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중순, 인터넷은 또 다른 심의제도의 등장으로 ‘멘붕’에 빠졌다. 영상물등급위원회가 8월 17일부터 모든 뮤직비디오를 대상으로 사전심의를 시작하겠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 뮤직비디오는 돈을 받고 팔지 않는 이상, 무료로 시청자들에게 제공되기 때문에 사전심의의 대상이 아니었다. 아니, 심의를 받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방송사를 통해 방송되는 뮤직비디오는 각 방송사별 자체 심의를 받고, 현재 음악 심의를 담당하는 여성가족부 산하 청소년보호위원회에서 이미 사후심의를 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국회에서 의원들이 예외조항을 만들어 뮤직비디오를 반드시 심의를 받아야지만 공개할 수 있는 대상으로 바꾼 것이다. 이유는 참 간단했다. 폭력적이거나 선정적일 수도 있는 뮤직비디오에서 청소년을 ‘보호’해야 한다!


누군가는 이 심의제도에 길길이 날뛰면서 뮤직비디오 심의는 셧다운제에 이은 이명박 정권의 문화 말살 시도라면서 이명박과 새누리당을 열렬히 깠지만, 애석하게도 그건 반쪽짜리 비난이었다. 이 조항이 포함된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 개정안은 당시 민주당(현, 민주통합당) 의원들도 공동으로 발의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이 법이 통과될 당시 본회의에 참여한 국회의원 중 기권표를 던진 단 5명을 빼고 민주당, 한나라당, 통합진보당, 자유선진당 할 것 없이 모두 찬성했다. 심지어는 셧다운제에 반대해 몇몇 서브컬쳐 언론에서는 게임계의 희망이라는 소리를 들은 민주당의 모 국회의원도 군말 없이 찬성표를 던졌다. 그렇다. 어떤 정당이든, 어떤 이념을 가진 사람이든 대다수의 국회의원들은, 더 나아가서 이 사회의 구성원 대부분은 ‘청소년 보호’를 위해서라면 어떤 규제라도 반길 사람이라는 사실을 뮤직비디오 심의 안건의 사실상 만장일치 국회 찬성으로 입증된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심의의 근간인 청소년보호법도 비슷한 방법으로 성립되었다. 지금 새누리당의 전신이자, 전두환이 만든 민주정의당의 후신인 신한국당과 지금 민주통합당의 전신이고, 김대중이 만든 정당이었던 새정치국민회의가 비슷한 시기에 같은 이름의 법안을 발의했고, 비슷한 부분이 많아서 국회에서 이 두 개의 안을 합친 뒤 무려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다른 부분이 뭐가 있었냐고? 정말 사소한 부분이었다. 법안 목적에 신한국당은 ‘자유민주주의 증진’을 운운했고 새정치국민회의는 ‘민주시민 육성’을 운운했다. 하지만 두 정당이 내놓은 법안 모두 ‘청소년 보호’라는 말이 들어갔으니 ‘유해한 요소’로부터 청소년을 ‘보호’하자는 생각은 여당이든 야당이든, 독재 세력이든 민주화 세력이든 할 것 없이 같았던 셈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심의제도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좀 나을까? 딱히 그렇진 않다. 정말 소수의 몇몇 사람을 제외하면, 심의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는 대다수의 문화 업계 종사자들이나 평론가들은 표현의 자유와 산업에 미칠 피해를 근거로 이러한 심의에 반대를 한다. 표현의 자유, 좋다. 산업 피해,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할 수 있는 발언 중 하나다. 하지만 왜 정말 근본적인 문제인, ‘청소년의 주체성이 고려되지 않는 정책’이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일까? 정말 중요한 문제를 고려하지 않는 상황에서라면 대다수의 심의 반대 운동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 1996년의 청소년보호법이 그랬고, 최근의 셧다운제가 그랬다. 뮤직비디오 심의 반대 운동도 영상물등급위원회 측에서 유예 기간을 마련하고, 유튜브(Youtube)같은 해외 동영상 스트리밍 사이트를 이용하면 법을 회피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한때 뜨겁게 달아오르던 흐름이 어느새 쏙 들어갔다. 결국 심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청소년 문제와 연계하지 않고 업계의 이익과 향유의 측면에서만 바라보고 움직였던 것이다.


어찌 보면 가장 끔찍한 것은, 심의 시행으로 인해 표현의 자유가 위축되는 게 아니라, 청소년과 관계된 정책임에도 불구하고 심의를 추진하려는 자든, 심의를 반대하는 자든 그 누구도 청소년의 주체성에 대해서 생각을 하거나, 심지어는 청소년 운동과 연계지어 행동하려는 시도조차 없다는 현실이다. ‘청소년 보호’라는 명목으로 심의를 추진하는 자들은 그나마 솔직한 편이다. 심의 목적에서부터 자신들이 청소년을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로 보지 않고, 수동적이고 미성숙한 존재로 여기고 있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심의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어떠한가. 표현의 자유를 내걸면서, 가장 심각하게 표현과 향유의 자유를 침해당하는 청소년에 대해서는 시선을 별로 기울이지 않는다. 두 세력 모두 청소년을 부차적인 존재로 여길 뿐이다.


그런 점에서, 심의의 문제를 단순히 보수적인 정권의 문제로만 한정지으려는 시도는 얼마나 위험한가. 어떤 사람들은 문제의 책임을 모조리 이명박 정권에 전가하려 하지만, 소위 ‘민주화 정권’인 김대중 정권이나 노무현 정권 시기에도 심의 문제는 그대로였다. 2011년에 법이 통과된 이후 줄창 까이는 셧다운제도 2006년 노무현 정권 후반기에 처음 정부에서 추진한 정책이었다. 내부 조율 등이 늦어져 지금에서야 추진된 것이지, 시기가 잘 맞았으면 노무현 정권 말에 셧다운제가 통과될 가능성이 높았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명박 정권 시기에 셧다운제가 통과되긴 했지만, 국회에서 해당 법안을 최종적으로 심사하는 위치에 있는 국회의원은 민주당 소속이었다.) 심지어는 전교조, 참교육학부모회, 환경운동연합 등 소위 ‘진보적 운동단체’들이 참여하고 있는 ‘아이건강국민연대’라는 곳에서는 ‘스마트폰 중독과 폭력에서 청소년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학교 내에서 스마트폰 소지를 금지하는 법안을 발의하려고 한다. 후에 전교조는 이 법안에 공식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고 해명을 하긴 했지만, 어쨌든 문화 심의나 규제 문제가 단순히 어떤 정치적 성향을 가지고 있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졌다.


