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문

::제12호:: [2010] : 2011.07.24 19:51


안녕하세요? 지난해 가을 11호 이후로 1년만에 인사드립니다. 

적어도 이번 여름이면 발간될 것이라고 홈페이지에 공지한 것과는 달리 생각보다 더 늦어진 12호 발간에 대해 사과의 말씀을 드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너무 오래 되어서 시의성을 잃은 글들도 좀 있네요.

편집진의 해외체류, 군복무 등의 이유와 기타 개인적인 사정이 얽혀 발간 작업이 다소 지연되었고, 오승희의 판형을 잡지 형태로 전환한 뒤의 인쇄비 상승과 더불어 전반적 물가 상승으로 인해 재정적인 어려움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12호에 글을 투고해 주신 분들과 오승희 홈페이지(vivaerror.net)를 통해 다양한 의견을 주신 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또한 무엇보다도 1년동안 오승희를 잊지 않고 기다려주신 구독자 여러분께 감사와 죄송한 마음을 동시에 전합니다.

 

열세 번째 오승희는 다소간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만 아직 내부적으로 논의 중입니다. 큰 실험을 하거나 하는 건 아니고 다만 조금이라도 더 빨리 안정적으로 낼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확정되는 대로 너무나 긴 침묵 기간 없이 되도록 신속하게 홈페이지를 통해 공지하도록 하겠습니다.

 

오승희에 변함 없이 사랑과 관심과 글과 돈을 보태어주세요! ^^

Posted by 오승희


◎ 청소년자유언론 오답 승리의 희망(오승희)입니다. 사회가 강요하는 ‘정답’과 어긋나는 이야기들이, ‘오답’들이 속에서 꿈틀대는 분들과 함께합니다. 자유롭게 글을 써서 게시판(http://vivaerror.net/zine/)에 투고해주세요. 되도록 검열 없이 싣도록 하겠습니다. 오승희는 가능한 한 검열 없는 신문을 지향합니다. (투고받은 글들은 편집진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 좀 띄엄띄엄 나오고 있는데요. 12호는 11호에 이어 1년 이상 기다리셨죠? ㅠㅠ 죄송… 돈만 있다면 격월간지나 월간지로 내고 싶습니다. ㅠㅠ

 

◎ 오승희는 무료가 원칙입니다. 다만 많이 받아가는 단체 등에게는 좀이라도 후원금을 내달라고 부탁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냥 받아보시는 분들도 되도록 돈을 조금이라도 주시면 오승희가 먹고사는 데 큰 보탬이 됩니다. 오승희의 재정난이 아주 심합니다.

 

◎ 오승희 블로그도 있습니다. http://vivaerror.tistory.com 입니다. 지난호에 올라왔던 글들, 미처 못 실은 이야기들 등이 더 빨리 혹은 뒤늦게 올라갈 겁니다. 블로그는 돈이 별로 안 들어서 좋습니다. 블로그 운영은 해나가면서 더 잘 다듬어나가야겠죠?

 

◎ 오승희에서 이번에 사무실을 얻었습니다. 사실은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가 구한 사무실에 덤으로 얹어서 쓰는 거지만; 서울시 영등포구 문래동2가 57-4번지 2층입니다. 오승희를 더 안정적으로 보관하고 만들 수 있게 됐습니다.

 

◎ 한겨레결체, 다음Regular체, 서울한강체, 서울남산체, 맑은고딕 등의 글꼴들을 주로 사용했습니다.

 

후원해준 단체에 보답 광고입니다.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http://asunaro.or.kr

(더 그럴듯한 광고를 원하시면 직접 만들어서 주세요;;)

Posted by 오승희


  이현 씨가 쓴 단편소설, 「오답 승리의 희망」을 읽고서 오승희 편집진들이 이야기를 나눴다. 이날 수다에는 얼마 전 새로 오승희 편집진이 된 둠코(오타쿠), 거부기(이후학교 고등학생)에 공현(오승희 창간멤버)을 더해서 3명이 참여했다. 밤의마왕님은 특별게스트로 가끔씩 끼어들었다.

「오답 승리의 희망」은 단편소설집 『영두의 우연한 현실』에 가장 마지막으로 실려 있는 작품이다. 어느 고등학교에서 「오답 승리의 희망」 신문이 배포되면서 일어나는 일을 그리고 있다.

(※ 주의 : 수다 내용에는 꽤 많은 미리니름-스포일러-네타바레가 담겨 있으니, 내용을 미리 들어도 상관없는 분들은 이용을 삼가주십시오.)

 

많이 겪은 일 같은 느낌

 

둠코 : 솔직히 「오답 승리의 희망」보다 「어떤 실연」(같은 책 『영두의 우연한 현실』에 실려 있는 단편소설)이 더 재밌었어.

공현 : 재미로 따지면 나도 많이 재밌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냥 제목에 주석이 좀 나에겐 감동적? ㅋㅋ

 

거부기 : 주석이 맘에 들었다구?; 오승희 설명하는 거… 나르샤라고 하니까 신기했어.

 

둠코 : 구시대의 유물 같다는 생각이 팍팍 들면서… 나르샤 망하고 오승희만 남았으니;;

읽으면서 ‘변호사’ 선생이 참 유들유들하다고 짜증난다 생각했어. 그런데 현실에선 보통 더 심하지 않아? 운동장 오리걸음 시키는 거 정도로 협박을 할까? 학내에 그런 일 저지르면 징계주겠다고 협박 때리잖아. 누가 했냐고 물어보는 거 자체가 인도적인 처사 아냐? 보통은 그냥 “니가 했지. 징계먹어라.”잖아.

 

공현 : 아무리 막무가내여도, 아무 증거도 없는데 징계를 때릴 순 없으니까;;

 

거부기 : ‘변호사’ 말하는 거 진짜 짜증나던데. 소리 안 지르면서 막 비꼬고. 들으면 눈물 날 거 같아. 선생님들 그런 말투 싫어 진짜. 나도 그런 선생님이 막 뭐라고 한 적 있는데… 되게 재수 없어.

 

둠코 : 그런데 그렇게 안 걸리고 하룻밤 새에 다 뿌리고 붙여놓고 할 수 있어?

 

공현 : 난 자주 했어. 전단지 같은 거 몰래 뿌리는 거. 심증이 있어서 선생들이 불러서 “니가 했지?” “누군지 알지?”하지만 난 “모르겠는데요. 우와 이런 사람이 있다니. 저도 알고 싶어요.” 이러면서 시치미 떼고…. 참 학교가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

 

둠코 : 나도 야자 빠지려고 할머니 생일이랑 돌아가신 할아버지 생일 우려먹고… 친척 한 대여섯 명 죽인 거 같아. 제사 있다 그러고. 거짓말을 많이 하게 되지, 학생들이.

 

공현 : 그래서 이런저런 면이 오승희 편집진들이 많이 겪은 일을 그대로 소재로 삼은 거 같다는 생각을 했어, 처음 읽을 때.

 

좀 비현실적이지 않아?

 

공현 : 네이밍센스가 유치하지 않아? 곽정, 이오구;

거부기 : 나중에 듣고 놀랬어. 이오십도 아니고 삼삼구도 아닌 이오구라고, 그래서 틀린 이름이라고.

 

둠코 : 작가가 좀 싸이코다?; 그런 데 신경 쓰냐...

 

공현 : 근데 진짜 곽정처럼 오승희 보면서 막 그러고 스크랩해놓고 이러는 사람 있을까?

 

둠코 : 그건 수집광일 거야. 오타쿠라고 본바탕이. 에바를 갖다 줘도 같은 짓을 할 거야.

 

거부기 : 있을 거 같은데? 감명 받아서... 난 처음 봤을 때 무지 신기했어. 우와. 발칙하고 좋지 않아?

공현 : 다른 면에서 비현실적인 거. 이오구 전에 있었다던 학교. 소지품검사 거부운동 두발자유 서명운동… 복도에 마우스 끌고 다니는 게 유행이라고 막 그랬잖아. 그런 게 비현실적이라고 느꼈어.

