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중순, 인터넷은 또 다른 심의제도의 등장으로 ‘멘붕’에 빠졌다. 영상물등급위원회가 8월 17일부터 모든 뮤직비디오를 대상으로 사전심의를 시작하겠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 뮤직비디오는 돈을 받고 팔지 않는 이상, 무료로 시청자들에게 제공되기 때문에 사전심의의 대상이 아니었다. 아니, 심의를 받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방송사를 통해 방송되는 뮤직비디오는 각 방송사별 자체 심의를 받고, 현재 음악 심의를 담당하는 여성가족부 산하 청소년보호위원회에서 이미 사후심의를 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국회에서 의원들이 예외조항을 만들어 뮤직비디오를 반드시 심의를 받아야지만 공개할 수 있는 대상으로 바꾼 것이다. 이유는 참 간단했다. 폭력적이거나 선정적일 수도 있는 뮤직비디오에서 청소년을 ‘보호’해야 한다!


누군가는 이 심의제도에 길길이 날뛰면서 뮤직비디오 심의는 셧다운제에 이은 이명박 정권의 문화 말살 시도라면서 이명박과 새누리당을 열렬히 깠지만, 애석하게도 그건 반쪽짜리 비난이었다. 이 조항이 포함된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 개정안은 당시 민주당(현, 민주통합당) 의원들도 공동으로 발의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이 법이 통과될 당시 본회의에 참여한 국회의원 중 기권표를 던진 단 5명을 빼고 민주당, 한나라당, 통합진보당, 자유선진당 할 것 없이 모두 찬성했다. 심지어는 셧다운제에 반대해 몇몇 서브컬쳐 언론에서는 게임계의 희망이라는 소리를 들은 민주당의 모 국회의원도 군말 없이 찬성표를 던졌다. 그렇다. 어떤 정당이든, 어떤 이념을 가진 사람이든 대다수의 국회의원들은, 더 나아가서 이 사회의 구성원 대부분은 ‘청소년 보호’를 위해서라면 어떤 규제라도 반길 사람이라는 사실을 뮤직비디오 심의 안건의 사실상 만장일치 국회 찬성으로 입증된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심의의 근간인 청소년보호법도 비슷한 방법으로 성립되었다. 지금 새누리당의 전신이자, 전두환이 만든 민주정의당의 후신인 신한국당과 지금 민주통합당의 전신이고, 김대중이 만든 정당이었던 새정치국민회의가 비슷한 시기에 같은 이름의 법안을 발의했고, 비슷한 부분이 많아서 국회에서 이 두 개의 안을 합친 뒤 무려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다른 부분이 뭐가 있었냐고? 정말 사소한 부분이었다. 법안 목적에 신한국당은 ‘자유민주주의 증진’을 운운했고 새정치국민회의는 ‘민주시민 육성’을 운운했다. 하지만 두 정당이 내놓은 법안 모두 ‘청소년 보호’라는 말이 들어갔으니 ‘유해한 요소’로부터 청소년을 ‘보호’하자는 생각은 여당이든 야당이든, 독재 세력이든 민주화 세력이든 할 것 없이 같았던 셈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심의제도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좀 나을까? 딱히 그렇진 않다. 정말 소수의 몇몇 사람을 제외하면, 심의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는 대다수의 문화 업계 종사자들이나 평론가들은 표현의 자유와 산업에 미칠 피해를 근거로 이러한 심의에 반대를 한다. 표현의 자유, 좋다. 산업 피해,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할 수 있는 발언 중 하나다. 하지만 왜 정말 근본적인 문제인, ‘청소년의 주체성이 고려되지 않는 정책’이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일까? 정말 중요한 문제를 고려하지 않는 상황에서라면 대다수의 심의 반대 운동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 1996년의 청소년보호법이 그랬고, 최근의 셧다운제가 그랬다. 뮤직비디오 심의 반대 운동도 영상물등급위원회 측에서 유예 기간을 마련하고, 유튜브(Youtube)같은 해외 동영상 스트리밍 사이트를 이용하면 법을 회피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한때 뜨겁게 달아오르던 흐름이 어느새 쏙 들어갔다. 결국 심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청소년 문제와 연계하지 않고 업계의 이익과 향유의 측면에서만 바라보고 움직였던 것이다.