한국 사회에서, 청소년은 문화를 향유할 때 주체성을 가지고서 향유할 수 없다. ‘성숙하고 주체성을 지닌’ 어른들의 손에 판단의 권한을 맡겨야만 비로소 향유할 권리를 가진다. 다른 나라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한국에서는 어른에게 판단 권한을 강제적으로 맡기는 절차를 법적으로 규정해, 사실상 공식적으로 이러한 절차에서 벗어나거나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길을 막아놓았다. 그리고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 역시, 청소년의 문제 제기는 뒷전으로 놓은 채 표현의 자유니, 문화 산업에 피해를 주느니 같은 이야기만 반복했다. 그런 점에서 셧다운제 반대 운동은 지금까지 한국에서 있었던 문화 규제 반대 운동 중에 그나마 청소년의 입장에서 바라본 운동이었다. 비록 게임업계의 반대 운동과 청소년 차원에서의 반대 운동이 합치지 않고 따로따로 벌어졌지만, 청소년이 셧다운제의 한 축이었던 여성가족부 앞에서 밤샘 농성 시위를 하고 청소년의 이름으로 헌법소원을 신청하는 등 청소년이 주체성을 갖고서 문제에 대응했던 최초의 움직임이었다.


앞으로도 한국에선 ‘청소년 보호’라는 목적을 내걸고 청소년의 주체성을 무시하고 미성숙 담론을 내거는 심의와 규제를 추진할 것이다. 어떤 정당이 집권하든, 누가 당선되든. 하지만 앞으로도 지금처럼 ‘표현의 자유 침해’만을 내걸고 반대를 하면 그 운동이 지속되긴 어려울 것이다. 청소년은 미성숙한 존재가 아니고, 나름대로의 주체성을 가진 존재이다. 청소년 운동과 결합하거나 실질적인 피해를 입는 대상인 청소년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 운동은 공허한 발자취만 남길 뿐이다. 그러니 한국의 개떡같은 문화 심의와 규제가 짜증나는 사람들이여, 정부 욕을 하기 전에 일단 청소년 운동에 시선을 돌려라.


<스카이젯>

Posted by 오승희


생각해보면 그때는 참 단순했던 것 같다. 그 날은 날씨도 더워 수업을 들을 기분도 나지 않는 날이었다. 그런 와중에 들리는 학생부장의 교내 방송. 동사무소에서 주민등록증 제작을 하러 학교로 오셨습니다. 수업을 중단하고, 부르는 반 순서대로 차례차례 과학실로 가서 한 줄로 서서 기다리세요. 정말 기쁜 소식이었다. 먼저 재미도 없는 수업을 듣지 않아도 되니까 기뻤고, 그 다음으로는 내가 드디어 ‘성인’이 된다는 소식에 기분이 좋았었다. 아직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마당에 민증이 나와도 딱히 할 일도 없는데, 그 때는 그게 왜 이렇게 좋았는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동사무소 직원이 건네준 종이에 내 이름과 주소, 주민등록번호를 적고 순순히 양 손가락에 인주를 발라 지문을 찍었다. 이 세상에 주민등록번호를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느니, 지문 날인을 거부해서 체포되었던 사람도 있다느니 같은 소리는, 한참 나중에야 진지하게 생각해봤던 일이다.


왜 나를 포함한 아이들은 그렇게 주민등록증을 만든다는 사실에 두근거렸을까? 사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주민등록증을 만든다는 행위는 정부에게 ‘지문’이라는, 매우 중요한, 그리고 고유한 생체 개인정보를 오직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는 이유로 넘겨주는 일이고, 더 나아가서는, 그런 개인정보를, 조금만 의심스러워도 경찰에게, 심지어는 편의점 알바 같은 생판 모르는 남에게 유출할 가능성을 감수하고 보여주는, 그런 용도로 쓰일 수 있는 여지를 만드는 일이다. 단순히 내 이름과 사진, 주소가 박힌 카드를 받는다는 사실이 신기해 그랬던 걸까? 그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랬으면 학생증에 만족을 하거나 동사무소로 직접 찾아가서 청소년증을 만들었겠지.(사실 그 때는 청소년증이라는 게 있는 줄도 몰랐다.) 이유는 무궁무진하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주민등록증이 자기가 성인으로 한 발짝 나아갔다는 것, 다시 말해 이 지긋지긋한 학교생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된다는 것의 상징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주민등록증을 만들고 성인이 되면 평소에는 꿈도 못 꾸던 술도 살 수 있고, 담배도 살 수 있고, 술집에 들어가서 마음껏 술과 안주를 주문할 수도 있다. 게다가 엄마 아빠 주민등록번호를 몰래 도용해서 성인 컨텐츠도 즐길 수 있다! 도저히 기뻐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씁쓸하다. 한국에 사는 청소년은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자유롭지도 않고, 자신이 주체가 되어 어떤 일을 할 수 없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청소년의 현실이, 주민등록증을 만드는 행위를 심각하고 중대하게 받아들이는 대신, 매우 홀가분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행위에 동참하게 만든다.


▲ 성인이 되면 할 수 있는 것(...)

(2012년 9월 25일 보건복지부 앞, 대학 캠퍼스내 금주조치에 항의하는 음주시위에서)


