 외부에 둔다는 건, 이야기에 나오는 강간에 대한 반응으로만 봐도 알 수 있다. 10대 여성들이 주로 보는 이성 연애소설에서 강간은 흔히 쓰이는 소재가 아니다. 그에 비해 야오이에서는 강간이 이야기 장치로 자주 이용된다. 자주 나온다는 건 그만큼 무리 없이 받아들여진다는 뜻이고, 보는 여성들이 야오이에 나오는 강간에 대해서는 그만큼 무디다는 반증이 아닐까.

 

감시의 눈길을 피해 10대 여성들의 욕구를 간접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여성-자신’이 없는 공간을 통로인 야오이를 택한다. 야오이를 즐기는 것은 비단 10대 여성들 뿐만이 아니다. 왜 하필 여성들의 포르노가 남성으로 가득한 ‘야오이’가 됐을까? 남성의 성욕구만이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것’으로 인정되는, 욕구에 대한 인정조차 불평등한 사회에서, 야오이는 ‘여성의 욕구 드러내기’였던 동시에 또한 ‘자기 지우기’이다.

 

여성들의 체념과 자기 지우기

 

나는 ‘야오이’를 좋아한다는 말을 쉽사리 하지 못한다. 쓰레기라는 표현이 너무도 잘 어울리는 야오이가 못해도 야오이물의 70, 80%는 되는 실정이다 보니, ‘동인녀’임을 알았을 때 눈살을 찌푸리는 상대의 반응에도 짐짓 이해가 가는 것이다. 야오이를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야오이물이 갖고 있는 ‘쓰레기같은 점’까지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강간 같은 끔찍한 폭력을 가볍게 다루는 점, SM물 등 인간 본성에 대한 회의가 밀려오게끔 만드는 야오이 안의 이상한 장르들, 수가 공에게 삽입을 더 해달라는 몸짓을 하며 ‘앙앙’소리를 낸다거나 하는 식으로 남성들이 만들어낸 야동의 패턴을 똑같이 따라하고 있는 점 등 말이다.

 

그 외에도 야오이에 나오는 남성들은 지독할 정도로 마초적이다. 남자인물은 여성에 대한 음담패설을 하고, 여성을 성노리개쯤으로 여기는 듯한 언행을 구사한다. 분명 여성작가가 거의 대부분 일텐데 말이다. 물론 현실에 대한 반영이겠지만, 그렇더라도 똑같이 줄줄 읊어대야 하는거야? 열도 안 받나? 현실에 대한 체념은 쓰는 이들이나 읽는 이들이나 기본적으로 있다. 야오이 안 마초들을 자연스럽게 받아 넘기는 그 태도엔 ‘남자들이 짐승 수준으로 성 욕구로 충만하고, 거칠고, 여자 우습게 아는 건 원래 그런 거니까. 어쩔 수 없지.’라는, 말도 안 되는 포용이 이미 완료되어 있다. 분노조차 생략한 상태에서 야오이 속 남성들이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을 무감각하게 수용한다. 여성들이 야오이라는 공간으로 들어오며 ‘여성’의 존재를 지울 땐, ‘여성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의지 역시 함께 지운 것인가.

여성이 ‘남성’을 얘기한다는 것은 남녀 권력구도에 대한 전복이 되기도 했지만, 결국 ‘남성’의 이야기를 한다는 점에서 크나큰 한계이다. 야오이를 좋아하는 여성들이 곧잘 하는 장난 중에 망상놀이가 있다. 주변 남성들을 멋대로 이어 붙여 커플로 만들어버리는, 말 그대로 망상을 지멋대로 펼쳐놓는 놀이다. 학교 다닐 때 반 남자애들을 대상으로 나 역시 자주 했었다. 남성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내 맘대로 요리하는 경험은 위치전복의 쾌감을 준다. 여성들에겐 남성을 관람한다는 것 자체가 마녀의 기분 같은, 속 시원한 못된 짓이기도 하니 야오이는 그런 면에서 위치전복의 쾌감을 마음껏 제공하는 셈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야오이 속에 나오는 앙앙거리는 수 또한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시켰던 짓을 남성들에게도 똑같이 시켜 깔아뭉개기 위한 시도일 수 있다.