 

둠코 : 좀 돌은 인간들이 모여서 어떤 학교가 그럴 수도 있지, 뭐.

 

공현 : 아니 그런 학교가 없다는 게 아니라. 우리가 본 촛불 참가하는 청소년들은 학교 안에서 그런 거 안하잖아.

 

둠코 : 그렇지. 촛불집회 나와서 거기서 다 풀고 학교 와서 얌전히 사는 애들이 많지.

 

거부기 : 광우병 소 반대하고, 민주주의 이런 거 정도지.

 

둠코 : 학교에서 막 그림 그리기 할 때 광우병 소 미친 소 안 돼 이런 거 애들이 많이 그렸었어. 하지만 그건 그냥 정말 광우병 소 위험해서 안 돼요, 이 정도. 학생인권에 대한 이야기로 가진 않아.

 

밤의마왕 : 이명박보다 학교 선생이 무서운 거지.

 

공현 : 촛불소녀랑, 학생인권 청소년인권 이어놓는 게 경험적으론 더 비현실적이라고. 그런 점이.

 

둠코 : 광우병이나 민주주의 이런 건 대의명분이 서는 거고. 청소년인권 같은 경우 당사자들의 이익이잖아. 좀 결이 달라.

 

왜 끝이 연애설인가 ㅋㅋ

 

둠코 : 연애설이 도는 걸로 끝; 나 그거 짜증났어. 왜 우리나라 고딩들은 연애에 집착하지? 이런 느낌?

 

거부기 : 마지막에 이건 뭐지? 이랬어. 끝 같지 않은 끝이었어.

 

공현 : 그냥 끝을 좀 가볍게 끝내고 싶었던 거 아닐까? 앞에 무거운 게 많잖아.

 

둠코 : 바보 아냐? 곽정 옆에서 그렇게 같이 오리걸음 하고 있으면 이오구가 한 줄 알 거 아냐. 선생들이.

 

거부기 : 변호사는 이오구가 곽정 좋아하는 줄 알걸?

둠코 : 왜 교사들도 그렇게 연애에 집착해? -_-

 

정점을 찍은 기분

 

공현 : 사실 옛날부터 이런 소설 쓰고 싶긴 했어. 졸업 직후에, 학교 안에서 청소년운동하고 전단지 뿌리고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로 소설 만들어도 재밌겠다 싶었어.

 

둠코 : 소설은 BL밖에 못 쓰겠어. 근데 BL 중에도 운동하는 거 나오는 BL 있더라?

 

공현 : 전부터 이현 씨가 오승희 좋아하는 줄 알고 있었거든? 이현 씨 블로그 보고서. 근데 소설로 쓸 줄이야. 행복발전소에서 백절불굴상도 받고 아 오승희 이제 그만둘 때인가. 하는 느낌 잠깐. 뭔가 이게 오승희의 정점이라는… 하지만 그러면 안 되겠지? 더 열심히 하란 의미겠지? 근데 소설에 쓰고서 돈도 안 주고 말야. 제목까지 그대로 썼으면서.

 

둠코 : 그럼 넌 에바 리뷰를 쓰고 안노 히데아키한테 돈을 줘야 하니?

 

밤마 : 원고 써도 원고료도 안 주면서.

 

공현 : 이현 씨가 후원금 좀 입금해주긴 했지.

 

소설 나오고 구독자가 너무 늘었어

 

거부기 : 오승희 진짜 학교 뿌리면 재밌겠다.

 

공현 : 거부기는 중학교 다닐 때 오승희 안 뿌려봤나?

 

거부기 : 난 오승희 말고 다른 두발자유 전단지 같은 걸 뿌려봤지. 지금 다니는 고등학교에서 오승의 배포하면 그냥 우쭈쭈쭈 할 거 같은데… 근데 뿌리면 진짜 재밌을 거 같긴 하다.

 

공현 : 신문에서 잡지로 바뀌었는데 신문일 때가 배포하기 더 좋지 않아?

 

거부기 : 그야 그렇지. 근데 잡지가 재밌긴 더 재밌어.

 

둠코 : 빠방하게 만들어보자 잡지. 재밌는 것도 넣고. 잡지로 만든 거, 뭔가 있어보여야 하지 않겠어, 기왕?

 

공현 : 십자말풀이라도 넣을까? -_-

 

거부기 : 이현 작가한테 기고를 부탁하는 거야. 소설.

 

둠코 : 그래, 소설 연재를 부탁하는 거지.

 

공현 ; 이 소설에선 8호 내고 있는데 우린 12호를 찍고 있어서 감회가 새로웠어.

 

거부기 : 아 맞다. 이 소설 보면 막 하루만에 7호 8호 나오잖아. 그게 신기했어. 누가 보면 오승희 꼬박꼬박 잘 나오는 거 같을 거야.

 

둠코 : 근데 그거 이오구나 곽정이 아니라 우리가 만드는 거잖아;

 

공현 : 이렇게 열심히 배포하고 해줄 거면 편집진 좀 참여해주지.

 

둠코 : 이현 작가한테 이오구 좀 연결해달라고 해. 이오구 내놓으라고.

 

거부기 : 오승희 신문 사진 하나라도 찍어서 표지에 넣어주지. 진짜 있는 거예요, 하고.

 

공현 : 이 소설 나가고 구독 신청자 엄청 는 거 알아? 그래서 감당이 안 돼;; ㅠㅠ

Posted by 오승희

 

학생들은 흔히 ‘두발규제’에 대해서는 많은 반감을 가지고 두발자유를 외치곤 하지만, (물론 이 두발자유 또한 염색, 파마 같은 거에 대한 이야기로 들어가면 태도가 달라지는 사람들이 있으나) 중고등학교에서의 복장규제 - 가장 대표적으로 교복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그 반감이라는 게 상대적으로 덜해지는 것 같다.(뭐 그렇다고 해도 학생 10명 중 최소한 4-5명은 교복을 싫어하는 거 같지만)

왜 학생들은 교복에 대해서는 비교적 덜한 반감을 가지는 것일까? 집단에 대한 소속감이니 제복 특유의 ‘멋있음'이니 하는 것들을 들먹이며 사이비 심리 분석을 해볼 수도 있겠지만, 지금 굳이 그런 이야기를 주워섬기는 게 생산적인 이야기가 될 것 같지는 않다. 그런 건 전문가 분들이 잘 연구해주실 테니까.

이 글에서는 그저 교복폐지(또는 교복 강제 폐지)를 반대할 때 맨날 나오는 몇몇 이야기들에 대해서 반박하려고 한다. 이 글을 읽으면서 ‘교복 없는 중고등학교’를 꺼려하는 사람들이 다시 한 번 자신의 감정, 생각을 돌아보길 바란다.

 

1. '학생다움'

 

교복은 최소한의 학생다움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결국 두발규제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리와 다를 바 없다. 이 ‘학생다움’이라는 걸 대체 누가 규정하는 것인가? 두발복장에 대한 규제, 외모에 대한 규제를 하면서 들먹이는 '학생다움'이라는 것은 결국 일부 꼰대스런 어른들(다수일까 소수일까?), 그리고 이 사회의 고정관념과 편견 외에는 없는 것 같다. 게다가 그것이 폭력을 동원해가면서 옹호될 만한 가치인지부터가 의문이다.

자신의 외모를 꾸미고, 자신이 원하는 나 자신을 표현할 권리, 두발이나 복장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할 권리는 굉장히 기본적인 인권에 해당한다. 이러한 인권을 제한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이고 긴급하고 불가피한 사유가 필요하다. 학생다운 모습으로 교장선생님과 일부 지역주민(어른)들의 눈을 만족시켜주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권리를 제한할 만큼 구체적이고 긴급하고 불가피한 사유인가? 국가안보나 공공질서 유지(여기서 공공질서란 모호하고 폭넓은 개념이 아니라 굉장히 구체적이고 필수적인 질서만을 뜻한다. 인간 생명에 대한 존중이라거나, 폭력에 대한 예방이라거나…)를 위해 교복을 강제로 입힐 필요가 있는가? “학생다움”이라는 이유는, 개인이 추구하는 취향이나 가치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학생들 모두의 인권을 제한할 만한 사유가 되지 못한다. (사실 옷을 홀라당 벗고 나체로 다니거나 타인에 대한 명백한 심리적, 신체적 침해의 위험이 있지 않는 한 (이 경우 성폭력적 행위가 될 수 있다.) 또는 직무상 안전상 필요한 게 아니면 복장규제 자체가 정당화되기 어렵다.)