청소년은 성인이 되기 전까지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다. 앞서 말했던 술-담배를 즐길 수 없는 것은, ‘표면적으로 봤을 때’ 할 수 없는 일이다. 만약 학교와 가정의 억압한 환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작정 가출을 했다고 생각해보자. 어찌 보면 청소년이 성인이 되기 전에 스스로 독립을 선언한 것인데, 그 청소년은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할까. 최소한 한국 사회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그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청소년이 ‘미성숙’해서가 아니다. 한국 사회가, 청소년이 주체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행위를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자립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려고 해도, 근로기준법에 서는 청소년은 친권자의 동의를 받지 않으면 노동을 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에는 근로기준법 같은 노동의 기본적인 권리 따윈 가볍게 무시하는 쿨한 사장님이 전국에 널려있으므로 어떻게 알바 자리를 찾아, 최저임금도 지키지 않고 주휴수당은 ‘원래 떼먹는 것’으로 인식하는 사장 밑에서 어찌어찌 돈을 벌었다고 치자. 그렇다고 해도 중학교 3학년이 되지 않으면 은행에 돈을 저축할 수 없다. 은행법에서는 만 14세 전의 청소년이 계좌를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친권자의 동의를 받아야 만들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은행에 돈을 저금하는 대신 자기만의 비밀 장소에 꼭꼭 돈을 모아 그럭저럭 하루하루 살만큼 돈을 모았다고 쳐보자. 사람은 돈만으로 살 수 없다. 인간 생활의 세 가지 기본 요소인 ‘의식주’의 ‘주’(住), 다시 말해 집이 필요하다. 그러나 민법에서는 청소년이 부동산을 거래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합법적인 경로로는 청소년이 자신의 명의로 집을 빌려 거주할 수 없는 것이다. 심지어 숙박업소나 찜질방 같은 곳에 잠깐 묵어갈 수도 없다. 청소년 보호법상, 찜질방은 밤 10시 이후에는 청소년이 이용할 수 없고, 숙박업소에는 아예 들어갈 수가 없다. 가출이 문제가 아니라 여행, 혹은 대학 입시를 치르러 먼 지역으로 갔을 때에도 묵을 데가 없다는 얘기다. 종합해보면 청소년은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돈도 벌 수 없고, 그 돈은 안전한 곳에 맡길 수도 없고, 자신을 보호해줄 집도 구할 수 없다. 가정과 학교에서 시키는 대로, 규정하는 대로만 청소년은 살 수 있다고, 법이 규정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러한 법조항이 처음부터 ‘청소년의 자립을 막기 위해’ 제정되지는 않았다. 경제면에 종종 등장하는 ‘만 5세 아이가 주식 부자가 되었다’는 기사에서 보듯이, 어린 아이 명의로 거래를 해서 세금을 회피하려는 행위를 피하기 위해 청소년의 금융 거래를 제한하는 조항이 만들어졌다. 또한 청소년의 노동에 부모의 동의를 요구하는 것은, 지금은 많이 줄었지만 과거에 만연했던 아동 노동을 예방하기 위해서 삽입한 조항이다. 하지만 이를 감안한다 해도, 여기에는 청소년에 대한 중대한 편견이 포함되어 있다. 바로 청소년은 혼자서, 주체적으로 이러한 일들을 할 수 없는 ‘미성숙한’ 존재고, 만약 한다고 해도 이는 어른들에게 ‘이용당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전제다. 차명계좌만 해도, 청소년뿐만 아니라 금융실명제가 확립된 지금도 다른 사람 명의를 도용해서 돈세탁을 하는 일이 종종 있는데, 왜 어른의 계좌 개설은 청소년만큼 규제하지 않을까? 부동산 거래 역시 마찬가지다. 또한 고용노동부나 각 지역의 노동청은 실제 청소년이 어떤 환경에서 노동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서, 청소년의 노동 행위에 친권자 동의만 받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학교와 가정만이 청소년을 제약하지 않는다. 청소년을 주체적인 존재로 보지 않는 사회가 궁극적으로 청소년을 옥죄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청소년에게 민증을 만드는 일은 곧 자신이 자유로워지는 것과 동일한 행위로 받아들여진다. 민증을 만드는 것이 자기에게 궁극적인 자유를 주지 않고 오히려 국가에 자신을 예속시키는 일이라는 사실은, 청소년에게 중요하지 않다. (그 전에 정부에서 이를 말하지도 않고, 이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소수다.) 성인이 되는 순간 당장 이것도 할 수 있고, 저것도 할 수 있는데, 그것을 보장하는 증이 곧 자기한테 주어진다는 데 어떻게 그 열망을 막을 수가 있을까?


하루가 멀다 하고 인터넷 어느 사이트에서 주민등록번호가 유출됐다느니, 어디서 뭐가 도용됐다느니 하는 보도가 터져나오지만, 다들 그러려니 하는 눈치다. 어쩌면 한국 사회에서 주민등록제도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많은 비판을 듣거나 제대로 퍼지지 않는 것은, 한국인 전체의 25%를 차지하는 청소년이 주민등록증을 ‘해방’과 ‘자유’로 받아들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청소년의 인권이 계속 억압받는 상황 속에서 정부와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이에 별다른 문제를 느끼지 못하고 있고, ‘민증’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전국 곳곳의 학교와 동사무소에서 지문날인을 거쳐 발급되고 있다. 이렇게 공고한 구조 속에서 한국의 청소년은 오늘도 주체성을 얻지 못하고, 정보인권을 훼손하는 주민등록제도는 많은 비판을 얻는 와중에도 계속 굴러간다. ‘민증’은 청소년을 자유롭게 하지 않는다. 대신 또 다른 억압의 길로 인도할 뿐이다.



<스카이젯>




Posted by 오승희


대한민국 헌법 제1조 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제24조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선거권을 가진다.


위는 대한민국 헌법입니다. 대한민국 헌법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입니다. 무릇 민주주의 국가라면 모든 국민의 정치참여를 보장하여야 합니다. 민주주의는 모든 국민의 참여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삐걱거리고 굴러가지 못하는 체제이니까요. 


헌법에는 중요한 정치적 권리 중 하나인 선거권을 모든 국민이 가진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정치에서 배제된 자들이 있습니다. 다들 쉽게 알아맞히시겠죠. 바로 청소년입니다. 


청소년도 엄연한 사회 구성원이기에 사회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정치적 권리를 마땅히 보장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청소년의 선거권은 법률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오직 그 뿐인가요, 국회의원 선거권이 없는 자이기에 선거운동기간동안 선거운동을 할 수 없기도 합니다. 정당에도 가입할 수 없죠. 또한 그러한 제도적 차별과 더불어 청소년은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적기에 미숙하다는 편견으로 청소년의 주체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적 차별도 만연합니다. 


어리다는 이유로, 아직 미숙하다는 이유로 청소년에게 정치는 안 된다는 현실에 문제의식을 가진 여러 청소년들과 '희망의 우리학교',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를 비롯한 단체들이 모여 작년 10월 28일, 청소년의 정치적 기본권 ‘내놔라’ 운동본부가 출범하였습니다. 


내놔라 운동본부는 청소년이 온전한 시민으로 인정받는 사회를 지향합니다. 내놔라 운동본부의 구체적인 요구안은 ▲선거권·피선거권 내놔라(선거권·피선거권·정당참여 등), ▲모이고 외칠 권리 내놔라(집회·1인시위 등 결사의 자유, 언론·표현의 자유), ▲학교 민주주의 내놔라(동아리·학생회·자치활동 등), ▲판단할 권리 내놔라(당사자에게 영향을 끼치는 정책 등에 대해 결정하기), ▲우리 동네 내놔라(지방자치)로 다섯 가지입니다. 


작년에 내놔라 운동본부는 청소년의 정치적 기본권 보장 서명캠페인과 ‘대선일 전국 동시다발 투표소 앞 1인시위’를 진행하였습니다. 올해에 내놔라 운동본부는 선거권·피선거권 연령 낮추기 운동을 전개하려 합니다. 선거권·피선거권 연령 대중인식조사부터 토론회와 집회까지 연속성을 가지며 활동할 계획입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내는 것은 당연한 시민으로써의 권리입니다. 그러한 권리가 없다는 것은 자신의 사회의 주인이 아니라 ‘노예’에 가깝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청소년도 사회의 주인으로, 온전한 시민으로 인정받는 사회를 위해 함께해 주세요!




<걸짜>

Posted by 오승희


▲ 박정희 정권 말기인 1978년에 있었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포스터. 뭔가가 이상해 보인다면 기분 탓입니다. (포스터 제공: 중앙선거관리위원회선거도서관)



2012년에는 큰 선거가 두 번 있었다. 4월에는 제19대 총선이 있었고, 12월에는 제18대 대선이 있었다. 총선이 있던 4월 11일과 그리고 대선이 있던 12월 19일, 흥미로운 광경이 전국의 투표소에서 펼쳐졌다. 총선 때에는 ‘청소년의 정치적 권리 보장을 위한 원탁회의’를 중심으로, 대선 때에는 ‘청소년의 정치적 기본권 “내놔라” 운동본부’를 중심으로 뜻을 모은 사람들이 청소년에게도 투표권을 줄 것을 요구하며 각자 전국에 산재한 투표소 앞에서 청소년 참정권을 요구하며 1인 시위를 벌인 것이다.