 

여성들이 자신을 지우지 않으며 얘기할 수 있는 날까지

 

하지만 그렇게 만든 남성은 결국 여성 자신의 모습이다. 공(남성)의 지배욕구와 쾌감을 충족시켜주는 수는 그냥 ‘남성’이 아닌 ‘기지배’ 같은 수이다. ‘기지배’ 같기에 그런 일도 할 수 있다. 공 같은 진짜 남성은 하지 않는다. 공이 수에게 가한 폭력은 공수구도에 배어 있는 ‘남성적’ ‘여성적’이라는 분리로 인해 결국 여성들 자신에게로 되돌아온다. 남성들의 억압은 야오이 공간에서조차 존재한다. 자신들의 성 욕구를 드러내기 위해서라는 긍정적인 목적으로 야오이를 찾았지만, 여성 스스로 재현한 남성의 언어와 방식은 결국은 ‘자학’ 과도 같은 야오이 세계 내부를 만들었다. 애시당초 여성의 입으로 자신들의 이야기가 아닌 남성들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에서부터 한계가 생긴 게 아닐까. 화자는 여성인데 남성을 매개로 이야기하고 남성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결국은 남성을 위한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은 아닌지.....

남성만 있는 세상-야오이를 만들 정도로 여성들이 지우고 싶어 했던 ‘여성’이란 뭘까. 아마도 지금 현실과 ‘부정 받고 억압받는 약자로서의 여성’을 지우고 싶어 했겠지. 소녀라는 굴레에 갇혀 어딘가 모르게 억눌리고 있었던 여성 청소년들이 남자애들의 이야기를 찾게 되었던 것도 마찬가지 맥락일 테고. 여성들이 자신을 지우지 않고 자기 이야기를 하며 자신의 욕구를 드러낼 수 있는 그 날까지, 결론은 하나다.(여러 개일 수도 있지만 일단 ㅋ)! 여성 청소년이여, 자신의 이야기를 할지어다. 에블바디 걸 페미니즘!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여성주의팀 엠건]

지금 이 글을 읽고자 하는 분께 묻고자 한다. 한국에서 상상력을 발휘하는 작품이많이 나오지 못하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환경이 자라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학습지 회사가 항상 광고에서 말하는 것처럼 어렸을 때 '창의력 학습'을 받지 못해서 인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를 댈 수 있겠지만, 나는 ‘청소년 보호법’이 가장 문제가 많은 요소라고 대고 싶다.

솔직히 아무런 생각 없이 보면 ‘청소년 보호법’은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스스로 행동을 결정할 능력이 없는’ 아이들을 위하여 어른들이 ‘친히’ 법을 만들어서 ‘나쁜 길’로 가지 못하도록 지켜주는 법이 뭐가 문제가 있을까. (이미 많은 독자 분들은 깨달으셨겠지만) 앞 문장의 작은 따옴표 속에 있는 말이 다 맞는다면 말이다. 과연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또는 그 정도의 나이가 되는) 청소년들은 스스로 옳고 그름을 결정하지 못할 정도의 정신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물론 사회적 경험이 어른들에 비하면 많지 않은 편이기는 하다. 하지만 경험은 체험하고 느낌으로서 쌓아나가는 것, 적어도 옳고 그름과 자신에게 유리한 것을 고

Posted by 오승희

[살면서 만난 ‘오답’들을 기록하는 곳. ‘오답’인 감상, 비평을 쓰는 곳입니다. 틀린 문제를 쓰고 풀이법을 쏼라쏼라 적는 그런 오답노트와는 차원이 다르죠 ㅋㅋ 장르를 가리지 않는 소개, 리뷰 코너입니다.]


『머리에 피도 안마른 것들

인권을 넘보다ㅋㅋ』 서평

(서평대회에서 수상한 서평 중 2개를 저자의 허락을 구해 싣습니다.)


처음일지도 모르는(처음일 것이다.), 청소년이 직접 쓴 청소년인권서가 나왔다. 책내용은 기존의 청소년인권서가 아닌(예를 들자면 인권은 교문앞에서 멈춘다 같은? 그런데 읽어보셔야 한다.) 매우 신선한 책이다.