학생다움을 위해서 교복을 입혀야 한다는 주장은 결국 이런 소리다. “누군가 힘 있는 사람들의 외모에 대한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해 우리는 그 사람들이 단정하다고 생각하는 제복을 모두 똑같이 입어야 한다.” 아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린가? 우리는 광고에 놀아나는 의류자본의 바비인형이어서도 안 되겠지만, 꼰대들의 폭력에 놀아나는 학교의 바비인형이어서도 안 될 것이다.

 

2. 통일성

 

교복을 입히는 게 그 학교 학생들에게 통일성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말이 있다. 확실히 똑같은 옷을 입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 누가 누군지 언뜻 알아보기가 쉽지 않은 게, 참으로 획일적이기는 하다. 그런데, 왜 ‘통일성’이 필요하지? 모두가 비슷비슷한 모습으로 단정하게 있는 게 보기 좋으니까? 누군가의 눈에 보기 좋아 보이는 통일성을 갖추기 위해서 인권을 제한할 수는 없다. 결국 이것도 학생다움과 비슷한 이야기로 귀결되고 만다.

교복을 강제하는 이유로 ‘통일성’을 이야기한다면, 그건 오히려 학생들을 모두 획일적인 모습으로 만드는 교복은 폐지되어야 마땅함을 시인하는 꼴이다. 학교는 군대도 아니고 반드시 통일된 제복을 입어야 할 실용적 필요가 있는 곳도 아니다. 그런데 학생들을 획일적 모습으로 만드는 교복과 두발규제는 다양성과 인권을 억압하는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 솔직히 복장규제만 사라져도 학교 분위기가 좀 더 숨통이 트일 것이라고 예상한다.

사실 한 학교의 학생들은 모두 같은 옷을 입어야 한다는 말 속에는 ‘그래야 통제/관리하기 쉽다.’라는 말이 숨어있다. 교복만 보고도 어느 학교 학생인지 알 수 있어야 그 학생을 관리하고 통제하기 쉽다는 것이다. 이렇게 교복이 학생들을 통제하고 관리하기 위한 수단이라면, 더욱 없어져야 할 일이다. 학생들을 잘 교육하고 학생들에게 인권의식과 판단력을 심어주기보다는 교복이라는 장치로 획일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하는 것이 학교 교육의 이념인가? 만일 소풍 같은 것을 가서 학생들의 안전 문제 때문에 어느 학교 학생인지 알 필요가 있는 경우가 있다면, 따로 통일된 뱃지를 단다든지 손수건을 가진다든지 아주 작은 공통의 표식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어떤 특별한 의식(장례식이라거나?)이 있을 때만 통일된 복장을 문화적으로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규정과 폭력을 통해 통일된 복장을 요구하는 것은 실로 괴악한 일이다.

 

3. 경제적 차별

 

교복 이야기를 할 때 가장 난관은 아마도 경제적인 차별의 문제일 것이다. 요컨대, 교복을 폐지하게 되면, 옷에서부터 빈부격차가 확연하게 드러나게 되고, 이것이 빈곤한 학생들에게 상처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교복을 아무리 입혀도 가방, 외투, 평소의 소비, 성적 등등의 부분들에서 이미 빈부격차는 뻔히 드러나고 있으며 교복이 그런 부분에서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 의문이기는 하다. 그러나 어쨌건 교복이 빈부격차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막는 효과가 조금은 있다고 쳐볼 수는 있겠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뭔가 이상하다. 학교는 사실 성적이나 옷차림이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는 기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교육하고, 자유와 평등과 개성과 공공성이 실현될 수 있도록 하는 기구여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학교는 그런 내용의 교육을 거의 하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 교복을 입혀서 겉으로 확 드러나는 경제력 차이만 좀 숨기겠다고?

나는 학교가 학생들의 눈을 현실에서 돌리게 하는 눈가리개가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엄연히 존재하는 빈부격차를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듯 교복 입힌다고 얼마나 가릴 수 있을지도 다소 의문이긴 하지만, 그 이전에 과연 그 하늘을 가리는 것이 옳은 일인가 고민이 든다. 학교는 사회에 불평등이 존재하며, 그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서 어떻게 노력해야 할 것인지 가르쳐야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가 입고 있는 옷의 가격이나 삐까번쩍함에 의해 정해지지 않는다는 것도 배워야 한다. “그런 교육을 하려고 노력을 열심히 했지만 어쩔 수 없네요, 교복이라도 입힙시다…”도 아니고 자기 본래의 역할은 전혀 수행하지 않으면서 교복 입히는 핑계로만 경제적 불평등을 대고 있다.

백보 양보하여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 때문에 복장에 대한 규제가 필요할 수 있다고 하자.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귀금속악세서리’나 ‘수십만원 넘는 메이커 티 팍팍 나는 옷’ 등에 대해서만 제한적으로 규정을 두고, 빈곤 학생들에게는 충분한 복지를 보장하여 좋은 의생활을 누릴 수 있게 하면 될 일이다. 굳이 교복처럼 폭력적이고 획일적인 방식을 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불가피하게 인권을 제한해야 할 때도 필요최소한만 제한해야 하기 때문이다. 복장의 자유가 인권인 이상 이 원칙은 지켜져야 한다. 또한 이런 경우라 하더라도 지속적으로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에 대해 인권적 교육을 하면서 복장규제가 불필요한 상태를 지향하는 것이 옳은 태도일 것이다.

 

(# 그리고, 빈부격차, 경제적 불평등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불공평한 빈부격차를 해소하자고 주장한다. 실제의 격차는 그대로 둔 채 백만장자건 서민이건 옷만 같은 거 입고 차 같은 거 타고 다니게 하자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4. 귀차니즘

 

사실 학생들이 교복폐지 이야기를 할 때마다 가장 흔하게 하는 이야기가 이것인 것 같다. 교복을 강제로 입고 다녀야 할 때는 교복 그냥 입고 다니면 됐는데, 교복 강제가 없어지면 아침마다 무슨 옷 입을지 골라야 할 것이라는 거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교복의 효과”라는 생각이 든다. 자기 스스로 자기 마음에 드는 옷을 선택해서 입는 것조차 귀찮아하고, 남이 강제해주는 옷을 수동적으로 입는 ‘노예’ 상태에 익숙해져있다는 소리기 때문이다.

정 그렇게 귀찮으시면 당신만의 교복을 한 벌이나 두 벌 정해서 그 옷만 줄창 입고 다니시면 된다. 그게 교복처럼 한 종류의 옷만 강제로 모든 학생들이 입고 다녀야 할 이유는 절대로 될 수가 없다. 그리고 강제로 교복을 입게 하는 게 사라지고모든 학생들이 자신의 취향과 개성에 따라 옷을 입고 다닐 수 있게 된다면 이내 이런 귀차니즘 소리는 사라질 거라고 믿는다. 자기가 생각하기에 적당한 옷을 골라 입고 다니는 것, 초등학생이나 대학생이나 많은 어른들이 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 초등학생이나 대학생이나 (직장에 제복 안 입고 가도 되는) 어른들이 귀찮으니까 교복/제복/국민복 같은 걸 만들자고 하지는 않더라.

 

 

교복은 사라져야 한다. 교복을 강제로 입히는 것은 두발규제보다 더 획일적인 문화를 만들어내고 있으며 학생들의 개성과 다양성을 짓누르고 학생들을 길들이고 순응시키고 있다. 교복은 두발규제와 함께 여/남 성역할 고정관념을 만들어내고 있기도 하다.(여성은 치마 교복, 남자는 바지 교복 등등) 교복이 없는 학교는 전세계적으로 많이 있으며, 한국에도 많은 대안학교들이(대안학교 아닌 학교들도 소수 있다.) 대부분 교복이 없는데도 잘 돌아간다. 교복이 없고 두발규제가 없는 학교를 상상해보라. ‘유토피아’까진 아니더라도, 지금보다는 훨씬 더 아름다운 학교 모습일 것이다.

