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중순, 인터넷은 또 다른 심의제도의 등장으로 ‘멘붕’에 빠졌다. 영상물등급위원회가 8월 17일부터 모든 뮤직비디오를 대상으로 사전심의를 시작하겠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 뮤직비디오는 돈을 받고 팔지 않는 이상, 무료로 시청자들에게 제공되기 때문에 사전심의의 대상이 아니었다. 아니, 심의를 받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방송사를 통해 방송되는 뮤직비디오는 각 방송사별 자체 심의를 받고, 현재 음악 심의를 담당하는 여성가족부 산하 청소년보호위원회에서 이미 사후심의를 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국회에서 의원들이 예외조항을 만들어 뮤직비디오를 반드시 심의를 받아야지만 공개할 수 있는 대상으로 바꾼 것이다. 이유는 참 간단했다. 폭력적이거나 선정적일 수도 있는 뮤직비디오에서 청소년을 ‘보호’해야 한다!


누군가는 이 심의제도에 길길이 날뛰면서 뮤직비디오 심의는 셧다운제에 이은 이명박 정권의 문화 말살 시도라면서 이명박과 새누리당을 열렬히 깠지만, 애석하게도 그건 반쪽짜리 비난이었다. 이 조항이 포함된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 개정안은 당시 민주당(현, 민주통합당) 의원들도 공동으로 발의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이 법이 통과될 당시 본회의에 참여한 국회의원 중 기권표를 던진 단 5명을 빼고 민주당, 한나라당, 통합진보당, 자유선진당 할 것 없이 모두 찬성했다. 심지어는 셧다운제에 반대해 몇몇 서브컬쳐 언론에서는 게임계의 희망이라는 소리를 들은 민주당의 모 국회의원도 군말 없이 찬성표를 던졌다. 그렇다. 어떤 정당이든, 어떤 이념을 가진 사람이든 대다수의 국회의원들은, 더 나아가서 이 사회의 구성원 대부분은 ‘청소년 보호’를 위해서라면 어떤 규제라도 반길 사람이라는 사실을 뮤직비디오 심의 안건의 사실상 만장일치 국회 찬성으로 입증된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심의의 근간인 청소년보호법도 비슷한 방법으로 성립되었다. 지금 새누리당의 전신이자, 전두환이 만든 민주정의당의 후신인 신한국당과 지금 민주통합당의 전신이고, 김대중이 만든 정당이었던 새정치국민회의가 비슷한 시기에 같은 이름의 법안을 발의했고, 비슷한 부분이 많아서 국회에서 이 두 개의 안을 합친 뒤 무려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다른 부분이 뭐가 있었냐고? 정말 사소한 부분이었다. 법안 목적에 신한국당은 ‘자유민주주의 증진’을 운운했고 새정치국민회의는 ‘민주시민 육성’을 운운했다. 하지만 두 정당이 내놓은 법안 모두 ‘청소년 보호’라는 말이 들어갔으니 ‘유해한 요소’로부터 청소년을 ‘보호’하자는 생각은 여당이든 야당이든, 독재 세력이든 민주화 세력이든 할 것 없이 같았던 셈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심의제도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좀 나을까? 딱히 그렇진 않다. 정말 소수의 몇몇 사람을 제외하면, 심의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는 대다수의 문화 업계 종사자들이나 평론가들은 표현의 자유와 산업에 미칠 피해를 근거로 이러한 심의에 반대를 한다. 표현의 자유, 좋다. 산업 피해,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할 수 있는 발언 중 하나다. 하지만 왜 정말 근본적인 문제인, ‘청소년의 주체성이 고려되지 않는 정책’이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일까? 정말 중요한 문제를 고려하지 않는 상황에서라면 대다수의 심의 반대 운동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 1996년의 청소년보호법이 그랬고, 최근의 셧다운제가 그랬다. 뮤직비디오 심의 반대 운동도 영상물등급위원회 측에서 유예 기간을 마련하고, 유튜브(Youtube)같은 해외 동영상 스트리밍 사이트를 이용하면 법을 회피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한때 뜨겁게 달아오르던 흐름이 어느새 쏙 들어갔다. 결국 심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청소년 문제와 연계하지 않고 업계의 이익과 향유의 측면에서만 바라보고 움직였던 것이다.


어찌 보면 가장 끔찍한 것은, 심의 시행으로 인해 표현의 자유가 위축되는 게 아니라, 청소년과 관계된 정책임에도 불구하고 심의를 추진하려는 자든, 심의를 반대하는 자든 그 누구도 청소년의 주체성에 대해서 생각을 하거나, 심지어는 청소년 운동과 연계지어 행동하려는 시도조차 없다는 현실이다. ‘청소년 보호’라는 명목으로 심의를 추진하는 자들은 그나마 솔직한 편이다. 심의 목적에서부터 자신들이 청소년을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로 보지 않고, 수동적이고 미성숙한 존재로 여기고 있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심의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어떠한가. 표현의 자유를 내걸면서, 가장 심각하게 표현과 향유의 자유를 침해당하는 청소년에 대해서는 시선을 별로 기울이지 않는다. 두 세력 모두 청소년을 부차적인 존재로 여길 뿐이다.


그런 점에서, 심의의 문제를 단순히 보수적인 정권의 문제로만 한정지으려는 시도는 얼마나 위험한가. 어떤 사람들은 문제의 책임을 모조리 이명박 정권에 전가하려 하지만, 소위 ‘민주화 정권’인 김대중 정권이나 노무현 정권 시기에도 심의 문제는 그대로였다. 2011년에 법이 통과된 이후 줄창 까이는 셧다운제도 2006년 노무현 정권 후반기에 처음 정부에서 추진한 정책이었다. 내부 조율 등이 늦어져 지금에서야 추진된 것이지, 시기가 잘 맞았으면 노무현 정권 말에 셧다운제가 통과될 가능성이 높았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명박 정권 시기에 셧다운제가 통과되긴 했지만, 국회에서 해당 법안을 최종적으로 심사하는 위치에 있는 국회의원은 민주당 소속이었다.) 심지어는 전교조, 참교육학부모회, 환경운동연합 등 소위 ‘진보적 운동단체’들이 참여하고 있는 ‘아이건강국민연대’라는 곳에서는 ‘스마트폰 중독과 폭력에서 청소년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학교 내에서 스마트폰 소지를 금지하는 법안을 발의하려고 한다. 후에 전교조는 이 법안에 공식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고 해명을 하긴 했지만, 어쨌든 문화 심의나 규제 문제가 단순히 어떤 정치적 성향을 가지고 있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졌다.


한국 사회에서, 청소년은 문화를 향유할 때 주체성을 가지고서 향유할 수 없다. ‘성숙하고 주체성을 지닌’ 어른들의 손에 판단의 권한을 맡겨야만 비로소 향유할 권리를 가진다. 다른 나라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한국에서는 어른에게 판단 권한을 강제적으로 맡기는 절차를 법적으로 규정해, 사실상 공식적으로 이러한 절차에서 벗어나거나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길을 막아놓았다. 그리고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 역시, 청소년의 문제 제기는 뒷전으로 놓은 채 표현의 자유니, 문화 산업에 피해를 주느니 같은 이야기만 반복했다. 그런 점에서 셧다운제 반대 운동은 지금까지 한국에서 있었던 문화 규제 반대 운동 중에 그나마 청소년의 입장에서 바라본 운동이었다. 비록 게임업계의 반대 운동과 청소년 차원에서의 반대 운동이 합치지 않고 따로따로 벌어졌지만, 청소년이 셧다운제의 한 축이었던 여성가족부 앞에서 밤샘 농성 시위를 하고 청소년의 이름으로 헌법소원을 신청하는 등 청소년이 주체성을 갖고서 문제에 대응했던 최초의 움직임이었다.


앞으로도 한국에선 ‘청소년 보호’라는 목적을 내걸고 청소년의 주체성을 무시하고 미성숙 담론을 내거는 심의와 규제를 추진할 것이다. 어떤 정당이 집권하든, 누가 당선되든. 하지만 앞으로도 지금처럼 ‘표현의 자유 침해’만을 내걸고 반대를 하면 그 운동이 지속되긴 어려울 것이다. 청소년은 미성숙한 존재가 아니고, 나름대로의 주체성을 가진 존재이다. 청소년 운동과 결합하거나 실질적인 피해를 입는 대상인 청소년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 운동은 공허한 발자취만 남길 뿐이다. 그러니 한국의 개떡같은 문화 심의와 규제가 짜증나는 사람들이여, 정부 욕을 하기 전에 일단 청소년 운동에 시선을 돌려라.


<스카이젯>

Posted by 오승희


생각해보면 그때는 참 단순했던 것 같다. 그 날은 날씨도 더워 수업을 들을 기분도 나지 않는 날이었다. 그런 와중에 들리는 학생부장의 교내 방송. 동사무소에서 주민등록증 제작을 하러 학교로 오셨습니다. 수업을 중단하고, 부르는 반 순서대로 차례차례 과학실로 가서 한 줄로 서서 기다리세요. 정말 기쁜 소식이었다. 먼저 재미도 없는 수업을 듣지 않아도 되니까 기뻤고, 그 다음으로는 내가 드디어 ‘성인’이 된다는 소식에 기분이 좋았었다. 아직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마당에 민증이 나와도 딱히 할 일도 없는데, 그 때는 그게 왜 이렇게 좋았는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동사무소 직원이 건네준 종이에 내 이름과 주소, 주민등록번호를 적고 순순히 양 손가락에 인주를 발라 지문을 찍었다. 이 세상에 주민등록번호를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느니, 지문 날인을 거부해서 체포되었던 사람도 있다느니 같은 소리는, 한참 나중에야 진지하게 생각해봤던 일이다.