내가 다니는 학교에서 이런일이 있었다.

1학년에서 돈을 도난을 당한 일이 있었단다. 학생부장이란 사람이 ‘심증은 가는데 물증이 없는’ 7명의 애들을 불러드려서, 자백을 할 때까지 체벌을 했단다. 매를 맞다못해 6명의 아이들은 “자기가 훔쳤다”라고 이야기를 했고. 진짜 훔친 게 아닌 한명은 진짜 훔치지 않았다고 주장했으나. 거짓말이라고 매질을 계속 학생부장이 했단다.

후에 그 친구가 진짜 훔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6명의 아이들은 징계를 받았는데. 그 학생부장은 자기가 잡았다라고 웃으며 동네방네 이야기 했다.

후에 청소년인권단체 아수나로 활동가와 전교조 활동가가 해명을 요구했을때, 학교의 질서를 위해 어쩔수 없었다, 라는 이야기를 들었다.(여기서 잠깐-_- 그 활동가들은 학생부장님께 되려욕먹었다고 한다.)

여기서 잠깐, 돈을 훔쳤든 안 훔쳤든 훔치지 않았다고 이야기해서 거짓말로 여기고 때리는 건 폭력이고 부당한 것이다. 그러나 때린 가해자는 자랑스러운 듯 이야기하고 맞은 학생들은 가만히 있어야 했고 또 욕까지 먹어야 하는 걸까.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환경이 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학교에서 무시당하는 우리의 인권에 대해 알아야한다. 여러 가지 인권서가 있지만, 우리의 눈에서 본 ‘머피인’은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가 가만히 보고 지냈던것에 대해 깨달아야 한다. ‘머리에 피도 안마른 것들 인권을 넘보다’라는 책이 아기가 새로운 세상에 나올 때, 도움을 주는 산파같은 존재라고 느낀다.

물론 학교에 있는 청소년 이야기만 담고 있지 않다, 기존에 있는 청소년인권에 관한책은 학교에 있는 청소년 집중으로 다뤄왔지만, 탈학교 청소년의 권리, 가출하고 싶은 ㅋㅋㅋ 청소년들에 대해도 폭~ 넓게 이야기 하더라고. 청소년에게는 꼭 읽어봐야할 필독서다. 어른들도 읽고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걸 알고 개념 좀 챙겼으면 좋겠다.

덧) 어쨌든, 어른들이 기분나빠 하더라. 진짜 누구는 머리의 피도 안마른 것들이.. 이러면서 혀를 끌끌 차던데. 흥, 머리에 피도 안마른 것들이 인권 넘봤다 어쩔래? 무섭니?(그런데 머리 피 마르면 죽는데 ㄷㄷㄷㅋㅋㅋ)

[ 굴러굴러 ]

 

 

인권침해를 받지만 몰랐던 권리들

(책 못지 않은 짜임새, 꼼꼼한 서평 상)

청소년인권. 솔직히 인권이라는 개념 자체를 교과서에서 나오는 그런 따분한 권리라고 생각했는데, 학교 다니면서 인권침해를 매일 매일 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 책을 읽고 나서야깨닫게 되었다. 청소년과 인간이 가져야할 당연한 권리, 지금의 청소년들은 인간이 가져야할 당연한 권리를 갖지도 못한 채 학교라는 감옥 안에서 입시경쟁이라는 인권침해를 매일같이 당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물론 학교 밖에서도 수없이 많은 것들로 우리를 규제하지만 이때까지 학교 안에서 내가 당했던 인권침해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이나 많았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면서 시험성적이 50점미만 틀린 문제 개수대로 허벅지를 때리셨던 선생님부터 시작하여, 선생님이 들어왔는데 자리에 앉아있지 않았다는 이유로 엉덩이를 때리고, 책과 학습지가 없다는 이유로 때리고 ‘때릴 이유’가 정말이지 많은 것 같다.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선생님이 때릴까? 잘못을 하면 맞아야 할까?’ 부터 시작해서 선생님과 갈등이 생기면 무조건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면 나중에 찾아오라는 식의 반응. 너무나 답답한 소통방식이 아닐 수 없다. 또 나도 모르게 친한 친구와 경쟁하게 된다는 것이 너무나 무섭다. 수행평가도 친구보다 더 잘 받기 위해서 노트도 안 빌려주고 혼자 공부하고 연습하는 것이 너무나 일상적이다.