 

 

추신 : 경제적 차이를 은폐하려고 교복을 입힌다는 것은 이상한 논리다, 라는 주장을 놓고, 우연히 인터넷에서 어떤 분이 “그럼 성적도 공개해야겠네. 엄연히 존재하는 성적 차이를 왜 숨기려고 하나.”라고 말한 것을 보았다. 그러나 성적 문제와 교복 문제는 좀 다른 면이 있다.

첫째, 교복을 없애고 복장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은 학생들의 인권과 개성을 존중한다는 매우 긍정적 의미가 있다. 그러나 성적을 공개하는 것에는 이처럼 인권을 보장한다는 의미는 전혀 없다. 학교간 학생간 성적 경쟁을 조장하는 효과가 있을 뿐이다. 즉, 교복폐지에는 경제력의 차이가 드러나는 부정적 효과보다 더 앞서는 긍정적 가치가 존재하는 데 비해, 성적 공개에는 그러한 긍정적 가치가 별로 없다.

둘째, 성적은 학교에서 만들어지는 서열화, 차별 시스템이다. 학교 교육은 마치 성적이 그 인간의 능력과 가치를 나타내는 것처럼 이야기하며, 이는 학력/학벌에 대한 차별로 구체화된다.(능력주의 신화) 경제력의 차이는 학교 밖에서 사회적으로 주어지는 조건이며 학교가 대처해야 할 외부 요인이지만, 성적은 학교가 적극적으로 만들어내는 요소인 것이다.

 

[ (익명) ]

Posted by 오승희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자. 보시기에 대한민국 교육이 어떻습니까? 장담컨대, 그렇게 1000명의 아무나에게 물어봤을 때 우리나라 교육이 ‘잘 되고 있다’라고 말할 사람은 손가락 열 개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정말로 그런지 궁금해져서, 어제 아침, 직접 밖에 나가 거리를 걸어가면서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부터 나이 지긋한 어르신까지 약 200명에게 즉석 조사를 했다. 망했다. “문제 있다”는 즉각적으로 튀어나왔지만 좋다, 괜찮다, 잘 한다는 뉘앙스가 담긴 말조차 결국엔 단 한 명에게서도 들어보질 못했다.

별보며 학교 가고 달 보며 귀가하는 학생들이 있었다. 그들은 어느덧 자라서 어른이 되었지만, 그들의 아들딸은 아직도 별 보며 등교해서 달 보며 하교한다. 달라진 게 없다. 게다가 이젠 뜨거운 사교육 열풍까지 덤으로 몰아친다. 그 와중 살고자, 이기고자, 옆 짝꿍의 머리를 밟고 더 높게 올라가고자 쏟아 붓는 기백만 원의 학원비로 만들어진 타율적 경쟁과 양극화속에서 수천 명이 죽어가는 대한민국의 60년 교육사를 그 누가 성공했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문제가 있다는 답은 만민 공통이지만, 여러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문제의 해결책은 가지가지다. 여하간 교육문제의 해결책이랍시고 정부가 내민 카드 중 하나가 ‘교원평가제’다. 노무현, 이명박 정부 공통의 카드다. 안병만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은 국회의 입법에 상관없이 현재 시범운영되고 있는 교원평가제를 내년 3월부터 전국적으로 확대 실시하겠다고 선언했고, 국회에서는 교원평가제 법안이 논의 중이다. 교사들을 평가해서 공교육의 질을 높이고 사교육을 줄이겠단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교육의 문제를 일정정도 해소시킬 단비로 이 교원평가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교원평가가 교육을 변화시킬 단비가 아닌 산성비라면?

 

 

교사에게 점수 매기고 경쟁시키면 교육이 얼마만큼 나아질까?

 

지금까지 대한민국 교육은, 경쟁을 시키지 않으면 학생들이 공부를 하지 않고 교육이 발전하지 않기에 건전한 경쟁을 하도록 만들겠다며 입시경쟁의 압박을 지속시켜오고, 높여왔다. 이명박 정부 또한 경쟁과 자율을 내세우며 대학교, 초중고교 할 것 없이 서열화시키는 정책을 취하고 있다. 그러다가 이제는 교사들이 노력이 부족해서 교육이 발전하지 않는다며 교사들을 평가하고 비교하며 압박을 하겠다며 교원평가를 내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학생들을 종이 몇 장으로 평가해서 얼마나 잘 맞는가를 평가하는 것과 교사들을 종이 몇 장으로 평가해서 비교하는 교원평가가 비슷해 보이는 것은 오해인가?


 교육활동은 다양한 요인들 속에 이루어지며 이런 요소들에 따라 교육의 과정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이런 다양한 요인들을 모두 고려해야 ‘평가’란 것이 그나마 제대로 될 텐데 열 개가 있으면 그 중 한두 개(교사들에 관한 것들)만 들춰본 다음 평가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교육문제의 책임이 교사들한테 전혀 없다고 할 수야 없겠지만, 교사들만 쪼면 학교교육이 더 학생들이 행복한 교육이 만들어질까? 좀 더 나아질 수 있는 부분들이 있을지 몰라도 크게 나아지는 모습은 잘 그려지질 않는다. 더군다나 이 교원평가제는 학생들의 의견을 중심에 둔 제도도 아니다. 교장, 교감 등 학교 관리자들이나 동료 교사들의 평가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들이 좋게 평가하는 교사의 덕목이란 대체로 무엇일까? 아무리 봐도 점수매기고 평가하고 비교하는 지금까지의 평가/비교/경쟁위주와 다르지 않은 교육정책 같고, 교육이 좋아질 거라는 기대가 생기지를 않는다.

또한 평가로 사람을 관리하는 제도에는 필연적으로 강압이, 협박이 동반될 수밖에 없다. 평가의 목적이 교원의 ‘능력개발’이기 때문에 평가결과에 따라 강제적으로 연수를 보낸다던지 잘라버린다던지 하는 징벌의 요소가 있어야 시스템 유지가 가능하다. 학교가 학생들의 성적을 올리기 위해 학생들을 폭력과 강압, 차별로 갈구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는(뭐 교사들도 한때는 학생이었고 임용고시를 통과했으니 알겠지만) 평가, 경쟁, 서열화, 점수매기기, 그리고 그에 따른 강압과 차별이 난무하는 학교가 별로 다니고 싶은 학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교사와 학생 모두가 불행해지는 게 교원평가의 목표인가?

교원평가의 미래는 대한민국 교육 60년사만으로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문제는 학생과 교사들의 노력 부족이나 학부모의 관심 부족이 아닌 평가/비교/경쟁만을 강요하는 대한민국의 교육정책이다. 주어만 다른 평가/비교/경쟁위주의 교육정책인 교원평가가 교육에 변화를 만든다? 말도 안 되는 사기다.