왜 나를 포함한 아이들은 그렇게 주민등록증을 만든다는 사실에 두근거렸을까? 사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주민등록증을 만든다는 행위는 정부에게 ‘지문’이라는, 매우 중요한, 그리고 고유한 생체 개인정보를 오직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는 이유로 넘겨주는 일이고, 더 나아가서는, 그런 개인정보를, 조금만 의심스러워도 경찰에게, 심지어는 편의점 알바 같은 생판 모르는 남에게 유출할 가능성을 감수하고 보여주는, 그런 용도로 쓰일 수 있는 여지를 만드는 일이다. 단순히 내 이름과 사진, 주소가 박힌 카드를 받는다는 사실이 신기해 그랬던 걸까? 그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랬으면 학생증에 만족을 하거나 동사무소로 직접 찾아가서 청소년증을 만들었겠지.(사실 그 때는 청소년증이라는 게 있는 줄도 몰랐다.) 이유는 무궁무진하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주민등록증이 자기가 성인으로 한 발짝 나아갔다는 것, 다시 말해 이 지긋지긋한 학교생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된다는 것의 상징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주민등록증을 만들고 성인이 되면 평소에는 꿈도 못 꾸던 술도 살 수 있고, 담배도 살 수 있고, 술집에 들어가서 마음껏 술과 안주를 주문할 수도 있다. 게다가 엄마 아빠 주민등록번호를 몰래 도용해서 성인 컨텐츠도 즐길 수 있다! 도저히 기뻐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씁쓸하다. 한국에 사는 청소년은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자유롭지도 않고, 자신이 주체가 되어 어떤 일을 할 수 없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청소년의 현실이, 주민등록증을 만드는 행위를 심각하고 중대하게 받아들이는 대신, 매우 홀가분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행위에 동참하게 만든다.


▲ 성인이 되면 할 수 있는 것(...)

(2012년 9월 25일 보건복지부 앞, 대학 캠퍼스내 금주조치에 항의하는 음주시위에서)


청소년은 성인이 되기 전까지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다. 앞서 말했던 술-담배를 즐길 수 없는 것은, ‘표면적으로 봤을 때’ 할 수 없는 일이다. 만약 학교와 가정의 억압한 환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작정 가출을 했다고 생각해보자. 어찌 보면 청소년이 성인이 되기 전에 스스로 독립을 선언한 것인데, 그 청소년은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할까. 최소한 한국 사회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그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청소년이 ‘미성숙’해서가 아니다. 한국 사회가, 청소년이 주체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행위를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자립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려고 해도, 근로기준법에 서는 청소년은 친권자의 동의를 받지 않으면 노동을 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에는 근로기준법 같은 노동의 기본적인 권리 따윈 가볍게 무시하는 쿨한 사장님이 전국에 널려있으므로 어떻게 알바 자리를 찾아, 최저임금도 지키지 않고 주휴수당은 ‘원래 떼먹는 것’으로 인식하는 사장 밑에서 어찌어찌 돈을 벌었다고 치자. 그렇다고 해도 중학교 3학년이 되지 않으면 은행에 돈을 저축할 수 없다. 은행법에서는 만 14세 전의 청소년이 계좌를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친권자의 동의를 받아야 만들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은행에 돈을 저금하는 대신 자기만의 비밀 장소에 꼭꼭 돈을 모아 그럭저럭 하루하루 살만큼 돈을 모았다고 쳐보자. 사람은 돈만으로 살 수 없다. 인간 생활의 세 가지 기본 요소인 ‘의식주’의 ‘주’(住), 다시 말해 집이 필요하다. 그러나 민법에서는 청소년이 부동산을 거래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합법적인 경로로는 청소년이 자신의 명의로 집을 빌려 거주할 수 없는 것이다. 심지어 숙박업소나 찜질방 같은 곳에 잠깐 묵어갈 수도 없다. 청소년 보호법상, 찜질방은 밤 10시 이후에는 청소년이 이용할 수 없고, 숙박업소에는 아예 들어갈 수가 없다. 가출이 문제가 아니라 여행, 혹은 대학 입시를 치르러 먼 지역으로 갔을 때에도 묵을 데가 없다는 얘기다. 종합해보면 청소년은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돈도 벌 수 없고, 그 돈은 안전한 곳에 맡길 수도 없고, 자신을 보호해줄 집도 구할 수 없다. 가정과 학교에서 시키는 대로, 규정하는 대로만 청소년은 살 수 있다고, 법이 규정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러한 법조항이 처음부터 ‘청소년의 자립을 막기 위해’ 제정되지는 않았다. 경제면에 종종 등장하는 ‘만 5세 아이가 주식 부자가 되었다’는 기사에서 보듯이, 어린 아이 명의로 거래를 해서 세금을 회피하려는 행위를 피하기 위해 청소년의 금융 거래를 제한하는 조항이 만들어졌다. 또한 청소년의 노동에 부모의 동의를 요구하는 것은, 지금은 많이 줄었지만 과거에 만연했던 아동 노동을 예방하기 위해서 삽입한 조항이다. 하지만 이를 감안한다 해도, 여기에는 청소년에 대한 중대한 편견이 포함되어 있다. 바로 청소년은 혼자서, 주체적으로 이러한 일들을 할 수 없는 ‘미성숙한’ 존재고, 만약 한다고 해도 이는 어른들에게 ‘이용당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전제다. 차명계좌만 해도, 청소년뿐만 아니라 금융실명제가 확립된 지금도 다른 사람 명의를 도용해서 돈세탁을 하는 일이 종종 있는데, 왜 어른의 계좌 개설은 청소년만큼 규제하지 않을까? 부동산 거래 역시 마찬가지다. 또한 고용노동부나 각 지역의 노동청은 실제 청소년이 어떤 환경에서 노동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서, 청소년의 노동 행위에 친권자 동의만 받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학교와 가정만이 청소년을 제약하지 않는다. 청소년을 주체적인 존재로 보지 않는 사회가 궁극적으로 청소년을 옥죄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청소년에게 민증을 만드는 일은 곧 자신이 자유로워지는 것과 동일한 행위로 받아들여진다. 민증을 만드는 것이 자기에게 궁극적인 자유를 주지 않고 오히려 국가에 자신을 예속시키는 일이라는 사실은, 청소년에게 중요하지 않다. (그 전에 정부에서 이를 말하지도 않고, 이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소수다.) 성인이 되는 순간 당장 이것도 할 수 있고, 저것도 할 수 있는데, 그것을 보장하는 증이 곧 자기한테 주어진다는 데 어떻게 그 열망을 막을 수가 있을까?


하루가 멀다 하고 인터넷 어느 사이트에서 주민등록번호가 유출됐다느니, 어디서 뭐가 도용됐다느니 하는 보도가 터져나오지만, 다들 그러려니 하는 눈치다. 어쩌면 한국 사회에서 주민등록제도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많은 비판을 듣거나 제대로 퍼지지 않는 것은, 한국인 전체의 25%를 차지하는 청소년이 주민등록증을 ‘해방’과 ‘자유’로 받아들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청소년의 인권이 계속 억압받는 상황 속에서 정부와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이에 별다른 문제를 느끼지 못하고 있고, ‘민증’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전국 곳곳의 학교와 동사무소에서 지문날인을 거쳐 발급되고 있다. 이렇게 공고한 구조 속에서 한국의 청소년은 오늘도 주체성을 얻지 못하고, 정보인권을 훼손하는 주민등록제도는 많은 비판을 얻는 와중에도 계속 굴러간다. ‘민증’은 청소년을 자유롭게 하지 않는다. 대신 또 다른 억압의 길로 인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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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오승희



청소년은 인간이다. 인간은 성적 욕구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청소년은 성욕을 가지고 있다. 쉬운 삼단 논법이다. 굳이 이런 것까지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청소년이 성적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당연한 이야기다. 그런데 왜 2012년 대한민국에서는 청소년과 성은 마치 따로 있어야 하는, 개별 분야인 것처럼 구분되고 가려질까?


성과 연애와 같은 이야기를 청소년들이 부모나 교사에게 상담이라도 할라치면 나오는 대답은 늘 뻔하다. “그런 건 나중에 대학 가서 알아도 돼. 나중에 다 때가 되면 알게 되어 있어. 가서 공부나 열심히 해!” 그래서 아무도 질문하지 않고,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청소년의 성, 나아가 성 전반을 터부시하는 태도가 당연한 상식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니, 뭔가 이상하다. 과연 이 지식들과 경험들을 대학 가서, 나중에 성인이 되어서나 배우고 경험해야 하는 걸까? 


이 만연한 꼰대스러운 태도가 청소년들에게, 더 나아가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혹시,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독자 여러분, 콘돔 제대로 끼우는 법 알고 계시는지?

▲ 바로 이렇게 끼우는 것이다. 반드시 앞부분을 비틀어 공기를 완전히 빼야 한다! 잘못하면 터질 수도 있다.