한국에서 투표권을 부여받는 나이는 만 19세다. 그것도 원래 만 21세가 되어야만 투표를 할 수 있었던 것이 1960년에 20세로 하향 조정되었고, 21세기에 들어와서야 2005년에 공직선거법상 투표 가능 연령이, 2007년에 국민투표의 투표 가능 연령이 조정되면서 그렇게 된 것이다. 공직선거법상 투표 가능 연령 조정 당시 만 18세 안과 만 19세 안, 그리고 현상 유지 안이 격돌했으나, 결국 만 19세 안으로 정리됐다.

선거는 하나의 상징이다. 제도적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지의 여부를 판단할 때, ‘4대 원칙을 갖춘 선거가 주기적으로 열리는지’도 중요한 고려사항이다. 당연히 선거가 정치의 전부가 아니지만, 선거에서 투표를 한다는 것은 가장 쉽게 참여할 수 있는, 참정권의 기본 중 기본이다. 대한민국에서는, 만 19세가 되지 못한 청소년들은 제도상으로 완벽하게 선거의 영역에서 빠져있다. 선거법상 만 19세가 되어야만 투표권을 얻으며 만 25세가 되어야만 각종 선거의 후보로 출마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청소년들은 정치적 의사를 표출할 수도 없도록 되어 있다는 점이다. 공직선거법 제60조에 청소년은 ‘선거운동을 할 수 없는 자’로 분류되어 있으며, 이 때문에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발언을 할 수 없다. 작년에 제59조가 개정되어 SNS상에서의 정치적 의사 표현이 자유로워졌지만, 청소년은 그에 해당되지 않는다. 게다가 청소년은 원칙적으로 특정 정당에 가입할 수도 없다. 물론 청소년의 정치적 권리를 배제할 수 없다는 취지에서 청소년 당원을 받는 정당도 있는데, 진보신당이 대표적이다. 통합진보당 또한 통합 이전의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청소년 당원의 가입을 받았고, 진보신당과 마찬가지로 청소년위원회도 갖추고 있었으나, 경선부정 사태가 불거지고 검찰의 수사가 진행되자, 청소년 당원들의 당원 자격을 박탈해버렸다. 당원 명부를 검찰이 압수하고 있는 상황에서 청소년 당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랬다는 해명이 있었지만, 청소년을 정치의 주체로서 인정하지 않는 생각이 기저에 깔려있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 2013년 어린이날에 열린 ‘어린이날 컨퍼런스’ 모습. 어린이날은 원래 어린이들의 주체적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찾기 위해 집회 등 정치적 행동을 함으로써 만들어졌다. (사진제공: 이장원님)

한편 청소년이 집회를 통해 의사를 표출할 권리 자체가 법으로 막혀있지는 않다. 2008년 촛불 정국 때 수많은 청소년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갔음을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기본적인 권리 또한, 대다수의 청소년들의 일상을 맡고 있는 공간인 학교의 학칙이 가로막는다. 학교 측은 학생들이 집회나 시위 등의 방식으로 정치적 의사를 표출하는 데 대해 ‘학교 명예 실추’나 ‘교사 지시 불이행’ 등의 명목으로 불이익을 주겠다며 위협을 가하곤 한다. 실제로 2008년에 ㅅ고등학교에서는 촛불집회에 참여했던 학생이 학생회장으로 출마하려는 것을 학교 측에서 가로막아, 해당 학생이 인권위에 진정을 냈던 일도 있었다. 이렇게 청소년의 삶은 애초에 정치와는 완전히 유리된 상태에 놓여있다.

‘성숙’과 ‘미성숙’을 가르는 것은 권력관계

왜 청소년은 투표권을 갖지도 못하고, 정치적인 의사 표현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며, 정당에 가입해 정치적인 활동을 할 수도 없도록 되어 있는가? 나이가 적으면 ‘미성숙’하기 때문인가? 경험적으로, 우리는 나이가 성숙함을 보여주는 척도로서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이가 많아서 ‘성숙’하다고 할 것이라면, 1941년생으로 올해 73세가 되시는 이명박씨나 그의 형님인 1935년생 이상득씨는 모든 판단을 완벽하게 내릴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 분들은 ‘도덕적으로 완벽’할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완벽’한, 그야말로 성숙의 극을 보여주는 사람이어야 한다. “청소년이 정치를 알기에는 미성숙하다”라는 생각은, 사실은 그 근거가 희박한 편견일 뿐이다. 일단 생물학적으로는 만 15세 정도면 ‘성인’의 뇌와 거의 유사할 정도로 성장한 뇌를 갖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20대가 지나가면 오히려 뇌는 조금씩 퇴화하기 시작한다고도 한다.

설령 청소년의 뇌가 생물학적으로 ‘미성숙’하다고 해도, 이것이 청소년의 참정권을 가로막아야 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만일 ‘충분히 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참정권을 가질 수 없다면, ‘판단력이 흐려지는 나이이기 때문에’ 참정권을 가질 수 없는 경우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감히 누가, 어떤 기준으로 남의 ‘판단력 수준’을 평가한단 말인가? 전국민을 상대로 ‘뇌 기능 수준’을 평가하는 검사라도 벌이겠다는 생각이 아니고서야 이런 주장은 무의미하다. 참정권은 헌법으로 보장되어 있는 국민의 기본권 중 하나다. 단지 이것이 일종의 편견 때문에 가로막혀야 한다는 것은, 우리 나라의 민주주의가 그만큼 후진적이라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 진보신당 청소년위원회는 한국의 대표적인 청소년 정치조직이다. 사진은 2012년 노동절 행진 때 등장한 피켓.


독일에서는 선거권이 만 16세부터, 피선거권이 만 18세부터 주어진다. 독일에서는 10대나 20대의 나이로 선거에 출마하는 후보자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으며, 실제로 19세의 나이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도 있다.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악의 축’으로 지목했던 이란은 15세, 중앙아메리카의 니카라과가 16세, 심지어 북한조차도 17세부터 선거에 참여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물론 전혀 민주적인 선거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북한에서의 선거권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선거권이 충분한 의미를 가질 만큼 민주주의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논외로 한다 해도, 특정 나이를 기준으로 ‘성숙’과 ‘미성숙’을 가르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정도는 알 수 있다.