어찌 보면 가장 끔찍한 것은, 심의 시행으로 인해 표현의 자유가 위축되는 게 아니라, 청소년과 관계된 정책임에도 불구하고 심의를 추진하려는 자든, 심의를 반대하는 자든 그 누구도 청소년의 주체성에 대해서 생각을 하거나, 심지어는 청소년 운동과 연계지어 행동하려는 시도조차 없다는 현실이다. ‘청소년 보호’라는 명목으로 심의를 추진하는 자들은 그나마 솔직한 편이다. 심의 목적에서부터 자신들이 청소년을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로 보지 않고, 수동적이고 미성숙한 존재로 여기고 있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심의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어떠한가. 표현의 자유를 내걸면서, 가장 심각하게 표현과 향유의 자유를 침해당하는 청소년에 대해서는 시선을 별로 기울이지 않는다. 두 세력 모두 청소년을 부차적인 존재로 여길 뿐이다.


그런 점에서, 심의의 문제를 단순히 보수적인 정권의 문제로만 한정지으려는 시도는 얼마나 위험한가. 어떤 사람들은 문제의 책임을 모조리 이명박 정권에 전가하려 하지만, 소위 ‘민주화 정권’인 김대중 정권이나 노무현 정권 시기에도 심의 문제는 그대로였다. 2011년에 법이 통과된 이후 줄창 까이는 셧다운제도 2006년 노무현 정권 후반기에 처음 정부에서 추진한 정책이었다. 내부 조율 등이 늦어져 지금에서야 추진된 것이지, 시기가 잘 맞았으면 노무현 정권 말에 셧다운제가 통과될 가능성이 높았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명박 정권 시기에 셧다운제가 통과되긴 했지만, 국회에서 해당 법안을 최종적으로 심사하는 위치에 있는 국회의원은 민주당 소속이었다.) 심지어는 전교조, 참교육학부모회, 환경운동연합 등 소위 ‘진보적 운동단체’들이 참여하고 있는 ‘아이건강국민연대’라는 곳에서는 ‘스마트폰 중독과 폭력에서 청소년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학교 내에서 스마트폰 소지를 금지하는 법안을 발의하려고 한다. 후에 전교조는 이 법안에 공식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고 해명을 하긴 했지만, 어쨌든 문화 심의나 규제 문제가 단순히 어떤 정치적 성향을 가지고 있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졌다.


한국 사회에서, 청소년은 문화를 향유할 때 주체성을 가지고서 향유할 수 없다. ‘성숙하고 주체성을 지닌’ 어른들의 손에 판단의 권한을 맡겨야만 비로소 향유할 권리를 가진다. 다른 나라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한국에서는 어른에게 판단 권한을 강제적으로 맡기는 절차를 법적으로 규정해, 사실상 공식적으로 이러한 절차에서 벗어나거나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길을 막아놓았다. 그리고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 역시, 청소년의 문제 제기는 뒷전으로 놓은 채 표현의 자유니, 문화 산업에 피해를 주느니 같은 이야기만 반복했다. 그런 점에서 셧다운제 반대 운동은 지금까지 한국에서 있었던 문화 규제 반대 운동 중에 그나마 청소년의 입장에서 바라본 운동이었다. 비록 게임업계의 반대 운동과 청소년 차원에서의 반대 운동이 합치지 않고 따로따로 벌어졌지만, 청소년이 셧다운제의 한 축이었던 여성가족부 앞에서 밤샘 농성 시위를 하고 청소년의 이름으로 헌법소원을 신청하는 등 청소년이 주체성을 갖고서 문제에 대응했던 최초의 움직임이었다.


앞으로도 한국에선 ‘청소년 보호’라는 목적을 내걸고 청소년의 주체성을 무시하고 미성숙 담론을 내거는 심의와 규제를 추진할 것이다. 어떤 정당이 집권하든, 누가 당선되든. 하지만 앞으로도 지금처럼 ‘표현의 자유 침해’만을 내걸고 반대를 하면 그 운동이 지속되긴 어려울 것이다. 청소년은 미성숙한 존재가 아니고, 나름대로의 주체성을 가진 존재이다. 청소년 운동과 결합하거나 실질적인 피해를 입는 대상인 청소년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 운동은 공허한 발자취만 남길 뿐이다. 그러니 한국의 개떡같은 문화 심의와 규제가 짜증나는 사람들이여, 정부 욕을 하기 전에 일단 청소년 운동에 시선을 돌려라.