(그림 제공: 대한민국 성포탈 aoosung.com)


여러분, 이런 거, 집이나 학교에서나, 누가 가르쳐 준 적 있으신지? 아마 그런 경험을 하신 분, 별로 없을 것이다. 나도 물론 그랬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장장 12년에 이르는 정규 교육 과정에서 콘돔 끼우는 법은 물론 제대로 된 피임법도 배우기가 힘들다니! 통탄스런 일이다.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건, 정말 별 거 없었다.


아마 많은 학생들이 위와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성교육 특강이랍시고 와서, 낙태 사례가 담긴 동영상, 아이가 찢기는 동영상만 잔뜩 반복해서 틀어주면서 오히려 성관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만 잔뜩 생기는 경험 같은 것 말이다. 소위 ‘성교육’이랍시고 몇 년간 나에게 행해졌던 학교에서의 여러 교육들은 제대로 된 성 지식을 알려 주기는 커녕, 성을 부끄러운 것, 가려야 하는 것, 그리고 두려운 것으로 여기게 했다. ‘연애’라거나 ‘성관계’, 이런 거 하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그런 분위기는 비단 학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성에 대한 이야기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가족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런 콘돔 끼우는 법과 같은, 현실적이며 정말 기초적인 정보 하나 제대로 몰라 허둥대고 우왕좌왕해야하는 이런 코미디 같은 상황은, 성을 무조건 가리려고만 하는 경직된 분위기에서 비롯되는 거다. 성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며, 가려져서도 안 되는 것인데 말이다.


하지만 분명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당연히 청소년들을 그러한 ‘유해한’ 정보로부터 ‘보호’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말이다. 하지만 청소년을 소위 ‘음란한’ 것으로부터 ‘보호’를 해야 한다는 명분 하에, 오히려 실제로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부분은 가려지고 있다. 물론 ‘보호’ 자체를 부정해야 하는 것도 아니며, 청소년의 ‘미성숙’ 역시, 어쩌면 부분적으로는 맞는 이야기일지 모른다. 하지만 누가 ‘미성숙’과 ‘성숙’을 재단하는가? 단순히 나이에 따라서? 나이가 많다고 성숙한 것이 아니듯이,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그 모든 정보로부터 통제되고 격리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맞는 시기에 제대로 된 교육과 지원이 필요한데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이러한 억지명분에 매몰되어, 청소년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은 전혀 주지 못하고 있다.


사실 ‘보호’와 ‘미성숙’이라는 말 자체가 상당히 기만적이다. 이는 마치 청소년들을 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청소년의 삶에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보호’라는 윤리적인 것처럼 보이는 단어로 억압과 통제를 가려버리고 있다. 그리고 성인들에게는 청소년들을 보호하고 있는 듯한, 무언가 도움을 주고 있는 듯한 착각을 주는데, 이는 그냥 쉬운 길을 택한 걸 정당화시키는 걸로 느껴진다. 올바른 성 지식에서부터 성적 자기결정권, 성에 대한 책임감을 내면화시키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상당히 많은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 이보다는 우선 차단시키고 격리시키고 보는 것이 좀 더 비용과 힘이 적게 들고, 쉽고, 통제하고 싶은 욕망까지 만족시키는 방법이니까 말이다.


‘이팔청춘’이라는 말이 있듯, 전통적으로는 15~16세 정도에 혼인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조선 시대 제민 통제의 근거가 되었던 주자의 ‘가례’에 따르면, 남성은 16~30세, 여성은 14~20세가 혼인 적령기로 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서, ‘어른’들이 참 좋아하는 그 봉건적이고 위계적이며 나이주의적인 ‘가부장적 유교적 질서’ 속에서도, 이미 14~16세 정도면 ‘가정’을 이룰 수 있는 하나의 ‘주체’로 인정해왔던 것이다. 물론 혼인이 곧 성적 결합을 의미하지도 않고, 당시의 관념으로는 성이 단지 ‘자손 생산을 위한 행위’ 정도 수준으로 통제되어왔으니 적절한 예시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19금’을 신성 불가침의 신조로 여기는 ‘꼰대’들에게는 이 정도도 충분히 충격적일지 모르겠다.


당연히 이 또한 제대로 된 해답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통제’의 상한선이 아니라, 기준이 되는 나이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이라도 ‘사람’으로서 똑같은 대우를 받으며, 차별 받거나 사회적으로 배제당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성에 대한 제대로 된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청소년을 단지 아직 둥지를 떠나지 못한 ‘자식’ 정도로만 보고,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마리오네뜨’인 양 여기는 관념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다. 학생인권조례에 성적 지향성에 따른 차별 금지 조항, 청소년의 성적 권리, 임신/육아에 관한 차별 금지 조항이 반드시 들어가야 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정말 믿기 힘들겠지만, 청소년도 사람이다.


과연 무조건 통제하는 것만이 능사일까? 그냥 청소년들 연애하는 것 꼴 보기 싫은 것, 쉬운 길로만 가고 싶은 그런 귀찮음, 청소년들을 자신들의 통제 하에 두고 싶은 그 욕망을 ‘미성숙’이라는, 그리고 ‘보호’라는 담론으로 정당화하려는 것 아닐까? 성을 ‘부끄러운 것’으로 만들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제부터라도 청소년의 성을 음지로 몰아넣지 말고, 무조건 통제하는 대신 제대로 된 길을 갈 수 있는 이정표를 제시해 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말로만 “성은 아름다운 거예요~” 하지 말고 제대로 아름답게 느낄 수 있게 해 달라.


<ㄱ기긱>


Posted by 오승희


대한민국 헌법 제1조 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제24조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선거권을 가진다.


위는 대한민국 헌법입니다. 대한민국 헌법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입니다. 무릇 민주주의 국가라면 모든 국민의 정치참여를 보장하여야 합니다. 민주주의는 모든 국민의 참여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삐걱거리고 굴러가지 못하는 체제이니까요. 


헌법에는 중요한 정치적 권리 중 하나인 선거권을 모든 국민이 가진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정치에서 배제된 자들이 있습니다. 다들 쉽게 알아맞히시겠죠. 바로 청소년입니다. 


청소년도 엄연한 사회 구성원이기에 사회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정치적 권리를 마땅히 보장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청소년의 선거권은 법률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오직 그 뿐인가요, 국회의원 선거권이 없는 자이기에 선거운동기간동안 선거운동을 할 수 없기도 합니다. 정당에도 가입할 수 없죠. 또한 그러한 제도적 차별과 더불어 청소년은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적기에 미숙하다는 편견으로 청소년의 주체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적 차별도 만연합니다. 


어리다는 이유로, 아직 미숙하다는 이유로 청소년에게 정치는 안 된다는 현실에 문제의식을 가진 여러 청소년들과 '희망의 우리학교',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를 비롯한 단체들이 모여 작년 10월 28일, 청소년의 정치적 기본권 ‘내놔라’ 운동본부가 출범하였습니다. 


내놔라 운동본부는 청소년이 온전한 시민으로 인정받는 사회를 지향합니다. 내놔라 운동본부의 구체적인 요구안은 ▲선거권·피선거권 내놔라(선거권·피선거권·정당참여 등), ▲모이고 외칠 권리 내놔라(집회·1인시위 등 결사의 자유, 언론·표현의 자유), ▲학교 민주주의 내놔라(동아리·학생회·자치활동 등), ▲판단할 권리 내놔라(당사자에게 영향을 끼치는 정책 등에 대해 결정하기), ▲우리 동네 내놔라(지방자치)로 다섯 가지입니다. 


작년에 내놔라 운동본부는 청소년의 정치적 기본권 보장 서명캠페인과 ‘대선일 전국 동시다발 투표소 앞 1인시위’를 진행하였습니다. 올해에 내놔라 운동본부는 선거권·피선거권 연령 낮추기 운동을 전개하려 합니다. 선거권·피선거권 연령 대중인식조사부터 토론회와 집회까지 연속성을 가지며 활동할 계획입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내는 것은 당연한 시민으로써의 권리입니다. 그러한 권리가 없다는 것은 자신의 사회의 주인이 아니라 ‘노예’에 가깝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청소년도 사회의 주인으로, 온전한 시민으로 인정받는 사회를 위해 함께해 주세요!




<걸짜>

Posted by 오승희


▲ 박정희 정권 말기인 1978년에 있었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포스터. 뭔가가 이상해 보인다면 기분 탓입니다. (포스터 제공: 중앙선거관리위원회선거도서관)



2012년에는 큰 선거가 두 번 있었다. 4월에는 제19대 총선이 있었고, 12월에는 제18대 대선이 있었다. 총선이 있던 4월 11일과 그리고 대선이 있던 12월 19일, 흥미로운 광경이 전국의 투표소에서 펼쳐졌다. 총선 때에는 ‘청소년의 정치적 권리 보장을 위한 원탁회의’를 중심으로, 대선 때에는 ‘청소년의 정치적 기본권 “내놔라” 운동본부’를 중심으로 뜻을 모은 사람들이 청소년에게도 투표권을 줄 것을 요구하며 각자 전국에 산재한 투표소 앞에서 청소년 참정권을 요구하며 1인 시위를 벌인 것이다.


한국에서 투표권을 부여받는 나이는 만 19세다. 그것도 원래 만 21세가 되어야만 투표를 할 수 있었던 것이 1960년에 20세로 하향 조정되었고, 21세기에 들어와서야 2005년에 공직선거법상 투표 가능 연령이, 2007년에 국민투표의 투표 가능 연령이 조정되면서 그렇게 된 것이다. 공직선거법상 투표 가능 연령 조정 당시 만 18세 안과 만 19세 안, 그리고 현상 유지 안이 격돌했으나, 결국 만 19세 안으로 정리됐다.