‘성숙’과 ‘미성숙’을 가르는 것은 사실 권력관계가 대단히 깊게 개입된 문제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 처음으로 선거권을 손에 쥐었던 이들은 극히 일부의 부르주아 남성들이었다. 이들에게는 여성은 ‘정치적으로 미성숙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고, 서민들은 ‘국가에 충분히 세금을 납부하지 않으므로’ 참정권을 가질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영국에서는 생물학적으로 남성인 귀족, 자산가 등에게만 선거권이 주어지다가 1918년에 시민대표법이 제정되어서야 비로소 만 21세 이상 남성들과 30세 이상의 여성들이 ‘성숙함’을 인정받았고, 성 구분 없는 보통선거권은 1928년에야 확립되었다. 남아공에서는 흑인들이 ‘미성숙한’ 존재였다. 지금, 여성이나 서민, 흑인들을 이런 식으로 차별하며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게 한다면 시대착오적이라는 비난을 받을 것이다. 청소년의 참정권 요구는, 여성이나 유색인종이나 서민들이 당대의 지배계층이었던 남성, 백인, 부유층에 대해 참정권을 요구하던 그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혹자는 청소년에게 표가 주어진다면 그들의 표가 누군가의 입김에 의해 좌우되거나, 혹은 뚜렷한 주관이 없이 아무에게나 던져지거나, 또는 포퓰리즘에 쉽게 휘둘릴 수 있기 때문에 제한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되물어보자. 과연 지금 유권자들, 그러니까 ‘성인’들의 정치는 어떤가? 뉴타운에, 혹은 자신에게는 얼마 돌아가지도 않을 감세에, 토건 정책에 표를 준 것은 포퓰리즘인가 아닌가? 아이돌 가수 같은 이가 후보로 나서면 청소년들은 죄다 그를 찍을 것이 아니냐는 비아냥도 들린다. 하지만 그렇게 비아냥대는 성인들은 공당의 전략회의를 도청한 한선교를 그저 익숙하다는 이유로 재선시켰고, ‘데칼코마니의 영웅’으로 돌아온 ‘태권도 영웅’ 문대성을 당선시켰다. 그러나 그 누구도 지금 유권자들의 표를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한선교나 문대성을 당선시킨 유권자들을 비난할 이유도 없다. 그들은 자신의 투표를 했을 뿐이다. 시민은, 설령 그 결정이 현명하지 못하다 하더라도, 자신의 신념에 따라 자신의 대표자를 뽑아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킬 권리를 갖는다. 또한 선거 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여러 정치 영역에 참여해 목소리를 낼 권리도 갖는다.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자신의 목소리’를 내어 정치 영역에 관철시키는 것이 바로 1인 1표의 대의제 민주주의다. 자기가 좋아하고 신뢰하는 사람을, 혹은 자신에게 유리한 공약을 제시하는 사람을 대표자로 내세울 권리는 헌법에 보장되어 있다. 여기에서 청소년과 ‘성인’이 구분되어야만 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러나 지금의 청소년들은 자신의 대표자를 내세울 수도 없고, 자신이 대표자가 될 수는 더더욱 없으며, 정치적 의사표현의 자유마저 제한당하고 있다. 다원주의를 기본적인 가치로 삼고 있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어느 한 집단의 목소리가 전혀 정치 영역에 나오지 못하는 것은 재앙에 가까운 것이다. 청소년들의 목소리가 정치 영역에 나오지 못함으로써 정치권은 청소년과 관련된 정책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고, 순전히 ‘성인’들의 시각에서만 법이 만들어지고 집행된다. 이런 상황은 심지어, 청소년이 그 직접적인 이해당사자가 되는 교육감이나 교육의원 선거에서도 마찬가지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자살하지 못하게 창문을 조금만 열리도록 만들어야 한다”라고 말하는 이가 교육감으로서 교육정책을 집행하고 있는 상황은, 아무리 봐도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의 상황은 아닌 것 같다.

‘탈꼰대’, 청소년에게도 정치를!

청소년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차원의 ‘꼰대질’은 매우 오랜 시간 동안 쌓여온 장유유서의 신화와 입시 문제를 끼고 있다. 나이에 따른 권력 서열이 정해져있다 보니 나이가 많은 사람이 어린 사람에게 대뜸 반말을 던지는 것은 일상다반사, 동등한 입장에서의 토론 또한 이루어지기 어렵다. 무슨 말이라도 할라치면 “네가 뭘 안다고…”로 시작되는 ‘꼰대질’이 날아든다. 독일의 청소년들이 김나지움(고등학교에 해당하는 독일의 교육기관)에 방문한 정치인들과 정치 이야기를 나눌 때에 한국의 청소년들은 9월 평가원 모의고사 문제지 속의 미적분과 씨름한다.

4월 총선이 끝나자마자 한때 “20대, 특히 여성의 투표율이 낮다. 너희들에게 정말 실망했다.”라는 식의 글들이 SNS를 타고 떠돌아다녔다. 물론 아무런 근거가 없는 이야기였고, 곧 출구조사 표본을 바탕으로 한 연령별 투표율 집계가 나오자 쏙 들어가 버렸다. 12월 대선이 끝나자마자 이런 비난은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출구조사 결과 20대 투표율이 65% 정도였는데, 50대의 89.9%와 비교하면 매우 낮다, 젊은이들이 잘못했다, 라는 식이었다. 청소년에게 투표권도 안 줘, 정치적 발언도 못하게 막아, 뭐라도 할라치면 나이와 입시 얘기로 가로막아, 이러다가 갑자기 만 19세가 되자마자 “투표 안 하면 개새끼!”라는 소리들을 하는 것이다. 청소년이 대체 뭘 했다고. 아니, 청소년이 대체 뭘 ‘할 수 있었’다고. 최소한 권리는 줘놓고, 그리고 그 권리를 쓰는 방법은 알려줘 놓고 뭔 소리라도 해야 맞는 순서 아닌가?

이제부터라도 청소년의 정치 참여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진지하게 논의가 되어야 한다. 기본적으로는 투표 가능 연령을 다시 좀더 낮추는 작업도 이뤄져야겠지만, 그보다 시급하고 근본적인 것은, 청소년은 결코 정당 가입이나 정치적 의사 표출을 할 수 없도록 되어 있는 부분부터 고치는 것이다. 청소년 활동가 ‘검은빛’씨는 “정치라는 것은 사실 국회의원을 뽑는 것만은 아니에요. 발언을 하는 것, 의견 표출 자체가 정치이고, 굳이 선거권 연령에만 논의가 국한될 이유가 없어요.”라고 말했다. 투표권 연령에 관한 논의는 사실 ‘적정 연령’에만 매몰되어 소모적인 논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정치는 선거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선거는 정치의 아주 조그만, 부차적인 영역에 불과하고, 진짜 정치는 평소에 이루어지는 정치적 발언이나 행동, 정당 활동 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청소년에게, ‘진짜 정치’의 장이 열려야 한다. 그것이 ‘진짜 민주주의’로 가는 길이다.

