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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6.07 [투덜리즘] 미성숙의 굴레 by 오승희

첫 섹스의 기억

내 첫 섹스는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을 코앞에 둔 어느 날이었다. 학생이었던 나는 부모님과 한 집에 살고 있었고, 나보다 1살이 많았던 상대방 역시 그랬다. 그래서 내 첫 경험은 아플 수밖에 없었다. 학생 신분이었던 나와 상대방에게 허락된 공간은 기껏해야 ‘아파트 계단’ 혹은 ‘빌라 옥상’이었고, 피임의 중요성은 충분히 알았지만, 교복을 입은 우리에게 ‘콘돔’을 팔려는 사람은 없었다. 빌라 옥상과 같은, 청결하지도 안전하지도 않은 곳에서, 누가 볼까 벌벌 떨며 나눴던 관계의 끝은 ‘임신’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내 첫 섹스는 참 많이도 아팠다. 그 후에도 다른 사람과 몇 번 더 관계를 맺었다. 요령껏 콘돔을 구할 수는 있었지만, 부모님께 섹스를 했다는 사실을 들켰다. 온갖 폭행과 폭언을 견뎌야 했다. 10대 시절 나의 섹스는 늘 그렇게 아팠다. 만약 그때의 나에게 타인과 안전하게 섹스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 허락되었다면 어땠을까. 청소년에게 독립적이고 경제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공간들이 더 많이 제공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10대의 임신에 대한 우려가, 안전하게 피임을 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의 제공으로 이어졌다면 어땠을까. 부모님께 혹시라도 들킬까 섹스를 하고 난 후에는 방에서 나오는 것조차 못했던 두려움이, 나의 삶에 대한 공감과 지지로 이어졌다면, 그랬다면 내 섹스는 그리 아프지 않았을 것이다. 


첫 투표의 기억

생애 처음으로 대통령 선거 투표를 하면서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선거의 결과는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참담하고 암울했지만, 그 이전에, 선거와 투표라는 것 자체가 나의 10대 시절 섹스에 얽힌 아프고, 억울하고 서러운 기억들과 오버랩 되었다. 투표를 할 수 없는 ‘미성년자’의 신분에서 바라본 선거와 투표는 어른들만의 잔치였다. 더 나은 대한민국을 만드는 것도, 개개인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정책과 공약을 결정하는 것도, 우리를 대변할 수 있는 대표자를 뽑는 것도 모두 어른들만 가능했다. 얼마나 억울하고 서러운가! 유권자는 ‘성숙하고, 사회적으로 공인된’ 성인에게만 주어지는 특권 같은 것이며, 투표라는 행위는 유권자들만 행할 수 있는, ‘성스러운’ 어떤 것으로 존재한다. 섹스도 그렇지 않은가? ‘성숙한’ 이들의 영역에 포함되지 못한 청소년들이, 그 ‘성스러운 행위’를 요구하는 순간, 그것은 어떤 금기이자 위험한 행동으로 간주되어 버린다. 자라나는 아이들은 정치적 이념에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지겹도록 들었고, 그래서 투표란 게 대단한 것인 줄 알았다. 정치는 더 대단한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내 첫 투표는 참 별 거 아니었다. 정치는 더 별 거 아니었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쓰는 것도 정치다. 이 글을 읽는 것도 하나의 정치다. 세상에 정치적이지 않은 것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 청소년도 정치의 중심이자 주인이 되겠다는 외침은 그저 공허할 뿐이다. 내 몸의 주인이자 결정권자가 되겠다는 외침 역시, 너무나 당연한 만큼 공허하고 허무하다. 이 간극을 어떻게 좁혀야 하나. 섹스든 정치든 혼자서 다 해먹으려는 이 욕심쟁이들아!


미성숙한가 미성숙해지는가

나는 청소년에게만 금지된 모든 것들을 청소년 역시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술과 담배가 몸에 나쁜 것은 맞지만, 그것 역시 청소년들이 선택하고 결정하고 책임질 문제이다. 아울러 어떤 공부를 할 것인지, 어떤 정치인을 뽑을 것 인지, 혹은 어떤 삶을 살 것인지- 그 모든 것들을 청소년들이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청소년들이 스스로 무엇을 결정하기도 전에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하고 강요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이다. 청소년이 행하는 행위에 대한 가능과 불가능이 존재하는 현실 이면에는 미성숙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있다. 