 

 

교원평가제로 학생의 참여는

보장되지 않는다

 

정부는 교원평가를 통해 학생/학부모의 만족도를 참고하여 교육능력을 발전시키고, 학생과 학부모가 교육내용/과정에 의견을 개진하고 참여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한다. 학생의 학교운영, 교육내용/과정 참여는 지난 몇 년간 청소년단체와 진보적 교육단체 등에서 꾸준히 요구해온 부분이다. 교육을 진행하면서 그 교육에 참여하는 모든 주체들의 의견들이 중요한 목소리로 인정되고, 논의를 거쳐 반영되는 것은 교육의 발전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지금의 교원평가가 이 부분을 온전히 채워줄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지금까지 학생들의 참여가 불가능했던 이유는 몇 가지 있다. 첫째, 학생들은 학교운영이나 교육과정에 대해 고민하고, 의견을 낼 현실적인 시간이 부족하다. 영어 한 단어라도 더 외워야만 하는 상황에서 참여는 사치이다. 둘째, 학생들이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학교에서 담임교사에게, 학교장에게, 교육감에게 비판을 한다는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물론, 청소년은 미숙하고 ‘뭘 잘 모르기 때문에’ 건설적인 의견들조차 무시되는 게 현실이다. 셋째, 어떠한 참여구조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 학교운영은 물론 교육과정 전반에서 학생들의 의견을 내고 이를 반영시킬 어떤 통로도 권한도 없다. 학생회는 제 기능을 못하고 있고 학생회에서 이야기를 한다 하더라도 모든 최종결정은 교장이 하는 상황에서 제대로 된 소통구조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의 교원평가제는 이런 것들을 해결해줄 수 없다. 입시경쟁교육이 더욱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학생들에겐 여전히 교육의 과정/내용과 학교운영에 대해 논의할 만한 시간적 여유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현 상황에서는 평가조차 입시결과 위주로 평가될까 두려울 지경이다. ‘미성숙한 학생들’이라는 권위적인 인식도 여전하다. 이번 교원평가 6자 합의체에도 정당들의 참여는 있지만 정작 교육정책들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학생, 청소년들의 참여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학생들과 같이 교육을 만들어가기보다는 단지 ‘교육을 받는 대상’들의 만족도를 물어 참고자료로만 쓰겠다는 이 제도는 학생들을 무시하는 것에 가깝다.

교원평가제를 추진하면서, 정부는 마치 학생들이 교사들을 평가함으로써 수업에 참여할 수 있다는 듯이 이야기한다. 학생들도 평소 불만이 있던 교사들을 평가하고 제재할 수 있다는 말에 자신들에게 힘이 생길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형식적으로는 그런 것 같지만, 교원평가제로는 결과적으로는 학생들에게는 별 다른 권력이 주어지지 않는다. 학생들 한 명 한 명이 만족도를 점수화해서 주는 것이 과연 ‘참여’라고 할 수 있을까? 교사들을 서열화시킬 자료로 활용될 숫자들을 내놓는 ‘소비자’의 역할일 뿐이다. 학생은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라 교육을 같이 만들어가는 더 적극적인 주체이자 주인이어야 한다.

그리고 강제연수의 최종결정권자는 교장이나 교육감 같은 ‘윗사람’들이다. 교육감이 지금 학교의 촌지, 성추행, 체벌 교사 같은 부적격교사들의 존재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대책을 만들지 못한 것일까? 인터넷에 간단하게 검색만 해 봐도 문제교사들을 성토하는 글이 가득하고, 교육청 홈페이지에 지금까지 수백 건의 글이 올라왔지만 교육청은 그 글을 삭제하거나, 무시할 뿐이었다. 이 평가를 통해 교육감이 부적격교사를 파악하더라도, 학생들을 괴롭히는 문제 있는 부적격교사는 처벌받지 않고, 교육감이나 교장 등을 귀찮게 하는 부적격교사에 대한 보복성 징계의 근거로도 충분히 활용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교원평가는 오히려 권위적이고 형식적인 평가만으로 학생들의 참여를 보장했다는 헛된 명분에 그쳐 실질적인 학교자치를 가로막고, 지금의 교육을 더욱 썩도록 만들뿐이다.

 

 

경쟁 아닌 소통을, 학생에게 권력을, 제대로 된 교육환경을!

 

우리는 평가와 경쟁이 아닌 소통을 원한다. 학생이 교사를 신뢰할 수 있고 교사가 학생을 신뢰할 수 있어야 일방적 교육이 아니라 진심으로 교육을 같이 만들어가고 서로 대화하는 교육이 가능하다. 그런데 학생이 평가당하고, 교사가 평가당하며 생존을 위해 앞서가려고 아둥바둥할 수밖에 없는 무한경쟁이 팽배한 이상은 불신이 만연할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소통을 제안한다. 점수를 매기지 말고, 서로 무엇이 문제이고 그런 문제가 있으면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지 얘기를 하자는 것이다. 학부모, 교사, 학생 등 교육현장에 발을 담그고 있는 다양한 주체들끼리 협력하고 논의하여 상황을 개선해나가자는 것이다. 얼핏 이상주의적으로 들리지만 교원평가제를 도입하고 설문지를 돌리고 채점하고 윗선으로 올려 보내고 점수 매기고 하는 것보다 절차적으로도, 내용적으로도 훨씬 우수한 방안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교육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 과밀학급 해소, 학교 시설 개선, 교사 수 증원 등이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한국은 OECD니 뭐니 하며 다른 나라들 상황과 비교해봤을 때 교육예산도 낮은 편이다. 학생들은 냉난방 시설이 불안하고, 급식 질이 안 좋고, 탈의실도 동아리실도 학생회실도 없고, 교사당/반당 학생수가 너무 많고, 운동장도 좁거나 없는 학교에 심각한 불편을 느끼고 있다. 교재비 등이 부담스러운 학생들도 많다. 교육예산은 잔뜩 깎으면서 교육의 질을 올리기 위해 교사들만 평가하겠다는 것은 고약한 농담에 가깝다.

우리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개혁과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권력을 추구한다. 개혁은 교원들이, 교육부가, 크게는 현재보다 힘이 센 사람들을 갈아치우고 청소년의 목소리를 그들의 논의와 결정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현재 청소년들은 ‘덜’ 살았다는 이유로, 미숙하다는 이유로 각종 결정권을 박탈당한 상태다. 청소년들에게 결정할 권한도, 참여할 기회도 주지 않고 ‘미성숙’하다고 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미성숙’의 기준도 자의적일뿐더러, ‘미성숙’을 이유로 참여할 기회를 완전히 박탈당할 수는 없다.

이제 두 번째, 아래로부터의 권력. 우리는 자치를 원하며 정당한 권력을 원한다. 스스로 생각할 수 있고, 결정할 수 있다. 그 결정들이 초기에는 비록 미진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배우며 성장할 수 있는 존재이다. 학생인권을 보장하게 만들고 학교를 변화시킬 수 있는 주체는 학생들이다. 학교 운영이나 교육 방식에서의 개선할 점을 제대로 짚을 수 있는 주체, 어떤 교사보다도 더 생생하게 느끼고 불편해하는 학생들이다. 학생들에게 권력을 달라. 정말로 인권을 침해하는 교사가 있다면 그 교사를 징계하고 배제할 수 있는 권력을 달라. 학생들이 스스로 논의하고 자정할 수 있는 권력을 달라. 교육과정과 학교운영에 당당하게 참여하여 논의하고 힘을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을 보장하라. 권력을 분립하고 나누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인데, 지금의 교육 현장은 독재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학생들에게 자치의 권리를 주는 것은 비단 우리의 발언권 획득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결정함으로써 우리는 내면적으로 더욱 성장할 수 있고, 사회적 능력의 발달을 꾀할 수 있다. 기존의 결정권자들은 더 이상 구름 위에서 이것저것 결정한 다음에 결정한 사안이 현실에 맞지 않아 반발을 불러일으켰을 때 머리를 싸매고 무엇이 문제인지 자기들끼리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모두가 잘 되는 교육현장을 만들고 싶다. 그리고 그것은 교원평가제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 아즈 ]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서울지부)

Posted by 오승희

  학교 규칙을 만들 때 학생들의 동의 없이 선생님들끼리만 얘기한 후에 일방적으로 학생들에게 지키라 하고 안 지키면 벌점을 주는 제도가 말이 되는 겁니까??

 

학교는 학생들이 주인이라고 했으면서 단 한 번도 학생이 학교의 주인이라고 생각했던 적은 없습니다.

 

학교는 학생이 주인이 되는 학교, 학생이 인격적인 대접을 받는 학교, 민주주의를 배우고 실천하는 학교가 되어야 하는데 선생님들끼리 규칙을 만들고 일방적으로 어느 날 갑자기 내일부터 겉옷 입으면 벌점 준다 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것이 어떻게 민주주의를 배우는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요?

 

현 사회로 봤을 때 국회에서 평등하게 다른 사람들의 동의 없이 법을 만든 적이 있는가 말입니다.