 

문제적 인간 청소년?

 

그리고 공감이 간 말은 ‘청소년문제’이다. 항상 우리보고 문제라고 한다. “어른들은 뭐만하면 너희가 문제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라는 식으로 우릴 인간 대 인간으로 보지 않고 자신들보다 아래 경험이 적은 아직은 미성숙한 존재로 보고 있는 것 같다. 우리도 생각 할 줄 알고 표현 할 줄 아는데, 어른들은 그것이 한없이 반항하고 대드는 것으로 보이는 것 같다.

그리고 청소년이란 나이 때는 위험한 시기라며 사랑하는 감정조차 어른들에게 제제당하기 십상이다. 이제는 하다하다 감정마저 제제당하고, 모두가 대학가면 다할 수 있다고 한다. 지금은 누릴 수 없고 어째서 대학을 가야 누릴 수 있는 것일까. 정말 모순이다.

19살과 20살의 차이. 또한 선거권부터 시작해서 담배나 술 청소년출입금지 장소까지 19세 미만이라는 숫자하나로 전국에 있는 청소년들을 제지 시킬 수 있다. 언제까지 이런 어리석은 규제 따위에 청소년들을 억압할 것인지, 작년 촛불집회 때처럼 친구를 죽이기 싫다며 광우병보다 무서운 경쟁을 깨닫고 나올 날이 머지않은 것 같다.

정부는 청소년들을 무서워한다. 그래서 더욱더 규제하고 사회적 규범 속에 철저하게 갇혀 살아가게 하는 것 같다. 잔인하기만 하다. 더 이상 책속에 나온 말처럼 청소년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생각하지 말고 청소년들을 이 사회의 주체로서 존중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어른들이 만들어낸 여러 가지 규제들로 우리의 권리를 침해하고 금지하는 현실을 바꿔야 한다. 더 이상 청소년들과 주위의 친구들을 그냥 죽음으로 내몰 수는 없다.

 

“참자”는 아냐!

 

난 책을 읽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책은 읽는데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만큼 공감가고 한번이라도 겪어보았던, 아님 나에겐 겪게 될 이야기이기 때문에 더욱더 열심히 읽었던 것 같다. “이제는 대학갈 때까지만 참자.” 가 아니라 직접 바꿔야 할 때이다. 우리가 바꾸지 않으면 그 누군가도 바꾸어주지 않는다. 나처럼 선생님에게 체벌을 당했거나 친구에게 왠지 모를 경쟁심을 느꼈다거나 할 때 꼭 읽어보아야 할 것이다. 바뀌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그들이다.

[ 공기 ]

Posted by 오승희

[오승희를 읽으면서 든 생각과 느낌들을 싣는 코너. 이번 호에서는 오승희가 상을 받은 소식을 전하면서 후기로 때웁니다. ^^; 다음호엔 독자 분들이 투고 좀 해주세요~]


 

2009해피매거진 컨테스트 백절불굴상 -오답승리의희망

귀하는 빈약한 자본,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운 주장, 거침없는 발언을 멈추지 않으며 이 시대 진정한 청년정신을 보여준 공로가 크기에 이 상을 드립니다.

2009년 6월 4일. 희망제작소 NPO정보센터.

 

오승희가 상을 받았습니다. 희망제작소의 NPO정보센터에서 주는 상입니다. ‘해피매거진’ 컨테스트라는 걸 하길래 그냥 밑져야 본전, 아니 우편요금, 이라는 생각에 응모해봤는데 덜컥 돼버렸지 뭡니까.