▲ 성숙과 미성숙, 애매~합니다잉~? (2012년 1월, 아수나로 전주지부 청소년 인권 아카데미에서)


<세치>

Posted by 오승희

첫 섹스의 기억

내 첫 섹스는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을 코앞에 둔 어느 날이었다. 학생이었던 나는 부모님과 한 집에 살고 있었고, 나보다 1살이 많았던 상대방 역시 그랬다. 그래서 내 첫 경험은 아플 수밖에 없었다. 학생 신분이었던 나와 상대방에게 허락된 공간은 기껏해야 ‘아파트 계단’ 혹은 ‘빌라 옥상’이었고, 피임의 중요성은 충분히 알았지만, 교복을 입은 우리에게 ‘콘돔’을 팔려는 사람은 없었다. 빌라 옥상과 같은, 청결하지도 안전하지도 않은 곳에서, 누가 볼까 벌벌 떨며 나눴던 관계의 끝은 ‘임신’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내 첫 섹스는 참 많이도 아팠다. 그 후에도 다른 사람과 몇 번 더 관계를 맺었다. 요령껏 콘돔을 구할 수는 있었지만, 부모님께 섹스를 했다는 사실을 들켰다. 온갖 폭행과 폭언을 견뎌야 했다. 10대 시절 나의 섹스는 늘 그렇게 아팠다. 만약 그때의 나에게 타인과 안전하게 섹스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 허락되었다면 어땠을까. 청소년에게 독립적이고 경제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공간들이 더 많이 제공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10대의 임신에 대한 우려가, 안전하게 피임을 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의 제공으로 이어졌다면 어땠을까. 부모님께 혹시라도 들킬까 섹스를 하고 난 후에는 방에서 나오는 것조차 못했던 두려움이, 나의 삶에 대한 공감과 지지로 이어졌다면, 그랬다면 내 섹스는 그리 아프지 않았을 것이다. 


첫 투표의 기억

생애 처음으로 대통령 선거 투표를 하면서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선거의 결과는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참담하고 암울했지만, 그 이전에, 선거와 투표라는 것 자체가 나의 10대 시절 섹스에 얽힌 아프고, 억울하고 서러운 기억들과 오버랩 되었다. 투표를 할 수 없는 ‘미성년자’의 신분에서 바라본 선거와 투표는 어른들만의 잔치였다. 더 나은 대한민국을 만드는 것도, 개개인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정책과 공약을 결정하는 것도, 우리를 대변할 수 있는 대표자를 뽑는 것도 모두 어른들만 가능했다. 얼마나 억울하고 서러운가! 유권자는 ‘성숙하고, 사회적으로 공인된’ 성인에게만 주어지는 특권 같은 것이며, 투표라는 행위는 유권자들만 행할 수 있는, ‘성스러운’ 어떤 것으로 존재한다. 섹스도 그렇지 않은가? ‘성숙한’ 이들의 영역에 포함되지 못한 청소년들이, 그 ‘성스러운 행위’를 요구하는 순간, 그것은 어떤 금기이자 위험한 행동으로 간주되어 버린다. 자라나는 아이들은 정치적 이념에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지겹도록 들었고, 그래서 투표란 게 대단한 것인 줄 알았다. 정치는 더 대단한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내 첫 투표는 참 별 거 아니었다. 정치는 더 별 거 아니었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쓰는 것도 정치다. 이 글을 읽는 것도 하나의 정치다. 세상에 정치적이지 않은 것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 청소년도 정치의 중심이자 주인이 되겠다는 외침은 그저 공허할 뿐이다. 내 몸의 주인이자 결정권자가 되겠다는 외침 역시, 너무나 당연한 만큼 공허하고 허무하다. 이 간극을 어떻게 좁혀야 하나. 섹스든 정치든 혼자서 다 해먹으려는 이 욕심쟁이들아!


미성숙한가 미성숙해지는가

나는 청소년에게만 금지된 모든 것들을 청소년 역시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술과 담배가 몸에 나쁜 것은 맞지만, 그것 역시 청소년들이 선택하고 결정하고 책임질 문제이다. 아울러 어떤 공부를 할 것인지, 어떤 정치인을 뽑을 것 인지, 혹은 어떤 삶을 살 것인지- 그 모든 것들을 청소년들이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청소년들이 스스로 무엇을 결정하기도 전에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하고 강요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이다. 청소년이 행하는 행위에 대한 가능과 불가능이 존재하는 현실 이면에는 미성숙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있다. 


청소년은 ‘미성숙’하다는 것, 그리고 ‘미성숙한 이들’의 권리는 제한 당해도 마땅하다는 전제는 이처럼 청소년들의 현실을 비참하게 만든다. 내 18살의 섹스가 ‘죄’였고, 투표가 ‘불가능’이었듯 말이다. 피부색으로, 성별로, 장애의 유무로, 신분과 같은 요인으로 한 개인의 사회적 위치가 결정되고 차별의 근거가 되는 것처럼, 나이에 따른 차별도 분명 존재한다. 나이가 어리면 누군가의 보호와 통제가 있어야 하며, 스스로 무언가를 결정하기엔 경험이 부족하다고들 말한다. 그렇기에 청소년은 실수할 권리나 스스로 성찰하고 발전해 볼 기회도 박탈당한다. 많은 청소년들을 옭아매고 있는 굴레다. 우리 사회가 이 과정들을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혹은 강요하면서 외면해버린 질문들이 있다. 보호와 통제를 핑계로 청소년들의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 온당한지, 어떤 결정을 하게 되었을 때 실수할 권리마저 ‘그럴 줄 알았다’는 조롱으로 빼앗아 버린 것은 아니었는지, 그리고 그 실수들을 통해 성찰하고 반성하며 마침내 ‘성숙해질 기회’조차 밟아버린 것은 아닌지, 그렇게 ‘미성숙’을 우리 사회가 재생산 해내고 있지는 않은지. 지금껏 우리사회는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답은커녕, 사회와 학교, 또 많은 기성세대들은 미성숙의 굴레를 생산해내는 주체가 되지는 않았는가? 


김 여사의 교훈

잊을 만하면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오는 수많은 ~녀의 이야기를 한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일명 ‘김여사 사건’도 하나의 사례였다. 한 여성운전자의 차에 학생이 치이는 장면이 담긴 블랙박스 영상이 공개되면서, 여성운전자들 전반에 대한 비난이 거세게 일었다. 이 현상에 대한 어느 인터넷 기사는 이렇게 지적했다. 그 사고를 일으킨 운전자가 ‘남성’이었다면 과실이나 자동차의 고장, 혹은 사건의 전후사정을 살피며 사건의 원인을 찾지만, 여성이면 근본적인 원인 보다는 ‘여성’이라는 사실부터 비난하고 본다는 것이다. 이 차이는 여성과 남성이 가지는 사회적 지위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글쓴이는 지적했다. 여성이 남성에 비해 사회적으로 약자이며, 만만한 상대이기 때문에, 이런 만만한 상대를 욕하고 비판하며 비겁한 정의감을 느끼려는 욕구가 이 ‘김여사 현상’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김 여사의 처지와 청소년의 처지는 꼭 닮아있다. ‘개념녀’와 ‘기특한 10대’의 불편함 역시 꼭 닮아있었다. 김 여사는 ‘여성’이었기에 만만했다면, 청소년은 ‘10대’이기에 만만한 것 이다. 그렇기에 같은 ‘죄’라도 그 무게는 확연히 다르다. 어떤 범죄를 일으킨 대상이 10대라면 그 앞에는 꼭 ‘무서운’, ‘겁 없는’과 같은 수식어가 붙지만, 나는 단 한 번도 ‘무서운 40대’라는 제목의 기사를 본 적이 없다. ‘기특한 40대’라는 소리도 못 들어봤다. 비겁한 사회다. ‘김여사’가 가진 정체성을 약점 잡아 공격해 상처를 입히면서까지 얻고 싶었던 그 무엇이 ‘비겁한 정의감’이었다면,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보호와 통제를 강조하며 미성숙의 굴레를 덧씌워 당신들이 누리고자 했던 것은 결국 ‘미성숙한 성숙’이다.