 

이런 상황들이 오히려 독재를 가르치고 있다는 상황에 모든 애들이 동의합니다.

 

 

갑자기 생긴 일방적인 규칙에 대해 바꾸면 되지 않냐고 하니깐 선생님이 그건 니 생각일 뿐이라고 하여, 그 학생이 애들 다 불만 많다고 하니깐 어떻게 많은 애들 의견 다 들어보고 규칙을 정하냐면서 나쁜 법이여도 그게 법이면 지켜야 되는 거라고 했습니다.

 

 

대통령도 탄핵하는 절차적 민주주의의 진전을 향유하고 있고, ‘학생생활 규정은 학생, 학부모의 균형 있는 의견 반영’이라고 교육청에 제시되어 있는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유독 학교에서는 민주주의 원칙이 거의 지켜지지 않고 있습니다.

 

헌법이 보장하는 제2장 국민의 권리와 의무에서 제11조 행복추구권은 고사하고 신체의 자유처럼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권리조차도 구속하면서 어떻게 학생들이 법과 규정을 지키는 민주시민이 되기를 기대하며 인성교육이라는 것을 하는 학교라고 말할 수 있나 싶습니다.

 

학생들의 의견 수렴이 이루어지지 않은 학교 규칙은 행복추구권을 어기고 학생이라는 사회적 신분에서 학교생활의 사회, 문화적 생활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한 것이며 인간의 기본적 권리 제 37조에 제시되어 있는 자유와 권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예입니다.

 

민주시민 양성을 목표로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런 잘못된 문화를 바꾸어야 합니다.

 

사회에서는 악법이 인권의 본질적인 면을 침해한다면, 거기에 대해서는 당연히 저항해야 합니다.

 

이는 정의를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정의로운 법만이 진정으로 권리의 주권자에게 행복을 줄 수 있으며, 이런 사회가 추구하는 정의가 살아있는 법만이 진정으로 사회의 목적에 합치되는 법이라 할 수 있고, 이런 법을 지켜내어 사회 질서를 안정시키는 것이야 말로 진정 사회가 추구해야 하는 이상향이기 때문입니다.

 

그 법이 악법이라면 그 악법을 폐지하고 새로운 법을 세우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주권을 행사하여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의 주체이자 학교의 권리자인 학생들의 개개인 생각과 주장을 묵시 할 수는 없으며, 학교는 학생들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지 학교가 있기에 학생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학교는 학생들의 개개인의 의견마저도 귀 기울여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 짱 ]

Posted by 오승희

‘역주행'이라는 말이 있다. 진행방향이 한 쪽으로 정해져 있는 길에서, 정해져 있지 않은 방향으로 진행하는 것을 말한다. 웬만한 국도, 고속도로에는 중앙분리대가 설치되어 있어 역주행이 발생할 가능성은 극히 낮지만, 모든 차량이 한 방향으로 진행하다보니 어쩌다 한 번 역주행 차량이 나타나면 거의 재앙급의 사고가 날 수 있다. 몇 년 전에 설기현 선수가 수비 진영으로 몇 발짝 드리블한 이후로, 어쩐지 ‘역주행'이라는 단어는 ‘시대에 뒤쳐지거나, 남들과 동떨어진 행동을 하는 사람이나 단체'를 조롱하는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지만, 본래는 그런 뜻은 아니었다.

지금 우리 사회의 의사소통 구조를 보면 마치 경부고속도로 하행선 신탄진~회덕 구간을 보는 느낌이다. 위에서 아래로, 서울 방향에서 부산 방향으로, 그렇게 한 쪽으로만 흐르고 있다. 고속도로 하행선이므로 역주행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중앙분리대가 가로막고 있으니 중간에 되돌아가거나 할 수도 없다. 우회로도 없다. 위에서 아래로 ‘상명'하고 ‘하달’하는 것은 있어도,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일 그랬다간, 재앙급의 사고가 날 수도 있고, ‘역주행’한다며 조롱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항상, “말로 합시다”라고 한다. 어떤 일이건 간에 대화가 선행되어야 하며, 직접행동은 항상 섣부르고 어리석은 행동으로 묘사된다. 민주주의 공화국의 기본 원리를 따져보면 백번 옳은 말이다. 대화와 타협, 양보와 이해가 있어야 민주주의 사회가 유지된다고, 초등학교 바른생활 시간부터 그리 배웠다. 이렇게 보면, 싸우고, 던지고, 걷어차고, 때려 부수는 행동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짓이다. 아니, 세계적으로 인정받는다는 아주 좋은 언어를 놔두고 왜 바디랭귀지로 이야기하려 하는 거야? 뭐지, 이 못 배워먹은 듯한 행동들은?

그러나 이 원칙은 제대로 대화가 통할 때에 성립한다. 초등학교 운동장처럼, 놀이에 뛰어든 모든 이가 자유롭게 뛰어다니며 각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때에 가능하다. 윗사람 아랫사람의 구분이 없으면 좋겠지만, 그렇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위아래가 스스럼없이 소통할 수 있어야 가능하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그렇지가 못하다. 위에서 말하면 아래에서 따른다는 ‘상명하복’이, 이 사회의 작동 원리다. 마치 경부고속도로 하행선처럼, 어느 1인의 역주행도 용납되지 않는다.

 

필자는 군 복무를 대신해 소방서에서 의무소방원으로 병역 의무를 이행중이다. 이곳 소방서에서, 불길을 향해 뛰어드는 용감한 소방관도 보았고, 이미 숨이 끊어진 환자의 맥을 계속 살피며 안타까워하는 구급대원도 보았고, 물에 빠진 요구조자를 향해 망설임 없이 물로 뛰어드는 구조대원도 보았다. 그리고, 이 사회의 의사소통 구조를 보았다. 일인의 역주행도 용납 않는 완벽한 일방통행. ‘칸칸칸’을 강조하는 어느 김치냉장고와도 같이 칸칸칸 나뉘어진 계급구조, 위에서 아래로만 향하는 언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아랫사람’들.

 

언어가 통하지 않는 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둘 중 하나다. 아예 소통을 포기하고 침묵해버리거나, 바디랭귀지로 의사를 표현하거나. 우리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에게, 더 이상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침묵, 혹은 격한 ‘바디랭귀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 엠덴 ]

Posted by 오승희

경기도에서 학생인권조례가 통과되었다. 학생들의 힘보단 교육청에 의해 만들어진 조례라서 학교 현장에 얼마만큼 잘 정착될지는 알 수 없다. 학생들이 학생인권조례의 힘을 업고 스스로 인권을 만들려 하지 않고, 교육청이 해결해주길 기다릴까 우려스럽기도 하다. 여하간 경기도 학생인권조례 통과를 축하한다. 서울에서도 전북에서도 학생인권조례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경기도보다 더 좋은 학생인권조례를 아래에서부터 만들어갈 수 있기를.

 
(사진은 위에서부터 순서대로 학생인권조례 요구 피켓, 학생인권조례 정책협약식을 하는 곽노현 후보와 인권․교육활동가들, 서울 학생인권조례 제정운동 포스터, 전북 학생인권조례 제정운동 전단지)
 

Posted by 오승희

 ‘몬스터’(우라사와 나오키 지음)라는 만화가 있다. 제목부터가 ‘괴물’인 이 만화에는 진정으로 천재적이면서 잔혹한 살인자, 요한이 등장한다. 그러나 절대악인 요한을 추적하면서 드러나는 진실은, 그 요한조차도 ‘인간병기’를 만들어내려고 한 어른들의 실험에서 비롯된 괴물이라는 것이었다. 결국 이 만화에서 요한이 사실상의 자살로 사라진 후, 남겨진 질문은 이것이다. “괴물은 누구인가?”