 

<오답 승리의 희망>은 획일화된 정답만을 강요하는 사회에 맞서 청소년인권과 자유언론을 주장하는 단체의 비전제시는 물론, 네이밍, 디자인, 컨텐츠 구성까지 재기발랄함과 도발적 아이디어, 풍부한 감수성이 돋보인다는 공통된 평을 받았다.

☆ 청소년 직접 기획하고 간행했다는 데 큰 의의

☆ 교지발행 소모임에서 출발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아직까지 꿋꿋이 활동 이어오고 있음.

☆ 독립잡지스러운 분위기, 딱딱하고 심각한 컨텐츠들 웃으며 읽을 수 있음

☆ 읽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드는 코너구성

 

이렇다네요. 사실 11호 찍는 돈의 대부분도 이 상금에서 왔습니다. 완전 재정난이거든요. ㅠㅠ 오승희가 이제 만 3년을 넘기고 10호까지 낸 시점에서 이런 상을 받는 게, 오승희가 독자들에게 그래도 의미있는 매체일 수 있겠구나 하는 자신감 같은 걸 느끼게 합니다. 상을 주신 분들에게 새삼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오승희를 그래도 꾸준히 읽고 후원해주시는 모든 분들에게도.

 

시상식에 갔던 오승희 편집진들은 왠지 ‘박원순 씨 만세’ 같은 분위기랑, 뭔가 럭셔리한 느낌에 적응하지 못하고 저녁 뷔페도 못 먹고 나왔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단체 재정상황이 힘들어져서 이전 사무실보다 평수가 몇 평 작은 사무실(그것도 평창동. 땅값도 그리 싸지 않은 동네에, 건물 하나를 거의 통째로…)로 이사했다면서 후원해달라고 50만원 100만원짜리 경매를 하는데, 사무실 하나 없고 단칸방이라도 사무실 있으면 좋겠다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오승희로서는 영 적응이 안 될 수밖에 없더라구요. 역시 우린 가난뱅이들이라서 -_-

어찌 되었건, 아무리 가난하든 어떻든, ‘백절불굴’하겠습니다. 오답 승리의 그날까지.

Posted by 오승희


나는 핸드폰 없어

(원곡 : 심장이 없어)

나는 핸드폰 없어

나는 핸드폰 없어

내 폰은 교무실 서랍에 있어

휴대전화금지조례 이렇게 통과시킨대

학교에선 공부만 해야 된대

돌려달라 말하면 졸업 때 줄 것 같아서

왜 뺏냐고 말하면 벌점 줄 것만 같아서

그냥 냈지 그냥 냈지 그냥 냈지

공부시키려고 참 별짓을 다해

(이렇게 힘든데)

 

경상남도교육위원회, 서울시의회, 제주도의회 등에서 추진되고 있는 ‘휴대전화금지조례’(또는 ‘관리조례’). 면학분위기 조성을 위해 학교에서 학생들의 휴대전화 소지를 금지할 수 있게 한대; 경남에서 나온 조례안으로는 덤으로 MP3, PDA 같은 전자기기도 금지할 수 있다고 하네. 이런 것들이 뭔 흉기라도 되나. 학생들은 모두 죽어라 공부만 해야 한단 걸까? 학생인권은 ‘면학 분위기’ 앞에서 흔들리는 촛불, 깜빡거리는 배터리와 같구나.

Posted by 오승희

그냥 저냥, 살아가노라면



개강 맞이 술자리에서, 얼큰하게 취해 들어와 가만히 생각해본다. 학교에 적응하느라 어색하고 불편해하다가 금새 가버린 지난 1학기의 첫 대학생활. 그리고 나름 ‘경험’과 함께 아르바이트도 할 겸, 또 뿌듯함을 느끼겠다는 욕심으로 시작했던 멘토링. 물론 쉽게 얻지 못할 소중한 경험..이었지만 그보다도 먼저 다가오는 건 과연, 내가, ‘교사’가 될 수 있을까하는 불편한 고민이다.

고등학교 때, 아니 초등학교 때부터 12년(혹은 더?)의 빡빡한 교육과정을 견뎌오면서 항상 불만 투성이었다. 학교 자체에 대해서도, 못한다고 구박하던 담임에, 질투가 많았던 친구들에게, 좀 더 머리가 컸을 때는 교육제도에까지. 근데... 이번 방학 때. 학교에 가서, 멘토링하면서 ‘선생질’ 좀 한 거다.