차별은 이렇게 다양한 가면을 쓰고 누구에게나 행해질 수 있다. 그렇기에 ‘그 누구도’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움직임의 중심에는 청소년이 있다. 그리고 그들의 절박한 외침이 있다. 사회에서 가장 ‘아랫것’ 취급을 받는 이들도 차별 받지 않는 세상이야말로 정말 ‘차별 없는 세상’이니까. 툭하면 무시당하고 찌질하다는 대접을 받는 이들이 온전하게 고귀한 존재로써 인정받을 수 있는 세상이 정말 ‘평등한 세상’이니까. 미성숙하고 불완전하다 여겨지는 그들이 스스로 성숙해지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약 없이 보장받을 수 있는 세상이 정말 ‘성숙한 세상’이니까. 그런 세상이, 나이 어린 그들도, 성소수자인 그들도, 장애가 있는 그들도, 가난한 그들도, 여성인 그들도 존엄하세 숨 쉬며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니까. 

Posted by 오승희

밑바닥에 깔린 청소녀 알바

44만원에 그치지 않는 노동현실

윤티



44만원, 청소년 비정규직 알바

나는 청소녀 알바생이다. 시사in에서 얼마 전에 나 같은 사람들에게 이름붙이길, 일명 “44만원 세대”라고 했다. 나는 여성이며, 청소년이고, 말하자면 비정규직 노동자다. 요즘 청소년노동인권 토론회나 언론 인터뷰 등에서 내가 이런 존재라는 것을 여러 번 우려먹고 있는 사실이긴 하지만 이게 뭐 비밀도 아니고 계속 말해서 닳고 닳을 얘기도 아니니까 괜찮지 않을까? ㅋㅋ 그래서 이번에도 내 경험을 가지고 한 번 청소녀 알바생들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탈학교 청소년인 나는 부모의 눈치 압박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배우고 싶은 것들을 내가 번 돈으로 배우고 싶었다. 그래서 돈이 필요했다. 그렇게 알바를 시작했고, 내가 처음 일했던 곳은 패스트푸드점이었다.

패스트푸드점에서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나는 카운터에서 계산하는 일을 하였다. 내가 하는 일은 뒤편에서 햄버거를 만드는 남자애들의 일보다 더 편한 일인 것처럼 느껴졌고, 그래서 처음에는 (어떤 기준으로 책정된 건지 잘 몰랐지만) 남녀의 시급에 차이가 있었지만 그러한 차이에 대해 별 감각이 없었다.

하지만 일을 하면 할수록 이게 그리 편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면 할수록 진이 빠진다고 해야 할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그냥 계산대를 두드리고 주문을 받는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여성다움’을 같이 팔고 있었다. 일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서야 알았다. 난 주문을 하러 들어오는 손님들에게 맑은 목소리를 선사해야 했고, 버거를 만드느라 지친 몸에 못지않게 스스로를 여성스럽게 가다듬고, 언제나 웃는 얼굴을 보여야 하는 ‘험한 일’을 해야 했다.



청소녀들, 돈을 벌려면 성을 이용하라구?


어쨌든 돈은 벌어야 했기에 패스트푸드점 알바를 그만두게 된 뒤에도 다른 일을 구하였다. 그런데 그 일이 참 커다란 ‘일’이었다. 사무직 일이었는데, 처음에는 일주일에 사흘 정도만 나가서 서류 정리 조금 하면 되는 일이라고 했다. 하루 4~5시간 일하고 일당은 2만원이라고 했다. 그런데 면접을 보러 갔는데 가자마자 내게 설거지와 청소를 할 수 있겠냐고 물어보더라. 자기가 혼자 일하고 있는데, 그런 일들을 못하고 있다고. 이래서 여자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때 깨달았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집에서도 잘 하지 않는 일이었지만 돈이 필요하니까 한다고 얘기했고, 그렇게 그 사장의 사무실(인지 집인지)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주급을 받는 날, 그 기러기 사장의 무언가를 요구하는 눈에 나는 큰 반항 한 번 못하고 ‘당해야’ 했다. 처음엔 다리를 쓰다듬더니, 나중에는 안아달라고 했다. 그 상황에서도 아직 돈을 받지 못했다는 생각에, 그냥 박차고 나와 버릴 수도 없었던 그 때를 생각하면, 더 치가 떨린다. 나는 일을 하러 갔는데, 그 사장이 원한 건 내가 생각하는 일이 아니고 다른 일이었다는 것이 무서웠다. 여성청소년이 돈을 많이 버는 일을 구하려면 일단 이런 수모는 미리 각오하고 들어가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며 그 오피스텔을 빠져 나왔다.

사실 처음엔 이런 일을 당했어도, 혹시나 있을지 모를 사장의 해코지가 두려워서, 또는 이제 와서 하소연해봤자 뭐가 있겠나 싶은 마음에, 내 마음 속에만 꽁꽁 숨겨왔던 것 같다. 많은 청소녀 알바생들이 그러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렇게 당당하게 자신이 겪은 일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 청소년 알바를 모집하는 광고. <사진 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밑바닥 노동, 청소년 노동인권 현실


얼마 전인 11월 27일에 ‘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에서 발표한 ‘청소년 노동자의 노동인권실태’를 보면, 청소년들이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88만원 세대만도 못한 44만원 세대인 청소년 알바. 그래서 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는 이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할 때, '밑바닥 노동'이라는 표현을 썼다.

시급이 3770원이었을 때도 2100원, 2500원 등등 햄버거 한 개 값만도 못한 시급을 받으며 청소년 알바는 그렇게 '헐값노동' 취급을 받아 왔다. 그나마 올해부터 시급이 4000원으로 올랐다고는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시궁창이다. 임금뿐만 아니라 노동 환경 또한 청소년 노동자들에겐 가혹하다. 실태조사 결과 발표에 따르면, 일하는 도중에 휴식 시간과 휴식 공간의 여부를 묻는 질문에 대해 '휴게시간 따로 없다/휴게실 없다'고 답한 비율이 각각 62.0%, 62.8%로 꽤나 높게 나왔다. 근로기준법에도 4시간 일을 하면 30분은 꼭 쉴 수 있게 해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지만, 청소년 노동자들에겐 쉬는 것도 사치일 뿐인 것 같다. 나도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할 때 매일 똑같은 버거만 먹으면서 좁은 곳에서 딱 30분 쉬게 해주었던 기억이 있는데, 그 30분이 너무 짧게 느껴졌으니까.