<스카이젯>

Posted by 오승희


생각해보면 그때는 참 단순했던 것 같다. 그 날은 날씨도 더워 수업을 들을 기분도 나지 않는 날이었다. 그런 와중에 들리는 학생부장의 교내 방송. 동사무소에서 주민등록증 제작을 하러 학교로 오셨습니다. 수업을 중단하고, 부르는 반 순서대로 차례차례 과학실로 가서 한 줄로 서서 기다리세요. 정말 기쁜 소식이었다. 먼저 재미도 없는 수업을 듣지 않아도 되니까 기뻤고, 그 다음으로는 내가 드디어 ‘성인’이 된다는 소식에 기분이 좋았었다. 아직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마당에 민증이 나와도 딱히 할 일도 없는데, 그 때는 그게 왜 이렇게 좋았는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동사무소 직원이 건네준 종이에 내 이름과 주소, 주민등록번호를 적고 순순히 양 손가락에 인주를 발라 지문을 찍었다. 이 세상에 주민등록번호를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느니, 지문 날인을 거부해서 체포되었던 사람도 있다느니 같은 소리는, 한참 나중에야 진지하게 생각해봤던 일이다.


왜 나를 포함한 아이들은 그렇게 주민등록증을 만든다는 사실에 두근거렸을까? 사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주민등록증을 만든다는 행위는 정부에게 ‘지문’이라는, 매우 중요한, 그리고 고유한 생체 개인정보를 오직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는 이유로 넘겨주는 일이고, 더 나아가서는, 그런 개인정보를, 조금만 의심스러워도 경찰에게, 심지어는 편의점 알바 같은 생판 모르는 남에게 유출할 가능성을 감수하고 보여주는, 그런 용도로 쓰일 수 있는 여지를 만드는 일이다. 단순히 내 이름과 사진, 주소가 박힌 카드를 받는다는 사실이 신기해 그랬던 걸까? 그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랬으면 학생증에 만족을 하거나 동사무소로 직접 찾아가서 청소년증을 만들었겠지.(사실 그 때는 청소년증이라는 게 있는 줄도 몰랐다.) 이유는 무궁무진하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주민등록증이 자기가 성인으로 한 발짝 나아갔다는 것, 다시 말해 이 지긋지긋한 학교생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된다는 것의 상징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주민등록증을 만들고 성인이 되면 평소에는 꿈도 못 꾸던 술도 살 수 있고, 담배도 살 수 있고, 술집에 들어가서 마음껏 술과 안주를 주문할 수도 있다. 게다가 엄마 아빠 주민등록번호를 몰래 도용해서 성인 컨텐츠도 즐길 수 있다! 도저히 기뻐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씁쓸하다. 한국에 사는 청소년은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자유롭지도 않고, 자신이 주체가 되어 어떤 일을 할 수 없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청소년의 현실이, 주민등록증을 만드는 행위를 심각하고 중대하게 받아들이는 대신, 매우 홀가분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행위에 동참하게 만든다.


▲ 성인이 되면 할 수 있는 것(...)

(2012년 9월 25일 보건복지부 앞, 대학 캠퍼스내 금주조치에 항의하는 음주시위에서)