선거는 하나의 상징이다. 제도적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지의 여부를 판단할 때, ‘4대 원칙을 갖춘 선거가 주기적으로 열리는지’도 중요한 고려사항이다. 당연히 선거가 정치의 전부가 아니지만, 선거에서 투표를 한다는 것은 가장 쉽게 참여할 수 있는, 참정권의 기본 중 기본이다. 대한민국에서는, 만 19세가 되지 못한 청소년들은 제도상으로 완벽하게 선거의 영역에서 빠져있다. 선거법상 만 19세가 되어야만 투표권을 얻으며 만 25세가 되어야만 각종 선거의 후보로 출마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청소년들은 정치적 의사를 표출할 수도 없도록 되어 있다는 점이다. 공직선거법 제60조에 청소년은 ‘선거운동을 할 수 없는 자’로 분류되어 있으며, 이 때문에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발언을 할 수 없다. 작년에 제59조가 개정되어 SNS상에서의 정치적 의사 표현이 자유로워졌지만, 청소년은 그에 해당되지 않는다. 게다가 청소년은 원칙적으로 특정 정당에 가입할 수도 없다. 물론 청소년의 정치적 권리를 배제할 수 없다는 취지에서 청소년 당원을 받는 정당도 있는데, 진보신당이 대표적이다. 통합진보당 또한 통합 이전의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청소년 당원의 가입을 받았고, 진보신당과 마찬가지로 청소년위원회도 갖추고 있었으나, 경선부정 사태가 불거지고 검찰의 수사가 진행되자, 청소년 당원들의 당원 자격을 박탈해버렸다. 당원 명부를 검찰이 압수하고 있는 상황에서 청소년 당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랬다는 해명이 있었지만, 청소년을 정치의 주체로서 인정하지 않는 생각이 기저에 깔려있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 2013년 어린이날에 열린 ‘어린이날 컨퍼런스’ 모습. 어린이날은 원래 어린이들의 주체적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찾기 위해 집회 등 정치적 행동을 함으로써 만들어졌다. (사진제공: 이장원님)

한편 청소년이 집회를 통해 의사를 표출할 권리 자체가 법으로 막혀있지는 않다. 2008년 촛불 정국 때 수많은 청소년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갔음을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기본적인 권리 또한, 대다수의 청소년들의 일상을 맡고 있는 공간인 학교의 학칙이 가로막는다. 학교 측은 학생들이 집회나 시위 등의 방식으로 정치적 의사를 표출하는 데 대해 ‘학교 명예 실추’나 ‘교사 지시 불이행’ 등의 명목으로 불이익을 주겠다며 위협을 가하곤 한다. 실제로 2008년에 ㅅ고등학교에서는 촛불집회에 참여했던 학생이 학생회장으로 출마하려는 것을 학교 측에서 가로막아, 해당 학생이 인권위에 진정을 냈던 일도 있었다. 이렇게 청소년의 삶은 애초에 정치와는 완전히 유리된 상태에 놓여있다.

‘성숙’과 ‘미성숙’을 가르는 것은 권력관계

왜 청소년은 투표권을 갖지도 못하고, 정치적인 의사 표현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며, 정당에 가입해 정치적인 활동을 할 수도 없도록 되어 있는가? 나이가 적으면 ‘미성숙’하기 때문인가? 경험적으로, 우리는 나이가 성숙함을 보여주는 척도로서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이가 많아서 ‘성숙’하다고 할 것이라면, 1941년생으로 올해 73세가 되시는 이명박씨나 그의 형님인 1935년생 이상득씨는 모든 판단을 완벽하게 내릴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 분들은 ‘도덕적으로 완벽’할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완벽’한, 그야말로 성숙의 극을 보여주는 사람이어야 한다. “청소년이 정치를 알기에는 미성숙하다”라는 생각은, 사실은 그 근거가 희박한 편견일 뿐이다. 일단 생물학적으로는 만 15세 정도면 ‘성인’의 뇌와 거의 유사할 정도로 성장한 뇌를 갖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20대가 지나가면 오히려 뇌는 조금씩 퇴화하기 시작한다고도 한다.

설령 청소년의 뇌가 생물학적으로 ‘미성숙’하다고 해도, 이것이 청소년의 참정권을 가로막아야 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만일 ‘충분히 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참정권을 가질 수 없다면, ‘판단력이 흐려지는 나이이기 때문에’ 참정권을 가질 수 없는 경우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감히 누가, 어떤 기준으로 남의 ‘판단력 수준’을 평가한단 말인가? 전국민을 상대로 ‘뇌 기능 수준’을 평가하는 검사라도 벌이겠다는 생각이 아니고서야 이런 주장은 무의미하다. 참정권은 헌법으로 보장되어 있는 국민의 기본권 중 하나다. 단지 이것이 일종의 편견 때문에 가로막혀야 한다는 것은, 우리 나라의 민주주의가 그만큼 후진적이라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 진보신당 청소년위원회는 한국의 대표적인 청소년 정치조직이다. 사진은 2012년 노동절 행진 때 등장한 피켓.


독일에서는 선거권이 만 16세부터, 피선거권이 만 18세부터 주어진다. 독일에서는 10대나 20대의 나이로 선거에 출마하는 후보자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으며, 실제로 19세의 나이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도 있다.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악의 축’으로 지목했던 이란은 15세, 중앙아메리카의 니카라과가 16세, 심지어 북한조차도 17세부터 선거에 참여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물론 전혀 민주적인 선거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북한에서의 선거권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선거권이 충분한 의미를 가질 만큼 민주주의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논외로 한다 해도, 특정 나이를 기준으로 ‘성숙’과 ‘미성숙’을 가르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정도는 알 수 있다.

‘성숙’과 ‘미성숙’을 가르는 것은 사실 권력관계가 대단히 깊게 개입된 문제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 처음으로 선거권을 손에 쥐었던 이들은 극히 일부의 부르주아 남성들이었다. 이들에게는 여성은 ‘정치적으로 미성숙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고, 서민들은 ‘국가에 충분히 세금을 납부하지 않으므로’ 참정권을 가질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영국에서는 생물학적으로 남성인 귀족, 자산가 등에게만 선거권이 주어지다가 1918년에 시민대표법이 제정되어서야 비로소 만 21세 이상 남성들과 30세 이상의 여성들이 ‘성숙함’을 인정받았고, 성 구분 없는 보통선거권은 1928년에야 확립되었다. 남아공에서는 흑인들이 ‘미성숙한’ 존재였다. 지금, 여성이나 서민, 흑인들을 이런 식으로 차별하며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게 한다면 시대착오적이라는 비난을 받을 것이다. 청소년의 참정권 요구는, 여성이나 유색인종이나 서민들이 당대의 지배계층이었던 남성, 백인, 부유층에 대해 참정권을 요구하던 그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혹자는 청소년에게 표가 주어진다면 그들의 표가 누군가의 입김에 의해 좌우되거나, 혹은 뚜렷한 주관이 없이 아무에게나 던져지거나, 또는 포퓰리즘에 쉽게 휘둘릴 수 있기 때문에 제한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되물어보자. 과연 지금 유권자들, 그러니까 ‘성인’들의 정치는 어떤가? 뉴타운에, 혹은 자신에게는 얼마 돌아가지도 않을 감세에, 토건 정책에 표를 준 것은 포퓰리즘인가 아닌가? 아이돌 가수 같은 이가 후보로 나서면 청소년들은 죄다 그를 찍을 것이 아니냐는 비아냥도 들린다. 하지만 그렇게 비아냥대는 성인들은 공당의 전략회의를 도청한 한선교를 그저 익숙하다는 이유로 재선시켰고, ‘데칼코마니의 영웅’으로 돌아온 ‘태권도 영웅’ 문대성을 당선시켰다. 그러나 그 누구도 지금 유권자들의 표를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한선교나 문대성을 당선시킨 유권자들을 비난할 이유도 없다. 그들은 자신의 투표를 했을 뿐이다. 시민은, 설령 그 결정이 현명하지 못하다 하더라도, 자신의 신념에 따라 자신의 대표자를 뽑아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킬 권리를 갖는다. 또한 선거 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여러 정치 영역에 참여해 목소리를 낼 권리도 갖는다.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자신의 목소리’를 내어 정치 영역에 관철시키는 것이 바로 1인 1표의 대의제 민주주의다. 자기가 좋아하고 신뢰하는 사람을, 혹은 자신에게 유리한 공약을 제시하는 사람을 대표자로 내세울 권리는 헌법에 보장되어 있다. 여기에서 청소년과 ‘성인’이 구분되어야만 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러나 지금의 청소년들은 자신의 대표자를 내세울 수도 없고, 자신이 대표자가 될 수는 더더욱 없으며, 정치적 의사표현의 자유마저 제한당하고 있다. 다원주의를 기본적인 가치로 삼고 있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어느 한 집단의 목소리가 전혀 정치 영역에 나오지 못하는 것은 재앙에 가까운 것이다. 청소년들의 목소리가 정치 영역에 나오지 못함으로써 정치권은 청소년과 관련된 정책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고, 순전히 ‘성인’들의 시각에서만 법이 만들어지고 집행된다. 이런 상황은 심지어, 청소년이 그 직접적인 이해당사자가 되는 교육감이나 교육의원 선거에서도 마찬가지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자살하지 못하게 창문을 조금만 열리도록 만들어야 한다”라고 말하는 이가 교육감으로서 교육정책을 집행하고 있는 상황은, 아무리 봐도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의 상황은 아닌 것 같다.