다문화가정 멘토링의 경우에는 필리핀에서 한국 남성과 결혼하신 어머님과도 꽤 친해지고 애들과는 깊이 정들어서 교통편도 불편하고 한참을 걸어가야 했는데도 시간 날 때마다 가서 ‘공부 조금 놀기 많이’를 목표로.. 음식도 만들어먹고, 재밌는 놀이들도 하고, 나름의 문화생활을 위해 노트북에 영화를 담아가서 보기도 했었다. 그런데 문제는 부진아 멘토링이었다. 처음에 5학년 남학생 두 명을 가르칠 때는 그저, 가르치려는 맘만 앞서고 경험도 없고 여렸다고나 할까.

그리고 마지막 멘토링은, 힘들면서 또 지금까지 내가 꿈꿔왔던 이상과 아쉬움이 많이 충돌했다. 총 4학년 여학생 다섯 명을 가르쳤는데 한 명은 결석이 잦았고, 한 명은 초등학교 한글을 몰라서 사람들과도 말 한마디를 하지 않았고, 또 다른 한 명은 편부모 가정에서 자랐는데 주로 할머니에게서 자라다보니 오냐오냐 컸달까, 무슨 말만 하면 트집 잡고 고집이 세서 대하기 어려웠다. 나머지 둘은 극단적으로 달라서 한 명은 손버릇이 나쁘고 친구들을 괴롭혔었고... 다른 한 명은 너무 순해서 괴롭힘을 당하는, 늘 눈빛이 슬프고 자신감 없어하던.. 그런 다섯 명이었다. 처음에는 그 반 담임선생님께서 ‘(감당하기엔)체력이 안 되서 선생님께 맡겨요’라고 하시던 그 말이 뭔가 싶었지만, 정말 체력 이상의 많은 것을 필요로 했다.

학교라는 체제, 특히나 그 학교에서 마련한 공부방은 부진아 학생들에게 다가오는 10월 일제고사를 대비시키려고 만들어진 프로그램이어서 공부에 관해 요구사항이 꽤 많았다. 게다가 학생들은 모두 개성이 지나치게 달라서 각자의 진도와 각자의 성격에 맞춰 가르친다는 일은 진정 어려웠다. 심지어는 내가 ‘선생’이라는 이름으로 앞에 있는데도 싸우고, 던지고, 욕하고... 화가 머리끝까지 난 학부모님이 쫓아오셔서 수업도 못하고 진정시켰었다. 그렇게 일주일을 지내고 나니, 과연 ‘좋은 선생님’이 되겠다는 것. 또 ‘학생들이 가고 싶어 하는 학교’에 대한 욕심이, ‘무섭고 잘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야하는지... 싶었다. 그래서, 남은 시간동안 꽤 무서운 선생님이 되었다. 말로 크게 꾸짖고(물론 수업 끝내고 다시 한 번 잘못을 짚어가면서 달래고 보내긴 했지만) 울리고, 때론 내 성질에 나도 큰소리로 화도 내고 책가방 싸서 집에 가라고 혼내기도 했다. 그리고 매번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맘이 불편했다. 근데도 마지막 날이 되니, 선생님이 있어 참 좋았다면서 편지랑, 직접 그린 그림이랑, 종이접기를 주는데 참... 나는 좋은 선생님 되기엔 멀었다는 생각에 미안한 거다. 사실 지금도, 많이.

그냥, 개강의 즐거움, 약간 지루하고 뿌듯하기엔 정신없이 바빴던 방학이 끝났다는 해방감 같은 것에, 술 먹고 집에 오니 생각나는 거다. 대체 어떤 방법이 좋은 걸까. 인격적으로 대해야지 생각에 생각을 또 하면서도 말끝마다 토 달며 떼쓰는 학생에게 설명도 하기 전에 화냈던 내가, 밉고 자격 없는 것 같다. 결국은 나도 이렇게, 과거에 내가 그렇게 미워하던 사람들을, 닮아가는 걸까. 조금, 두려운 밤이다. 그냥 뭐, 그렇다고.