청소년은 성인이 되기 전까지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다. 앞서 말했던 술-담배를 즐길 수 없는 것은, ‘표면적으로 봤을 때’ 할 수 없는 일이다. 만약 학교와 가정의 억압한 환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작정 가출을 했다고 생각해보자. 어찌 보면 청소년이 성인이 되기 전에 스스로 독립을 선언한 것인데, 그 청소년은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할까. 최소한 한국 사회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그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청소년이 ‘미성숙’해서가 아니다. 한국 사회가, 청소년이 주체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행위를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자립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려고 해도, 근로기준법에 서는 청소년은 친권자의 동의를 받지 않으면 노동을 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에는 근로기준법 같은 노동의 기본적인 권리 따윈 가볍게 무시하는 쿨한 사장님이 전국에 널려있으므로 어떻게 알바 자리를 찾아, 최저임금도 지키지 않고 주휴수당은 ‘원래 떼먹는 것’으로 인식하는 사장 밑에서 어찌어찌 돈을 벌었다고 치자. 그렇다고 해도 중학교 3학년이 되지 않으면 은행에 돈을 저축할 수 없다. 은행법에서는 만 14세 전의 청소년이 계좌를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친권자의 동의를 받아야 만들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은행에 돈을 저금하는 대신 자기만의 비밀 장소에 꼭꼭 돈을 모아 그럭저럭 하루하루 살만큼 돈을 모았다고 쳐보자. 사람은 돈만으로 살 수 없다. 인간 생활의 세 가지 기본 요소인 ‘의식주’의 ‘주’(住), 다시 말해 집이 필요하다. 그러나 민법에서는 청소년이 부동산을 거래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합법적인 경로로는 청소년이 자신의 명의로 집을 빌려 거주할 수 없는 것이다. 심지어 숙박업소나 찜질방 같은 곳에 잠깐 묵어갈 수도 없다. 청소년 보호법상, 찜질방은 밤 10시 이후에는 청소년이 이용할 수 없고, 숙박업소에는 아예 들어갈 수가 없다. 가출이 문제가 아니라 여행, 혹은 대학 입시를 치르러 먼 지역으로 갔을 때에도 묵을 데가 없다는 얘기다. 종합해보면 청소년은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돈도 벌 수 없고, 그 돈은 안전한 곳에 맡길 수도 없고, 자신을 보호해줄 집도 구할 수 없다. 가정과 학교에서 시키는 대로, 규정하는 대로만 청소년은 살 수 있다고, 법이 규정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러한 법조항이 처음부터 ‘청소년의 자립을 막기 위해’ 제정되지는 않았다. 경제면에 종종 등장하는 ‘만 5세 아이가 주식 부자가 되었다’는 기사에서 보듯이, 어린 아이 명의로 거래를 해서 세금을 회피하려는 행위를 피하기 위해 청소년의 금융 거래를 제한하는 조항이 만들어졌다. 또한 청소년의 노동에 부모의 동의를 요구하는 것은, 지금은 많이 줄었지만 과거에 만연했던 아동 노동을 예방하기 위해서 삽입한 조항이다. 하지만 이를 감안한다 해도, 여기에는 청소년에 대한 중대한 편견이 포함되어 있다. 바로 청소년은 혼자서, 주체적으로 이러한 일들을 할 수 없는 ‘미성숙한’ 존재고, 만약 한다고 해도 이는 어른들에게 ‘이용당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전제다. 차명계좌만 해도, 청소년뿐만 아니라 금융실명제가 확립된 지금도 다른 사람 명의를 도용해서 돈세탁을 하는 일이 종종 있는데, 왜 어른의 계좌 개설은 청소년만큼 규제하지 않을까? 부동산 거래 역시 마찬가지다. 또한 고용노동부나 각 지역의 노동청은 실제 청소년이 어떤 환경에서 노동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서, 청소년의 노동 행위에 친권자 동의만 받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학교와 가정만이 청소년을 제약하지 않는다. 청소년을 주체적인 존재로 보지 않는 사회가 궁극적으로 청소년을 옥죄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청소년에게 민증을 만드는 일은 곧 자신이 자유로워지는 것과 동일한 행위로 받아들여진다. 민증을 만드는 것이 자기에게 궁극적인 자유를 주지 않고 오히려 국가에 자신을 예속시키는 일이라는 사실은, 청소년에게 중요하지 않다. (그 전에 정부에서 이를 말하지도 않고, 이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소수다.) 성인이 되는 순간 당장 이것도 할 수 있고, 저것도 할 수 있는데, 그것을 보장하는 증이 곧 자기한테 주어진다는 데 어떻게 그 열망을 막을 수가 있을까?


하루가 멀다 하고 인터넷 어느 사이트에서 주민등록번호가 유출됐다느니, 어디서 뭐가 도용됐다느니 하는 보도가 터져나오지만, 다들 그러려니 하는 눈치다. 어쩌면 한국 사회에서 주민등록제도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많은 비판을 듣거나 제대로 퍼지지 않는 것은, 한국인 전체의 25%를 차지하는 청소년이 주민등록증을 ‘해방’과 ‘자유’로 받아들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청소년의 인권이 계속 억압받는 상황 속에서 정부와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이에 별다른 문제를 느끼지 못하고 있고, ‘민증’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전국 곳곳의 학교와 동사무소에서 지문날인을 거쳐 발급되고 있다. 이렇게 공고한 구조 속에서 한국의 청소년은 오늘도 주체성을 얻지 못하고, 정보인권을 훼손하는 주민등록제도는 많은 비판을 얻는 와중에도 계속 굴러간다. ‘민증’은 청소년을 자유롭게 하지 않는다. 대신 또 다른 억압의 길로 인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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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오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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