‘탈꼰대’, 청소년에게도 정치를!

청소년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차원의 ‘꼰대질’은 매우 오랜 시간 동안 쌓여온 장유유서의 신화와 입시 문제를 끼고 있다. 나이에 따른 권력 서열이 정해져있다 보니 나이가 많은 사람이 어린 사람에게 대뜸 반말을 던지는 것은 일상다반사, 동등한 입장에서의 토론 또한 이루어지기 어렵다. 무슨 말이라도 할라치면 “네가 뭘 안다고…”로 시작되는 ‘꼰대질’이 날아든다. 독일의 청소년들이 김나지움(고등학교에 해당하는 독일의 교육기관)에 방문한 정치인들과 정치 이야기를 나눌 때에 한국의 청소년들은 9월 평가원 모의고사 문제지 속의 미적분과 씨름한다.

4월 총선이 끝나자마자 한때 “20대, 특히 여성의 투표율이 낮다. 너희들에게 정말 실망했다.”라는 식의 글들이 SNS를 타고 떠돌아다녔다. 물론 아무런 근거가 없는 이야기였고, 곧 출구조사 표본을 바탕으로 한 연령별 투표율 집계가 나오자 쏙 들어가 버렸다. 12월 대선이 끝나자마자 이런 비난은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출구조사 결과 20대 투표율이 65% 정도였는데, 50대의 89.9%와 비교하면 매우 낮다, 젊은이들이 잘못했다, 라는 식이었다. 청소년에게 투표권도 안 줘, 정치적 발언도 못하게 막아, 뭐라도 할라치면 나이와 입시 얘기로 가로막아, 이러다가 갑자기 만 19세가 되자마자 “투표 안 하면 개새끼!”라는 소리들을 하는 것이다. 청소년이 대체 뭘 했다고. 아니, 청소년이 대체 뭘 ‘할 수 있었’다고. 최소한 권리는 줘놓고, 그리고 그 권리를 쓰는 방법은 알려줘 놓고 뭔 소리라도 해야 맞는 순서 아닌가?

이제부터라도 청소년의 정치 참여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진지하게 논의가 되어야 한다. 기본적으로는 투표 가능 연령을 다시 좀더 낮추는 작업도 이뤄져야겠지만, 그보다 시급하고 근본적인 것은, 청소년은 결코 정당 가입이나 정치적 의사 표출을 할 수 없도록 되어 있는 부분부터 고치는 것이다. 청소년 활동가 ‘검은빛’씨는 “정치라는 것은 사실 국회의원을 뽑는 것만은 아니에요. 발언을 하는 것, 의견 표출 자체가 정치이고, 굳이 선거권 연령에만 논의가 국한될 이유가 없어요.”라고 말했다. 투표권 연령에 관한 논의는 사실 ‘적정 연령’에만 매몰되어 소모적인 논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정치는 선거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선거는 정치의 아주 조그만, 부차적인 영역에 불과하고, 진짜 정치는 평소에 이루어지는 정치적 발언이나 행동, 정당 활동 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청소년에게, ‘진짜 정치’의 장이 열려야 한다. 그것이 ‘진짜 민주주의’로 가는 길이다.

▲ 성숙과 미성숙, 애매~합니다잉~? (2012년 1월, 아수나로 전주지부 청소년 인권 아카데미에서)


<세치>

Posted by 오승희

첫 섹스의 기억

내 첫 섹스는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을 코앞에 둔 어느 날이었다. 학생이었던 나는 부모님과 한 집에 살고 있었고, 나보다 1살이 많았던 상대방 역시 그랬다. 그래서 내 첫 경험은 아플 수밖에 없었다. 학생 신분이었던 나와 상대방에게 허락된 공간은 기껏해야 ‘아파트 계단’ 혹은 ‘빌라 옥상’이었고, 피임의 중요성은 충분히 알았지만, 교복을 입은 우리에게 ‘콘돔’을 팔려는 사람은 없었다. 빌라 옥상과 같은, 청결하지도 안전하지도 않은 곳에서, 누가 볼까 벌벌 떨며 나눴던 관계의 끝은 ‘임신’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내 첫 섹스는 참 많이도 아팠다. 그 후에도 다른 사람과 몇 번 더 관계를 맺었다. 요령껏 콘돔을 구할 수는 있었지만, 부모님께 섹스를 했다는 사실을 들켰다. 온갖 폭행과 폭언을 견뎌야 했다. 10대 시절 나의 섹스는 늘 그렇게 아팠다. 만약 그때의 나에게 타인과 안전하게 섹스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 허락되었다면 어땠을까. 청소년에게 독립적이고 경제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공간들이 더 많이 제공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10대의 임신에 대한 우려가, 안전하게 피임을 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의 제공으로 이어졌다면 어땠을까. 부모님께 혹시라도 들킬까 섹스를 하고 난 후에는 방에서 나오는 것조차 못했던 두려움이, 나의 삶에 대한 공감과 지지로 이어졌다면, 그랬다면 내 섹스는 그리 아프지 않았을 것이다. 


첫 투표의 기억

생애 처음으로 대통령 선거 투표를 하면서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선거의 결과는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참담하고 암울했지만, 그 이전에, 선거와 투표라는 것 자체가 나의 10대 시절 섹스에 얽힌 아프고, 억울하고 서러운 기억들과 오버랩 되었다. 투표를 할 수 없는 ‘미성년자’의 신분에서 바라본 선거와 투표는 어른들만의 잔치였다. 더 나은 대한민국을 만드는 것도, 개개인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정책과 공약을 결정하는 것도, 우리를 대변할 수 있는 대표자를 뽑는 것도 모두 어른들만 가능했다. 얼마나 억울하고 서러운가! 유권자는 ‘성숙하고, 사회적으로 공인된’ 성인에게만 주어지는 특권 같은 것이며, 투표라는 행위는 유권자들만 행할 수 있는, ‘성스러운’ 어떤 것으로 존재한다. 섹스도 그렇지 않은가? ‘성숙한’ 이들의 영역에 포함되지 못한 청소년들이, 그 ‘성스러운 행위’를 요구하는 순간, 그것은 어떤 금기이자 위험한 행동으로 간주되어 버린다. 자라나는 아이들은 정치적 이념에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지겹도록 들었고, 그래서 투표란 게 대단한 것인 줄 알았다. 정치는 더 대단한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내 첫 투표는 참 별 거 아니었다. 정치는 더 별 거 아니었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쓰는 것도 정치다. 이 글을 읽는 것도 하나의 정치다. 세상에 정치적이지 않은 것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 청소년도 정치의 중심이자 주인이 되겠다는 외침은 그저 공허할 뿐이다. 내 몸의 주인이자 결정권자가 되겠다는 외침 역시, 너무나 당연한 만큼 공허하고 허무하다. 이 간극을 어떻게 좁혀야 하나. 섹스든 정치든 혼자서 다 해먹으려는 이 욕심쟁이들아!


미성숙한가 미성숙해지는가

나는 청소년에게만 금지된 모든 것들을 청소년 역시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술과 담배가 몸에 나쁜 것은 맞지만, 그것 역시 청소년들이 선택하고 결정하고 책임질 문제이다. 아울러 어떤 공부를 할 것인지, 어떤 정치인을 뽑을 것 인지, 혹은 어떤 삶을 살 것인지- 그 모든 것들을 청소년들이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청소년들이 스스로 무엇을 결정하기도 전에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하고 강요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이다. 청소년이 행하는 행위에 대한 가능과 불가능이 존재하는 현실 이면에는 미성숙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있다. 


청소년은 ‘미성숙’하다는 것, 그리고 ‘미성숙한 이들’의 권리는 제한 당해도 마땅하다는 전제는 이처럼 청소년들의 현실을 비참하게 만든다. 내 18살의 섹스가 ‘죄’였고, 투표가 ‘불가능’이었듯 말이다. 피부색으로, 성별로, 장애의 유무로, 신분과 같은 요인으로 한 개인의 사회적 위치가 결정되고 차별의 근거가 되는 것처럼, 나이에 따른 차별도 분명 존재한다. 나이가 어리면 누군가의 보호와 통제가 있어야 하며, 스스로 무언가를 결정하기엔 경험이 부족하다고들 말한다. 그렇기에 청소년은 실수할 권리나 스스로 성찰하고 발전해 볼 기회도 박탈당한다. 많은 청소년들을 옭아매고 있는 굴레다. 우리 사회가 이 과정들을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혹은 강요하면서 외면해버린 질문들이 있다. 보호와 통제를 핑계로 청소년들의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 온당한지, 어떤 결정을 하게 되었을 때 실수할 권리마저 ‘그럴 줄 알았다’는 조롱으로 빼앗아 버린 것은 아니었는지, 그리고 그 실수들을 통해 성찰하고 반성하며 마침내 ‘성숙해질 기회’조차 밟아버린 것은 아닌지, 그렇게 ‘미성숙’을 우리 사회가 재생산 해내고 있지는 않은지. 지금껏 우리사회는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답은커녕, 사회와 학교, 또 많은 기성세대들은 미성숙의 굴레를 생산해내는 주체가 되지는 않았는가? 