 

괴물이 되어버린 가해자

 

사형, 종신형, 거세, 신상정보 공개, 전자발찌……. 최근에 아동 성폭력 범죄의 가해자에게 가해져야 하는 처벌이라면서 거론되는 것들이다. ‘조 아무개 씨’의 여성 아동에 대한 성폭력 사건이 TV 시사 프로그램을 통해 알려지면서 가해자를 비난하는 목소리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가해자에게는 인권이 없다”라면서 “그런 새끼들은 쳐죽여야 한다”라고 외치고 있다. “가해자에게 인권은 없다.”, “짐승만도 못한 놈” 같은 말들 속에 숨은 뜻은 무엇일까? 그건 아동 성폭력의 가해자(줄여서 가해자)는 자신들과 다른 사람, 아니 다른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가해자는 자신들과는 무관한 존재, 이해할 수 없으며 제거되고 박멸되어야 할 ‘괴물’들이다.

그러나 아무리 끔찍한 성폭력 가해자라 하더라도 그 사람들은 체포되어 감옥에 격리되기 전까지 이 사회 안에서 살아온 사람들이다. 범죄는 사회적인 사건이며, 끔찍한 사건의 가해자도 이 사회의 일부이다. 아동 성폭력과 성폭력에 대한 연구를 보자. 아동 성폭력 범죄 가해자들은 학력이 낮고, 자아존중감이 낮고, 성적 좌절을 많이 경험한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자신들의 열등감을 해소하기 위해 신체적/사회적 힘이 약한 아동을 대상으로 폭력을 저지르는 것이다. 뿌리 깊은 남성 중심적 문화와 음주에 관대한 문화도 원인이 된다. 애초에 남성으로서의 열등감을 해소하기 위해서 여성에게 성폭력을 가한다는 심리 자체가 남성 중심적 사회 문화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여성/아동의 사회적 지위가 높지 못하고 여성/아동이 약한 존재, 무력한 존재로 묘사되고 만들어지는 것 또한 하나의 원인일 것이다. (관련하여 더 자세한 내용은 한겨레21 제781호(2009.10.16.) 안수찬 기자의 「아동 성폭행범 처벌 ‘무겁게’보다 ‘확실하게’」를 참고하시라.)

 너무 많은 사람들이 사건의 사회적 맥락이나 원인들을 외면한 채, 그리고 평소에는 폭력들에 관대한 모습마저 보이면서, ‘비정상적인 것’들로 돌출된 부분들을 잘라내려고만 한다. 마치 이백 대, 삼백 대를 때린 교사들에게는 ‘부적격 교사’라는 딱지를 붙이면서 한 대, 다섯 대를 때리는 교사들에게는 관대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체벌은 학교의 폭력적인 시스템과 규제, 체벌에 관대한 문화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한 대를 때리든 이백 대를 때리든 체벌은 근절되어야 한다. 성폭력은 사회의 문화와 구조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30대를 강간하든 아동을 강간하든, 강간을 하든 성추행을 하든, 성폭력 과정에서 피해자가 입은 상해가 크든 작든, 성폭력은 근절되어야만 한다. 아동과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낮고 차별과 폭력, 성적 대상화에 노출되어 있는 이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가.

이러한 생각은 하지 않으면서 그저 조 아무개 씨를 죽여버려야 한다고 외치며 ‘가해자에게는 인권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심하게 말하면 위선적이다. 술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면서 자기 당 국회의원이 저지른 성폭력을 무마하려고 술잔을 깨는 퍼포먼스를 하며 성폭력에 관대한 모습을 보였던 한나라당 의원들이 성폭력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모습을 보라. 컴퓨터 앞에 앉아서 조 아무개 씨를 죽여 버려야 한다고 댓글을 달고서 바로 다음날에 성매매 업소에 가는 남성들, 여직원에게 성희롱을 하는 남자 상사들, 강간 포르노를 보면서 하악거리는 남성들, 소녀시대나 원더걸스의 ‘섹시함’에 속으로 야릇한 긴장감을 느끼면서 뮤직비디오를 보는 남성들이, 없을 것 같은가? 다시 한 번 묻자면, “괴물은 누구인가?”

 

아이들은 공주님이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아동 성폭력에 특히 더 분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신체적, 사회적으로 더 약자인 아동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더욱 더 비난받을 만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 사람들이 아동에 대한 다른 폭력보다 성폭력에 특히 더 거부감을 가지며 분노하는 이유, 그리고 아동이 아닌 경우에도 신체적으로 저항할 만한 힘이 없는 여성이나 장애인이 당한 성폭력보다 아동의 경우에 특히 더 분노하는 이유 등등…….

일단, 실제 그 사건에서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권력 관계가 어떤지를 떠나서, 피해자가 아동이라는 것만으로 우리는 더 많이 분노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그것을 종족을 보전하고자 하는 유전자 프로그램으로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근대 이후로 형성된 아동관도 한 몫 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아동은 교육받고 보호되어야 할 존재이며, 무력한 존재라는 아동관 말이다.

 그래서 이러한 ‘끔찍한’ 아동 성폭력 사건이 공론화될 때마다 가해자에 대한 비난과 동시에 아이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늘어간다. 보호자들의 불안감을 이용하여 위치추적 서비스나 CCTV 등을 다루는 업체들은 광고를 한다. 아이들의 휴대전화에 위치추적 서비스를 달고, 조금이라도 연락이 안 되거나 보호자(부모, 후견인, 교사 등)의 시야를 벗어나면 안절부절 못하는 어른들이 늘어난다. 안전을 생각하는 그 마음이야 잘 알겠지만, 그 결과는 아이들의 행동반경을 제한하고, 아이들에 대한 감시를 늘리는 것으로 나타나기 십상이다.

 

다른 한편으로, 아동 성폭력 사건에 분노하는 사람들 중에는 아동과 성을 연관짓는 것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그 사람들은 사건의 끔찍함에도 분노하지만, 아동을 대상으로 성욕을 느낄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가해자를 ‘괴물’ 취급하고, 아동을 성과 연관지어 생각하기를 꺼려한다. 아동은 성과 무관한 순수한 존재로 남아야 하며, ‘성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육체적 성을 얘기하기를 꺼려한 나머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성폭력은 영혼을 파괴하는 범죄다.” 성폭력은 지극히 신체적인 범죄인데 말이다.)

이런 태도가 아동을 성적으로 무력하고 무지한 존재로 만들고 성폭력 사건이 일어났을 때 사건의 매듭을 푸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든다는 것은 참으로 역설적인 일이다. 아동이 성적인 존재이자 주체일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고, 체계적이고 내실 있는 성교육이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에서는, 성폭력 피해를 입은 아이들이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을 명명하고 인식할 언어와 지식을 갖지 못하기 십상이다. 조 아무개 씨가 가해자인 이번 사건에서는 상해와 폭력의 정도가 심하여 피해 아동이 자신의 피해를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를 들어 작년에 대구의 초등학교에서 집단적으로 일어났던 성폭력 사건의 경우, 어떤 경우에는 성폭력의 피해/가해를 특정하기도 어려웠고 때로는 그것이 성폭력인지 여부를 가리기 어려운 측면조차 있었다. 사건의 당사자인 초등학생들이 자신의 경험을 명확히 규정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최소한 신체적인 측면에서 근력으로나 지구력으로나 아이들이 약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보호주의의 결과 아이들이 더욱 더 사회적인 약자로 인식되고 일방적으로 보호받아야 할 존재로 인식된다면, 또 아이들이 성에 대해 더 무지한 채로 남게 된다면, 그것이 과연 아이들에 대한 범죄나 폭력, 차별을 줄이는 데 얼마나 효과적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아이들의 삶을 완벽한 감시 하에 두고 아이들의 자유를 박탈할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다. 어째서 아동에 대한 폭력 사건이 공론화될 때마다, ‘피해자’라는 아이들이 자신들의 자유를 제한당하는 결과가 초래되는 것인지 이 불합리함은 참 설명하기 힘들다.

 

아이들 자신을 포함하여 이 사회의 모두가 해야 할 일은 성폭력 범죄 자체를 줄일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아닐까? 아동이 스스로를 지킬 힘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아이들이 성에 대해 더 많이 알고 더 잘 대처하고 성폭력 피해를 입더라도 스스로 그것을 이야기하며 극복할 수 있게 해야 하지 않을까?