청소년은 ‘미성숙’하다는 것, 그리고 ‘미성숙한 이들’의 권리는 제한 당해도 마땅하다는 전제는 이처럼 청소년들의 현실을 비참하게 만든다. 내 18살의 섹스가 ‘죄’였고, 투표가 ‘불가능’이었듯 말이다. 피부색으로, 성별로, 장애의 유무로, 신분과 같은 요인으로 한 개인의 사회적 위치가 결정되고 차별의 근거가 되는 것처럼, 나이에 따른 차별도 분명 존재한다. 나이가 어리면 누군가의 보호와 통제가 있어야 하며, 스스로 무언가를 결정하기엔 경험이 부족하다고들 말한다. 그렇기에 청소년은 실수할 권리나 스스로 성찰하고 발전해 볼 기회도 박탈당한다. 많은 청소년들을 옭아매고 있는 굴레다. 우리 사회가 이 과정들을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혹은 강요하면서 외면해버린 질문들이 있다. 보호와 통제를 핑계로 청소년들의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 온당한지, 어떤 결정을 하게 되었을 때 실수할 권리마저 ‘그럴 줄 알았다’는 조롱으로 빼앗아 버린 것은 아니었는지, 그리고 그 실수들을 통해 성찰하고 반성하며 마침내 ‘성숙해질 기회’조차 밟아버린 것은 아닌지, 그렇게 ‘미성숙’을 우리 사회가 재생산 해내고 있지는 않은지. 지금껏 우리사회는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답은커녕, 사회와 학교, 또 많은 기성세대들은 미성숙의 굴레를 생산해내는 주체가 되지는 않았는가? 


김 여사의 교훈

잊을 만하면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오는 수많은 ~녀의 이야기를 한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일명 ‘김여사 사건’도 하나의 사례였다. 한 여성운전자의 차에 학생이 치이는 장면이 담긴 블랙박스 영상이 공개되면서, 여성운전자들 전반에 대한 비난이 거세게 일었다. 이 현상에 대한 어느 인터넷 기사는 이렇게 지적했다. 그 사고를 일으킨 운전자가 ‘남성’이었다면 과실이나 자동차의 고장, 혹은 사건의 전후사정을 살피며 사건의 원인을 찾지만, 여성이면 근본적인 원인 보다는 ‘여성’이라는 사실부터 비난하고 본다는 것이다. 이 차이는 여성과 남성이 가지는 사회적 지위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글쓴이는 지적했다. 여성이 남성에 비해 사회적으로 약자이며, 만만한 상대이기 때문에, 이런 만만한 상대를 욕하고 비판하며 비겁한 정의감을 느끼려는 욕구가 이 ‘김여사 현상’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김 여사의 처지와 청소년의 처지는 꼭 닮아있다. ‘개념녀’와 ‘기특한 10대’의 불편함 역시 꼭 닮아있었다. 김 여사는 ‘여성’이었기에 만만했다면, 청소년은 ‘10대’이기에 만만한 것 이다. 그렇기에 같은 ‘죄’라도 그 무게는 확연히 다르다. 어떤 범죄를 일으킨 대상이 10대라면 그 앞에는 꼭 ‘무서운’, ‘겁 없는’과 같은 수식어가 붙지만, 나는 단 한 번도 ‘무서운 40대’라는 제목의 기사를 본 적이 없다. ‘기특한 40대’라는 소리도 못 들어봤다. 비겁한 사회다. ‘김여사’가 가진 정체성을 약점 잡아 공격해 상처를 입히면서까지 얻고 싶었던 그 무엇이 ‘비겁한 정의감’이었다면,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보호와 통제를 강조하며 미성숙의 굴레를 덧씌워 당신들이 누리고자 했던 것은 결국 ‘미성숙한 성숙’이다.


차별은 이렇게 다양한 가면을 쓰고 누구에게나 행해질 수 있다. 그렇기에 ‘그 누구도’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움직임의 중심에는 청소년이 있다. 그리고 그들의 절박한 외침이 있다. 사회에서 가장 ‘아랫것’ 취급을 받는 이들도 차별 받지 않는 세상이야말로 정말 ‘차별 없는 세상’이니까. 툭하면 무시당하고 찌질하다는 대접을 받는 이들이 온전하게 고귀한 존재로써 인정받을 수 있는 세상이 정말 ‘평등한 세상’이니까. 미성숙하고 불완전하다 여겨지는 그들이 스스로 성숙해지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약 없이 보장받을 수 있는 세상이 정말 ‘성숙한 세상’이니까. 그런 세상이, 나이 어린 그들도, 성소수자인 그들도, 장애가 있는 그들도, 가난한 그들도, 여성인 그들도 존엄하세 숨 쉬며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니까. 

Posted by 오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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