김 여사의 교훈

잊을 만하면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오는 수많은 ~녀의 이야기를 한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일명 ‘김여사 사건’도 하나의 사례였다. 한 여성운전자의 차에 학생이 치이는 장면이 담긴 블랙박스 영상이 공개되면서, 여성운전자들 전반에 대한 비난이 거세게 일었다. 이 현상에 대한 어느 인터넷 기사는 이렇게 지적했다. 그 사고를 일으킨 운전자가 ‘남성’이었다면 과실이나 자동차의 고장, 혹은 사건의 전후사정을 살피며 사건의 원인을 찾지만, 여성이면 근본적인 원인 보다는 ‘여성’이라는 사실부터 비난하고 본다는 것이다. 이 차이는 여성과 남성이 가지는 사회적 지위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글쓴이는 지적했다. 여성이 남성에 비해 사회적으로 약자이며, 만만한 상대이기 때문에, 이런 만만한 상대를 욕하고 비판하며 비겁한 정의감을 느끼려는 욕구가 이 ‘김여사 현상’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김 여사의 처지와 청소년의 처지는 꼭 닮아있다. ‘개념녀’와 ‘기특한 10대’의 불편함 역시 꼭 닮아있었다. 김 여사는 ‘여성’이었기에 만만했다면, 청소년은 ‘10대’이기에 만만한 것 이다. 그렇기에 같은 ‘죄’라도 그 무게는 확연히 다르다. 어떤 범죄를 일으킨 대상이 10대라면 그 앞에는 꼭 ‘무서운’, ‘겁 없는’과 같은 수식어가 붙지만, 나는 단 한 번도 ‘무서운 40대’라는 제목의 기사를 본 적이 없다. ‘기특한 40대’라는 소리도 못 들어봤다. 비겁한 사회다. ‘김여사’가 가진 정체성을 약점 잡아 공격해 상처를 입히면서까지 얻고 싶었던 그 무엇이 ‘비겁한 정의감’이었다면,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보호와 통제를 강조하며 미성숙의 굴레를 덧씌워 당신들이 누리고자 했던 것은 결국 ‘미성숙한 성숙’이다.


차별은 이렇게 다양한 가면을 쓰고 누구에게나 행해질 수 있다. 그렇기에 ‘그 누구도’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움직임의 중심에는 청소년이 있다. 그리고 그들의 절박한 외침이 있다. 사회에서 가장 ‘아랫것’ 취급을 받는 이들도 차별 받지 않는 세상이야말로 정말 ‘차별 없는 세상’이니까. 툭하면 무시당하고 찌질하다는 대접을 받는 이들이 온전하게 고귀한 존재로써 인정받을 수 있는 세상이 정말 ‘평등한 세상’이니까. 미성숙하고 불완전하다 여겨지는 그들이 스스로 성숙해지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약 없이 보장받을 수 있는 세상이 정말 ‘성숙한 세상’이니까. 그런 세상이, 나이 어린 그들도, 성소수자인 그들도, 장애가 있는 그들도, 가난한 그들도, 여성인 그들도 존엄하세 숨 쉬며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니까. 

Posted by 오승희

※ 오답승리의희망 블로그에는 실제 오승희에는 실리지 않지만
 블로그에서만 보실 수 있는 편집후기 같은 걸 실으려고 합니다.


[편집후기 : 오답의 뒷면]
표지에 들어가는 이상한 문구의 정체


오승희 애독자시라면, 9호부터 표지 뒷면에 들어가기 시작한 이상한 문구들의 존재를 눈치채셨을 겁니다. 사실 뭐 대단한 의미가 있는 건 아니구요. 실은 9호 디자인 때부터, 앞면은 어찌 다른 분에게 의뢰해서 디자인을 했는데, 뒷면을 어떻게 채울지가 감이 하나도 안 오는 겁니다. 내일 모레는 갖다 맡겨야 되는데요!! 그래서 궁리궁리 끝에 여러 가지 관련된 사진들을 넣어봤는데, 그래도 제일 밑에 공간이 허전~하게 남더라구요. 그래서 결국 쥐어짜듯이 넣어본 게 그 문구였습니다.

박학하신 분들은 이미 알고 계셨을 텐데, 그건 나름 과거의 유명한 문구들을 "오답"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패러디해본 겁니다. 뭐, 9호 때는 워낙 절박하게 시간에 쫓겨 대충 아무거나 넣어서 별로 그런 느낌이 안 나지만 말이죠.

9호부터 13호까지 들어갔던 문구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뒷표지에 남길 후기? 저리 꺼져! 그런 건 본문에 충분히 말하지 못한 바보들이나 남기는 거야!
 - 오승희 9세  (9호)

오답들에게 권력을!
 - 오답주의가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되는 XX68년 혁명 당시 유행한 구호   (10호)

나는 오답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 오답주의의 기초를 놓은 철학자 답카르트의 제1원리  (11호)

정답적인 사람은 자신을 세상에 맞춘다. 오답적인 사람을 세상을 자신에게 맞추려고 노력한다. 따라서 모든 진보는 오답적인 사람에 의해 일어난다.
   - 오지 버답드 쇼  (12호)

  정답은 억압한다. 절대 정답은 절대적으로 억압한다.
   - 오답튼 경  (13호)


각각 마르크스, 68혁명 당시의 유명한 낙서, 데카르트, 조지 버나드 쇼, 액튼 경 등을 패러디한 겁니다. 9, 10, 11호까지는 꽤 억지로 끼워 맞춘 것 같았지만, 12호, 13호에 이르러서는 그럭저럭 그럴 듯해 보이는 말이 되고 있는 것 같아서 뿌듯합니다. 작명 센스는 여전히 꽝이지만요. "오지 버답드 쇼"라니 이 얼마나 무리한 작명입니까.

이 문구는 어떻게 정하냐구요? 무책임하게도, 지금까지 주로 표지 디자인과 편집의 마무리를 맡아온 공현이 알아서 지 맘대로 정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뒷표지에 들어갈 문구는 큰 문제가 없는 한은 표지 디자인 등의 작업을 맡은 사람의 재량으로 해둬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혹시 다음 14호에 들어갈 문구로 추천하고 싶으신 게 있다면 댓글 달아주세요. 예를 들면, <"내 사전에 정답이란 없다!"- 오답레옹>, <"하루라도 틀리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 - 안오답> 이런 식으로 말이지요. 소중한 아이디어를 반영하겠습니다.
 


보너스로 이번 13호가 개편 디자인 적용을 받기 전에 마구잡이로 디자인했다가 버려진 13호 표지 디자인을 공개합니다.



참 전통적(???)이죠?

Posted by 오승희


당신의 페이지에 오류가 있습니까?



◎ 청소년자유언론 <오답 승리의 희망>(오승희)입니다. 사회가 강요하는 ‘정답’과 어긋나는 이야기들이, ‘오답’들이 속에서 꿈틀대는 분들과 함께합니다. 자유롭게 글을 써서 게시판(http://vivaerror.net/zine/)에 투고해주세요. 되도록 모두 싣도록 하겠습니다. <오승희>는 검열 없는 신문(잡지?)을 지향합니다. (투고받은 글들은 편집진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 좀 띄엄띄엄 나오고 있는데요. 13호는 12호에 이어 10개월 정도 기다리셨죠? 죄송… 거의 무크지 수준으로 비정기적으로 나오네요. 돈만 있다면 격월간지나 월간지로 내고 싶습니다. ㅠㅠ 아예 분량을 확 줄여서 좀 더 자주 내는 건 어떨까요?

◎ <오승희>는 무료가 원칙입니다. 다만 많이 받아가는 단체 등에게는 좀이라도 후원금을 내달라고 부탁드리고 있습니다. 그냥 받아보시는 분들도 받아보실 때마다 돈을 조금이라도 주시면 <오승희>가 먹고사는 데 큰 보탬이 됩니다. 사무실 마련하고 나서 재정난이 한층 더 심해졌습니다. (후원계좌 농협중앙회 079-12-940026 유윤종)

◎ <오승희> 블로그도 있습니다. http://vivaerror.tistory.com 입니다. 지난호에 올라왔던 글들, 미처 못 실은 이야기들 등이 올라갈 겁니다. 그리고 편집후기 같은 것도 한 번씩 올릴 계획입니다. 오승희 트위터도 만들었습니다. @vivaerror 입니다.

◎ <오승희>에서 사무실을 얻었습니다.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가 구한 사무실에 덤으로 얹어서 쓰는 거지만;;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문래동2가 57-4번지 2층입니다. <오승희>를 더 안정적으로 보관하고 만들 수 있게 됐습니다.

◎ 한겨레결체, 윤고딕240, 윤고딕330, 윤고딕340, 성동고딕, Bell Gothic Std, Century Gothic 글꼴을 사용하였습니다.

Posted by 오승희


학생인권 종결자
『인권, 교문을 넘다 - 학생인권 쟁점탐구』


공현



"두발자유는 머리카락의 자유인가?"

  두발규제에 맞서서 두발자유를 외치는 학생들이 아마 한 번씩은 들어봤을 법한 말. "머리카락 같은 사소한 거에 신경 쓸 시간에 공부나 해!" 그런 개념 없는 소리에 맞서기 위해 두발자유 시위 때 이런 표어도 나왔더랬다. "잘리는 건 단순히 머리카락이 아니라 인권입니다." 하지만 좀 더 발칙하게, 이렇게 질문으로 답해보면 어떨까? "그게 그렇게 사소한 거면 왜 그렇게 열심히 규제하고 단속하세요?"