 

[ 췌씨 ]

Posted by 오승희

가 정

(박목월 시 개작)


학교에는

아홉개의 몽둥이

아니 학생부에는 아니 선생님의 책상 아래에는

아니 엎드린 학생들의 엉덩이에는

내려쳐질 무렵을

크기가 다른 아홉개의 몽둥이를

 

내 담당은

십구달부(十九撻棓)

살떨리는 길을걸어

그들앞에 엎드리면

6번크기의 끝이 납작한

몽둥이야 몽둥이야

학주의 몽둥이야

 

아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규율과 통제로 벽을짜올린

여기는 학교

억압받는 학생의 길이여

내담당은 십구달부

 

학생부 앞에모인

아홈개의 몽둥이야

짐승같은 것들아

굴욕과 서러움의 추운길을 걸어

내가왔다

너희들의 타겟이 왔다

아니 십구달부를 맞을 엉덩이가 왔다

아니 학교에는

학생인권보장이라는 어설픈 교칙이 존재한다

아파하는

내얼굴을보아라

 

 

 

-> 교과서에서 봤던 박목월 시인의 <가정>.

60년대의 힘들었던 한국사회를 이야기한 이 시가

현재 학교의 학생인권침해를 이야기하네요...

 

[Leather]

Posted by 오승희

[“사노라면”은 사는 이야기들, 에세이, 시, 메모, 단상, 그런 것들을 싣는 코너입니다. 말 그대로 “사노라면” 생긴 일들과 생각, 느낌들로 채워주세요. 센치한 것, 발랄한 것, 담담한 것, 유머, 모두 환영합니다.]


평온한 저녁을 위하여-

(박노해 시 개작)


나면서부터인가

학생이 된 후부터인가

내 영혼은 불안하다

 

새벽잠을 깨면

또다시 시작될 하루의 일과

거대한 세계의 매정한 회전

선생놈(ㅋㅋ)의 차가운 낮짝이

어둠처럼 덮쳐 오고

아마도 내가 자살한다면

새벽일 거야.

 

학원 끝난 늦은 귀가길

산다는 것, 학생으로 산다는 것의

깊은 불안이 또다시 나를 감싼다.

 

화창한 일요일

가족들과 오붓한 저녁상의 웃음 속에서도

꿈 없는 내일에

짙은 불안이 엄습해 온다.

 

이 세상에 태어나

죄진 적도 없고

노예살이 머슴살이 하는것도 아닌데

풍요로운 웃음이 하늘에 닿는

특목고와 명문대의 대한민국 땅에서

떳떳하게 공부하며 살아가는데

왜이리 종놈처럼 불안한 세상살이인가

 

믿을거라곤 이 살덩어리 하나

진정한 친구와 잘 찍는 수성 사인펜

기만원짜리 정석 한 권뿐인데

괴롭기만 한 긴 일과

쪼개고 한자고 안 놀아도

오르는 점수하나 없이 물거품처럼

이러다간 언제 쓰러질지 몰라

 

상쾌한 아침을 맞아

즐겁게 땀 흘려 학습하고

뉘엿한 석양녘

친구들과 웃음 터뜨리며 교문을 나서

조촐한 밥상을 마주하는

평온한 저녁을 가질 수는 없는가

 

떳떳하게 공부하며

평온한 저녁을 갖고싶은 우리의 꿈을

그 누가 짓밟는가

그 무엇이 우리를 불안케 하는가

불안 속에 살아온 지난 십수년을

이제는

평온한 저녁을 위하여

평온한 미래를 위하여

결코 평온할 수 없는

청소년의 대도를 따라

불안의 한가운데로 휘저의며

당당하게 당당하게

나아가리라

 

 

 

 

-> 70년대 노동자의 삶의 애환을 담은 이 시가 21세기 한국 청소년들의 삶의 애환을 담은 시가 되었네요.

어찌 이럴 수 있을까요!!

죽어간 청소년들에게 이 개작시를 바칩니다.

 

[ 야우리시민 ]



Posted by 오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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