아이들은 성에 살고 있는 공주님이 아니며, 아름다운 동화 속에 사는 존재도 아니다. 아이들은 이 사회에서 당신들과 같이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아동 성폭력 사건은 어느 설명 불가능한 괴물이 우리가 지켜줘야 할 순수한 공주님을 납치한 동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 이 사회의 현실이며, 괴물을 쓰러뜨리고 공주님을 성 안에서 보호함으로써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 공현 ]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여성주의팀)

Posted by 오승희

  청소년인권활동이란 걸 하고 있다.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불편한 것들’을 인식하게 되었고, 처음으로 ‘미친 학교를 혁명하라’ 라는 집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 날의 경험은 나를 흔들어놓았다. 그러다 이렇게 저렇게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리고 학교를 그만두면서, 지금과 같은 활동을 하게 된 것 같다. 그렇게 청소년인권은 어느새 내 삶의 중심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학생인권은 내가 하는 청소년인권운동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청소년들의 대부분이 학교라는 공간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으니 어찌 보면 안타깝지만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다. 학생인권은 학교 안 청소년들의 인권을 말하는 것인데, 두발자유나 체벌금지나 또는 강제야자 반대 같은 게 대표적인 목소리이지 않을까 싶다.

 

성별에 따른 폭력의 강도 차이

 

이제 1년 조금 넘게 활동을 하면서 그 동안 캠페인이든, 집회든, 청소년의 목소리를 담은 문화제이든 여러 가지 활동을 통해 학교가 정해놓은 선 밖으로 나온 청소년들을 꽤 많이 만났다. 처음엔 무조건 많이 만나는 게 중요했다. “청소년들의 직접행동이 중요해요!” 라고 외치면서 여기저기 얘기하곤 했다. 그러다가 요즘엔 점점 어떤 ‘현상’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학생인권에 대해 이야기할 때 여성 청소년들보다 남성 청소년들의 움직임과 분노가 더 크고 더 많은 비율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서명을 받거나 캠페인을 하거나 할 때는 적극적인 액션이 다들 비슷비슷하긴 한데, 행동을 고민하고, 불만을 더 크게 터뜨리는 쪽은 남성청소년들이 대부분이었다는 ‘현상’이다. 왜 그럴까? 왜 남성청소년들이 더 적극적이고 더 많을까?

기억을 더듬어보면 확실히 남성청소년들(앞으로는 남청) ‘신체적인 폭력'에 노출되기가 더 쉬웠던 것 같다. 어렸을 때, 친구끼리(남자애들끼리) 때리고 맞고 하고서 집에 들어오면 "뚝! 울지 마!" 하면서 남자애들은 싸워가면서 크는 거라고 말하곤 하는 상황을 우리는 쉽게 떠올릴 수 있다. 반대로 어느 누구도 여자애들이 서로 치고 박고 때리고 하면서 크는 거라는 얘길 들은 적이 없을 것이고, 그렇게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런 일들은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교사들이 체벌을 행할 때, 여성청소년들(앞으로는 여청)은 상대적으로 더 살살 때리기도 하고, 봐주기도 한다. 똑같은 잘못-이라고 규정되는 것들-이었는데, 나는 손바닥을 맞고, 나와 같은 반의 남자애는 허벅지를 '거칠게' 맞았다. 왜 그랬을까? 답이 나오긴 한다. 왜냐하면 남자애들은 강하게 커야 하니까. 어릴 때부터 거칠고, 강하게 커야 '진짜' 남자 소리 듣지.

 그래서일까, 남청들의 적극적인 액션은? 더 많이 규제 당하고, 더 많이 잡히고, 더 많이 맞기 때문에? 더 불만이 많이 쌓이기 때문에?

 

체벌은 남성청소년들 사안일까

 

이렇게 보면 학생인권의 주요 이슈 중 하나인 ‘체벌’은 여청들의 이야기라고 하기엔 거리가 있는 것도 같다. 확실히 여청들은 상대적으로 체벌에서 비껴나 있다. 남청들이 100대를 맞는다고 하면 여청들은 40대를 맞는다고나 할까. 그래서 남청들은 여기에서도 불만을 표하곤 한다. “여학생들은 왜 살살 때리냐”, “여학생은 왜 덜 잡냐”, “남녀 차별이다” 등등. 체벌의 강도나 횟수로만 보면 맞는 말 같기도 하다.

하지만 과연 여청들은 남청들보다 더 나은 지위를 누리고 있는 걸까? 여청들에게는 체벌을 안 당하는 대신, 그 체벌을 당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여성이기 때문에 당하는 폭력이 존재한다. 광주의 한 학교에서는 교사가 벌로 한 여학생에게 치마를 벗고 교실을 한 바퀴 도는 것을 시켰다고 한다. 여청들에게는 이처럼 ‘수치심’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벌’을 주곤 한다. 거칠고 강하게 자라기를 요구받는 남자애들과는 달리 착하고 부드럽게 자라기를 요구받는 여자애들을 팰 순 없으니, 몸 처신 잘하라는 무언의 압박이 끊임없이 존재한다. ‘체벌 대신 성추행을 당한다’, ‘더 많은 통제를 당한다’라고 하면 너무 비약일까나.

성별 권력이 인정하기는 싫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한, 더없이 폭력성이 드러나는 공간인 학교에서, 비록 ‘학교'라는 특수성-교육의 장이라든지, 하는 겉으로만 좋아 보이는 것 때문에 여성/남성이 아닌 ‘학생'으로써 입시경쟁의 문제가 주로 부각되는-덕분에 묻혀있으면 묻혀있지 그것이 덜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성역할은 구분되어 왔다. ‘성'의 구분이 아니라, 성‘역할'의 구분이다. 철저하게. 이런 성역할, 거기다 청소년을 연결해볼까? 성역할의 구분뿐만 아니라 그 역할을 잘 수행해내게 하기 위한 기대도 확 커진다. 청소년은 기대 받는 ‘자원'들 아닌가. 이 사회를 잘 굴러가게 하기 위해 틀에 맞춰진 좋은 여성이, 좋은 남성이 되길 우리는 기대 받는다. 그래서 여청과 남청은 다른 방식으로 통제당하고, 다른 폭력을 몸에 각인하고 살게 된다.

 

체벌에 따른 성역할 고정과

학생들 간 분리 효과

 

체벌은 태초부터(!) 폭력이다. 학교 안 남청들에게만 더 많이 가해져서, 차별이어서가 문제인 것이 아니다. 체벌로 신체적인 폭력을 가하는 것 자체가 문제이고, 그런 폭력을 겪으면서 여성성과 남성성의 성역할을 더욱 명확하고 단단하게 만드는 힘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문제이다. 뿌리 깊은 가부장제로 먹고 살아온 이 사회를 알게 모르게 유지시키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학교는 그런 점을 미처 보지 못하게 만들고, 누가 더 맞고 누가 덜 맞았는지 치사한 차별-평등 논리만 오가게 된다. 그래서 더 무시무시하다. 그곳에서 남성청소년들은 여성청소년을 공격한다. “나도 맞았으니, 그리고 나도 걸렸으니, 너도 맞아야 하고 걸려야 해.” 라는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도록 이끄는 곳이 학교다.

폭력은 학교 내 권력질서에서 발생한다. 벌을 받는 일은 학교에서 벌어진다. 그렇기에 여학생들이 남학생들처럼 똑같이 맞는다고, 벌을 받는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다. 당장은 더 맞고 덜 맞는 차이가 보일지 몰라도, 결국 그런 차별 대우(?)의 피해자는 여학생 남학생 모두이다. 벌 받는 건,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건, 어떤 방식이건, 매한가지다. 남청들이여, 여청들과 손을 잡을지어다. 당신들의 고통은 여성들이 그만큼의 고통을 받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청소년들이여, 꾸준히 폭력을 행하고, 벌을 줌으로써 청소년들을 통제해야한다는 생각이 깊이 박힌 낡은 학교에, 성역할을 깨지 못하도록 단단하게 만들려는 무시무시한 의도를 가진 이 사회에, 함께 손을 잡고 어퍼컷을 날릴지어다.

 

[ 난다 ]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여성주의팀)

Posted by 오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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