  새로 나온 학생인권 책, 『인권, 교문을 넘다 - 학생인권 쟁점탐구』(한겨레에듀. 인권교육센터 들 기획. 공현, 박민진, 배경내, 오혜원, 정주연, 조영선 함께 씀.)는 바로 그런 발칙한 질문과 그 질문에 답을 찾는 과정의 결실이다. 왜 학교에서는 그렇게 학생인권을 규제하고 침해하는 데 열을 올릴까? 학생들이 이런 인권을 보장받게 되면 대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 권리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이런 질문들을 던져나가면서 학생인권의 여러 쟁점을 탐구하는 것이 이 책의 중심 내용을 이루고 있다.

  책의 본론 격인 2부, 그 중에서도 첫 장의 소제목, "두발자유는 머리카락의 자유인가?"는 그런 책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 두발규제는 단순히 머리카락을 규제하겠다는 것이 아니요, 두발자유는 단순히 머리카락의 자유가 아니다. 독재자 박정희 대통령은 왜 장발단속을 했는지 보수적 억압적 정부가 들어선 이슬람권에서는 왜 사람들에 대한 두발복장규제가 강화되는지, 1987년 노동자 투쟁 때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첫 번째 요구사항은 왜 임금 인상이 아닌 두발자유였는지, 풍부한 사회적 비유와 대조를 통해 두발자유 쟁점의 의미를 탐구한다. 이 책은 두발자유의 당위성을 주장하기보다는 두발규제와 두발자유의 의미를 비교하고 탐구하는 형식을 취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인권, 교문을 넘다 - 학생인권쟁점탐구』 2부는 두발규제, 체벌, 강제야자, 교복․복장, 휴대전화, 양심의 자유, 집회의 자유, 연애, 총 8가지 학생인권의 뜨끈뜨끈한 주제들을 꺼내서 요리한다. 그 목차는 다음과 같다.

① 두발 자유는 머리카락의 자유인가? | 한낱 머리카락에 학교가 그토록 목매는 이유
② 맞을 짓 한 자? 맞아도 되는 자! | 체벌과 폭력 사이
③ 우아한 거짓말과 구차한 양심 | 양심의 자유, 사뿐히 지르밟고 가시더이다!
④ 접속 금지, 발신 금지 | 휴대전화와 함께 추방되는 것들
⑤ 교복은 메시지다 | 복장 단속, 무엇을 단속하는가?
⑥ 도둑맞은 시간과 비어 있는 시간 | 강제 보충과 야자는 누구를 울리나?
⑦ 중립이라는 감옥, 정치적 미성숙의 감옥 | 집회의 자유는 학생의 삶을 어떻게 바꿀까?
⑧ 사랑은 아무나 하나 | '연애질', 금지된 것을 꿈꾸다



"화장실"에서부터 질문은 시작된다


  서론 격인 1부도 가볍게 읽어 넘기기에는 좀 만만치 않다. 1부는 화장실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교직원 화장실을 몰래 쓰는 재미로 학교 다니는 학생 이야기다. 그냥 시설이 좋아서 몰래 훔쳐 쓰는 게 아니다. 쓰고 나오면서 꼭 이런 것들을 붙여놓는다. "우리 학교 교사 수는 50명인데 화장실은 3개! 학생 수는 1000명이 넘는데 화장실은 몇 개일까요?" 같은 질문에서부터, "3층 남자 화장실 변기가 고장난 지 2개월째인데 수리도 안 해주고 있다!" 같은 고발까지.

  『인권, 교문을 넘다』는 어떤 화장실을 쓰느냐, "똥 쌀 권리"를 얼마나 어떻게 보장받고 있느냐, 거기에서부터 인간의 존엄성의 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 화장실 뿐 아니라 중앙현관 학생 출입금지 같은 사소한 곳, 교무실 청소를 왜 학생들이 하느냐 하는 작은 불합리에서부터 학생들의 자기 처지에 대한 인식은 시작된다.

  이처럼 화장실로 시작한 1부에서는 동방신기 팬클럽 이야기, 무상급식과 학생인권조례 사이의 간극에 대한 이야기, 개학반대 시위 이야기 등을 거쳐서 학생인권의 봉인을 풀어나갈 질문들을 던진다. 그 질문들을 스스로 자문하다보면 어느새 학생인권에 대해 자기가 가지고 있던 '프레임'(생각 틀)들이 변화해가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학생인권이 넘어설 것들


  마지막 3부 "학생인권 논리탐구"에서는 학생인권을 이야기할 때 흔히 맞닥뜨리게 되는 여러 이야기들에 관한 논리들을 모았다. 부모 문제(친권), 미성숙, 법치주의, 보호주의, 교권 등등. 그리고 마지막에는 학교 안의 소수자와 차별 문제까지. 학생인권을 이야기할 때 우리가 넘어서야만 하는 것들, 좀 더 근본적인 관점에서 다시 이야기해야 하는 것들을 큰 틀에서 짚어주고 있다.

  긴 말 필요 없이, 다음과 같은 구절들을 직접 읽어 보자.

"미성숙은 말 그대로 성숙하지 못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사람은 달걀 프라이가 아니니 어디까지가 반숙인지 완숙인지 구분하기란 불가능하다. 겉으로 완벽해 보이는 사람도 어딘가 미숙한 구석이 있게 마련이고, 오히려 정신이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이 겉으로는 센 척, 성숙한 척하는 일도 많다. …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에서 어떤 사람을 성숙하다고 여기고 어떤 사람을 철없는 사람으로 여기느냐, 곧 성숙을 판가름하는 기준이 무엇이냐를 살펴보는 일이다."(pp.243-244.)

"보호의 반대말은 방임이 아니라 '자유'가 아닐까? 청소년이 자기 힘을 기르고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도록 하는자유 말이다. 그런데 자유는 단순히 '간섭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지원을 요구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 보호주의를 넘어서자는 말은 청소년에게 홀로서기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청소년들을 울타리 안에 꽁꽁 가둬 두는 보호주의에 묶여 있는 한, 청소년에게 정말 필요한 사회적 지원이 뭔지를 보지 못하게 된다는 이야기다."(p.260)

"교육이 전투가 될 때 교사의 전투력을 떨어뜨리는 듯 보이는 학생인권이 환영받을 수 있을까? 학생의 인권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사의 통제력이라는 생각이 힘을 얻는 것 아닌가?"(p.264)

"학생인권을 주장하는 것은 학부모가 가진 것을 빼앗아 오자는 것도 아니고, 학부모를 학생의 삶에서 밀어내고 간섭하지 말라고 외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학부모의 위치를 제자리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는 이야기이고, 학생과 학부모가 같이 살아가기 위해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 학부모가 주인공으로 나설 무대는 자신의 삶이어야 한다. 학생인권은 이렇게 자녀의 삶에만 붙잡힌 채 자기 무대를 잃어버린 학부모도 자유를 되찾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함께 건네고 있다."(p.293)

"학교에서 인정하는 능력은 공정한 경주와 노력의 결실로 이야기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승패가 이미 예정되어 있는 경주를 공정하다고 말하고, 뒤처지거나 패배한 이들이 자기 탓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야말로 폭력이고 숨겨진 차별이 아닐까? 학교에서 인정하지 않는 능력, 돈이 되지 않는 능력을 가진 이들을 무능력하다고 얘기해도 될까?"(p.302)



학생인권 종결자


  현재 시점에서, 『인권, 교문을 넘다』는 "학생인권 종결자"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을 만한 책이다. 적어도 지금까지 학생인권에 관해 논란이 되었던 이야기들을 모두 그러모아서 이토록 넓고 깊게 파헤친 책은 이제껏 없었다. 물론 앞으로 학생인권이라는 사회의제가 더 많은 내용, 더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가지게 되면 이 책도 부족한 부분을 많이 드러내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이 책이 학생인권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읽어야 할 바이블(Bible)이자 교과서 역할을 해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나 역시 책의 공저자 중 한 명으로서 더욱 그런 기대를 가지고 있다. 이 책의 내용을 뽑아내기 위해 워크샵을 하고 집필을 하는 데는 대략 1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지만, 사실 이 책에 담긴 내용은 6년, 아니 10여년의 세월 동안 학생인권을 이야기하고 발로 뛰어온 사람들이 궁리해내고 토론하면서 만들어낸 것들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교사들이나 학생들, 학부모들이 수능 문제집을 풀 시간, 취업 준비를 할 시간, 입시전형을 알아볼 시간 중 아주 조금만 할애해서 이 책을 읽는다면 학생인권 현실은 좀 더 나아질 수 있을 것이다. 또 중간중간에 제시하고 있는 더 이야기해봐야 하는 토론거리들을 가지고 같이 토론을 한다면 학생인권에 대한 더 풍부한 논의가 가능해질 것이다. 그 토론 페이지 역시 뻔하게 "두발규제가 필요할까?" 같은 게 아니라 "연애할 자유를 보장하면 여성 청소년들이 차별을 당하거나 피해를 겪는 일이 늘지 않을까?" 같은 섬세한 질문이나 "남을 모욕하는 말을 내뱉는 것은 양심의 자유 차원에서 어떻게 볼까?" 같은 어려운 질문까지, 학생인권에 대해 좀 더 앞으로 나아가고 구체화해야 할 고민지점들을 짚고 있다.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사람들은, 당연하게도 학생인권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학생들이다. 책 디자인 자체도 학생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일러스트와 만화 등을 풍부하게 실으려고 노력했다. 학부모 분들도 읽으시면 좋다. 그렇지만 집회의 자유 보장이 빨갱이들의 음모라는 식의 무개념하고 얕은 소리가 버젓이 한국 1, 2위를 다툰다는 '정론지'에 실리는 현실에서는, 일단 그런 칼럼을 쓰는 기자들이나 교수들 먼저 이 책을 읽혀야겠다 싶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제안하자면, 학교를 졸업할 때,(재학 중에는 싸움 거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니까) 학생들을 '잡는' 교사들에게 이 책을 졸업 선물로 선물해보는 건 어떨까? 이명박 대통령이나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그밖에 교육감들이나 장학사들, 교장들에게도 읽히고 싶다. 자기가 하는 일이 무슨 의미인지, 학생인권이 뭔지, 개념 탑재가 좀 될 수 있도록.



추신 : 책이 오탈자가 좀 많다. 급하게 편집, 디자인을 하다 보니 생긴 문제 같다. 1쇄가 다 팔리고 2쇄가 나올 땐 가능한 한 고쳐져 있길!

Posted by 오승희

밑바닥에 깔린 청소녀 알바

44만원에 그치지 않는 노동현실

윤티



44만원, 청소년 비정규직 알바

나는 청소녀 알바생이다. 시사in에서 얼마 전에 나 같은 사람들에게 이름붙이길, 일명 “44만원 세대”라고 했다. 나는 여성이며, 청소년이고, 말하자면 비정규직 노동자다. 요즘 청소년노동인권 토론회나 언론 인터뷰 등에서 내가 이런 존재라는 것을 여러 번 우려먹고 있는 사실이긴 하지만 이게 뭐 비밀도 아니고 계속 말해서 닳고 닳을 얘기도 아니니까 괜찮지 않을까? ㅋㅋ 그래서 이번에도 내 경험을 가지고 한 번 청소녀 알바생들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탈학교 청소년인 나는 부모의 눈치 압박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배우고 싶은 것들을 내가 번 돈으로 배우고 싶었다. 그래서 돈이 필요했다. 그렇게 알바를 시작했고, 내가 처음 일했던 곳은 패스트푸드점이었다.

패스트푸드점에서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나는 카운터에서 계산하는 일을 하였다. 내가 하는 일은 뒤편에서 햄버거를 만드는 남자애들의 일보다 더 편한 일인 것처럼 느껴졌고, 그래서 처음에는 (어떤 기준으로 책정된 건지 잘 몰랐지만) 남녀의 시급에 차이가 있었지만 그러한 차이에 대해 별 감각이 없었다.

하지만 일을 하면 할수록 이게 그리 편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면 할수록 진이 빠진다고 해야 할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그냥 계산대를 두드리고 주문을 받는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여성다움’을 같이 팔고 있었다. 일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서야 알았다. 난 주문을 하러 들어오는 손님들에게 맑은 목소리를 선사해야 했고, 버거를 만드느라 지친 몸에 못지않게 스스로를 여성스럽게 가다듬고, 언제나 웃는 얼굴을 보여야 하는 ‘험한 일’을 해야 했다.



청소녀들, 돈을 벌려면 성을 이용하라구?


어쨌든 돈은 벌어야 했기에 패스트푸드점 알바를 그만두게 된 뒤에도 다른 일을 구하였다. 그런데 그 일이 참 커다란 ‘일’이었다. 사무직 일이었는데, 처음에는 일주일에 사흘 정도만 나가서 서류 정리 조금 하면 되는 일이라고 했다. 하루 4~5시간 일하고 일당은 2만원이라고 했다. 그런데 면접을 보러 갔는데 가자마자 내게 설거지와 청소를 할 수 있겠냐고 물어보더라. 자기가 혼자 일하고 있는데, 그런 일들을 못하고 있다고. 이래서 여자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때 깨달았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집에서도 잘 하지 않는 일이었지만 돈이 필요하니까 한다고 얘기했고, 그렇게 그 사장의 사무실(인지 집인지)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주급을 받는 날, 그 기러기 사장의 무언가를 요구하는 눈에 나는 큰 반항 한 번 못하고 ‘당해야’ 했다. 처음엔 다리를 쓰다듬더니, 나중에는 안아달라고 했다. 그 상황에서도 아직 돈을 받지 못했다는 생각에, 그냥 박차고 나와 버릴 수도 없었던 그 때를 생각하면, 더 치가 떨린다. 나는 일을 하러 갔는데, 그 사장이 원한 건 내가 생각하는 일이 아니고 다른 일이었다는 것이 무서웠다. 여성청소년이 돈을 많이 버는 일을 구하려면 일단 이런 수모는 미리 각오하고 들어가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며 그 오피스텔을 빠져 나왔다.

사실 처음엔 이런 일을 당했어도, 혹시나 있을지 모를 사장의 해코지가 두려워서, 또는 이제 와서 하소연해봤자 뭐가 있겠나 싶은 마음에, 내 마음 속에만 꽁꽁 숨겨왔던 것 같다. 많은 청소녀 알바생들이 그러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렇게 당당하게 자신이 겪은 일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 청소년 알바를 모집하는 광고. <사진 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밑바닥 노동, 청소년 노동인권 현실


얼마 전인 11월 27일에 ‘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에서 발표한 ‘청소년 노동자의 노동인권실태’를 보면, 청소년들이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88만원 세대만도 못한 44만원 세대인 청소년 알바. 그래서 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는 이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할 때, '밑바닥 노동'이라는 표현을 썼다.

시급이 3770원이었을 때도 2100원, 2500원 등등 햄버거 한 개 값만도 못한 시급을 받으며 청소년 알바는 그렇게 '헐값노동' 취급을 받아 왔다. 그나마 올해부터 시급이 4000원으로 올랐다고는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시궁창이다. 임금뿐만 아니라 노동 환경 또한 청소년 노동자들에겐 가혹하다. 실태조사 결과 발표에 따르면, 일하는 도중에 휴식 시간과 휴식 공간의 여부를 묻는 질문에 대해 '휴게시간 따로 없다/휴게실 없다'고 답한 비율이 각각 62.0%, 62.8%로 꽤나 높게 나왔다. 근로기준법에도 4시간 일을 하면 30분은 꼭 쉴 수 있게 해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지만, 청소년 노동자들에겐 쉬는 것도 사치일 뿐인 것 같다. 나도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할 때 매일 똑같은 버거만 먹으면서 좁은 곳에서 딱 30분 쉬게 해주었던 기억이 있는데, 그 30분이 너무 짧게 느껴졌으니까.

우리가 청소년이기 때문에 고용주(비청소년)들은 우리를 더 쉽게 대한다. 실제로 어떤 청소년은 일하는 시간보다 늦게 도착했다고, 손을 들고 벌을 서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청소년'노동자가 아니었다면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일테다. 일단 '청소년'에 대해, 거기다 공부만 죽어라 열심히 해야 할 청소년이 '알바'라는 것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 딱히 칭찬해주지 않는 사회이기 때문에 그 사회의 시선으로 보면 우리는 너무나 만만한 존재다. 그래서 서비스업, 주문을 받는다거나, 전화를 건다거나 하는 업종에 있다 보면 손님들까지 우리를 막 대할 때가 있다.

▲ 최저임금위원회 앞에서 청소년 노동자들이 최저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용모단정(?)과 밑바닥을 벗어날 날은


나도 일을 하고 싶고, 돈을 벌고 싶다. 하지만 확실히 변하지 않는 건, 여성청소년에게는 주어진 일자리조차도 별로 없다는 것이다. 힘들게 일하고 돈 많이 주는 알바는 난 할 수 없다. 하고 싶어도 못한다. 편의점 야간알바는 대부분 남자를 뽑고 오토바이배달이나 다른 배달 쪽 일도 거의 남자가 대부분이다. 청소년 알바도 성별분업이 되어 있다. 여성들은 상냥하고 예쁘고 얌전한 일, 남성들은 힘쓰고, 몸 부딪히고, 강하고, 험한 일. 우리는 그런 식의 험한 일은 여성들의 것이 아니라는 걸 계속 교육받아왔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대중매체들에서도 여성의 직업과 남성의 직업은 확연한 차이가 있다고 보여준다. 그리고 남성 직업인데 그 일에서 성공한 여성들, 소위 말하는 '여성 엘리트' 을 보여주며, 이례적인 일이라는 투로 말하곤 한다. 그러면서 다른 여성들을 향해 말한다.
"너도 네 재주껏 해봐."
남성은 능력만 있으면 된다고 하지만 여성은 능력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말이 있다. 다시 내가 알바를 구할 때는 '용모단정'이라는 조건에 맞추기 위해 시간을 써야할 것 같은 두려움이 스물스물 생겼다.

여성청소년으로 노동을 한다는 것은, 안 그래도 '밑바닥 노동'인 청소년 노동에서 그 '밑바닥'을 뚫고 한참 더 내려가야 할 것 같은 느낌이다. 그것은 비슷한 일을 하는 것 같은데 (안 그래도 초초저임금인) 시급에 남녀차가 있는 것이기도 하고, 손님들을 대할 때 아무리 토 나올 것 같은 손님을 만나더라도 언제나 생글생글 웃어야 하는 것이기도 하고, 주급 더 올려 줄테니, 애인이 되어달라는 마초 아저씨들의 더러운 말을 시도 때도 없이 들어야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성과 청소년, 여성 청소년의 노동 현실은 언제쯤 밑바닥을 벗어날 수 있을까.

Posted by 오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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