우리가 청소년이기 때문에 고용주(비청소년)들은 우리를 더 쉽게 대한다. 실제로 어떤 청소년은 일하는 시간보다 늦게 도착했다고, 손을 들고 벌을 서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청소년'노동자가 아니었다면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일테다. 일단 '청소년'에 대해, 거기다 공부만 죽어라 열심히 해야 할 청소년이 '알바'라는 것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 딱히 칭찬해주지 않는 사회이기 때문에 그 사회의 시선으로 보면 우리는 너무나 만만한 존재다. 그래서 서비스업, 주문을 받는다거나, 전화를 건다거나 하는 업종에 있다 보면 손님들까지 우리를 막 대할 때가 있다.

▲ 최저임금위원회 앞에서 청소년 노동자들이 최저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용모단정(?)과 밑바닥을 벗어날 날은


나도 일을 하고 싶고, 돈을 벌고 싶다. 하지만 확실히 변하지 않는 건, 여성청소년에게는 주어진 일자리조차도 별로 없다는 것이다. 힘들게 일하고 돈 많이 주는 알바는 난 할 수 없다. 하고 싶어도 못한다. 편의점 야간알바는 대부분 남자를 뽑고 오토바이배달이나 다른 배달 쪽 일도 거의 남자가 대부분이다. 청소년 알바도 성별분업이 되어 있다. 여성들은 상냥하고 예쁘고 얌전한 일, 남성들은 힘쓰고, 몸 부딪히고, 강하고, 험한 일. 우리는 그런 식의 험한 일은 여성들의 것이 아니라는 걸 계속 교육받아왔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대중매체들에서도 여성의 직업과 남성의 직업은 확연한 차이가 있다고 보여준다. 그리고 남성 직업인데 그 일에서 성공한 여성들, 소위 말하는 '여성 엘리트' 을 보여주며, 이례적인 일이라는 투로 말하곤 한다. 그러면서 다른 여성들을 향해 말한다.
"너도 네 재주껏 해봐."
남성은 능력만 있으면 된다고 하지만 여성은 능력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말이 있다. 다시 내가 알바를 구할 때는 '용모단정'이라는 조건에 맞추기 위해 시간을 써야할 것 같은 두려움이 스물스물 생겼다.

여성청소년으로 노동을 한다는 것은, 안 그래도 '밑바닥 노동'인 청소년 노동에서 그 '밑바닥'을 뚫고 한참 더 내려가야 할 것 같은 느낌이다. 그것은 비슷한 일을 하는 것 같은데 (안 그래도 초초저임금인) 시급에 남녀차가 있는 것이기도 하고, 손님들을 대할 때 아무리 토 나올 것 같은 손님을 만나더라도 언제나 생글생글 웃어야 하는 것이기도 하고, 주급 더 올려 줄테니, 애인이 되어달라는 마초 아저씨들의 더러운 말을 시도 때도 없이 들어야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성과 청소년, 여성 청소년의 노동 현실은 언제쯤 밑바닥을 벗어날 수 있을까.

Posted by 오승희



국회도서관은 청소년을 두려워 해?




전자책의 등장으로 종이책의 수요가 줄어들었지만- 국회 옆에 있는 국회도서관은 개관 60년을 바라보고 있는 중입니다. 60년 동안, 장소, 장서 수, 시스템 들이 개편됐지만, 아직 바뀌지 않은 것들이 많습니다. 그 중 하나가 제가 이번에 이야기할 주제입니다. 바뀌지 않은것들은 많지만- 제가 이야기 할 주제는, “청소년의 출입 제한”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국회도서관 운영 규칙(2010. 2. 24일 전부개정)에도 나와있습니다,

(가장 근접한 쪽으로 인용했습니다.)

제4조(대상자) 법 제2조제3항에 따른 도서관봉사를 받을 수 있는 대상은 대학생 또는 18세 이상인 자, 그 밖에 도서관자료가 필요하다고 도서관장이 인정하는 자로 한다.
                    (출처: 국회법률지식정보시스템)


국회도서관 홈페이지에도 잘 나와있습니다.

국회도서관 홈페이지- 자주 물어보는 질문
Q.고등학생인데 도서관을 이용하려고 하는데 가능합니까?
A. 국회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자료는 입법정책지원을 위한 전문서적 등으로 중·고등학생이 이용하기에는 부적합하므로 공공도서관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국회도서관의 열람대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 전·현직 국회의원 및 국회소속공무원
- 18세 이상인 자(신분증 지참)
- 대학생(학생증 지참)
- 기타 도서관 소장자료가 필요하다고 관장이 인정한 자



이렇게 청소년이 입장 및 사용이 안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국립중앙도서관 역시 16살 미만의 청소년들은 이용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자, 이제 국회도서관이 주장하는 논리에 반박해본다면-

국회도서관 측에서는 청소년이 이용하기에는 어려운 전문서적들이 많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청소년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도 일정한 잣대를 대서 당신이 어떤 책을 읽을 수 있나 없나 수준을 판별하긴 어려운 일입니다. 나이를 기준으로 하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또, 그게 도서관 이용을 금지하는 이유가 되는 것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또한 국회도서관은 출간하는 모든 서적을 의무적으로 납본해야하는 납본도서관입니다. 한국에서 나온 모든 책들이 다 있다는 겁니다.)

청소년이 들어간다면 청소년들이 시끄럽게 할 거라는 이유를 내세우기도 하는데요, 청소년들은 더 시끄럽게 굴 거라는 편견만으로 모든 청소년들의 권리를 막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도저히 도서관 이용을 할 수 없을 만큼 방해를 하는 사람들의 경우는 그 사람들이 도서관을 이용 못하게 하면 될 것입니다.

국회도서관을 18세 미만에게도 개방할 경우 수요를 감당할 수 없다는 논리를 대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무리 착각은 자유라지만, 진심으로 국회도서관이 그렇게 청소년들에게 인기가 많은 곳인 줄 아는 걸까요? 국회도서관에서 공부하면 서울대 간다는 소문이 나서 청소년들 수백명이 한꺼번에 찾아가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국회도서관은 청소년들에 대해 참 이상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18세 미만의 청소년들이 국회도서관을 이용하느냐 마느냐. 16세 미만의 청소년들이 국립중앙도서관을 이용하느냐 마느냐.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국회도서관은 18세 미만은 이용할 수가 없는 거, 국립중앙도서관은 16세 미만은 이용할 수가 없는 거, 그게 그냥 불합리하고 억울한 겁니다.

국회도서관이 아까도 말했듯이, 60주년이 가까워지는 만큼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더욱 좋은 지식을 (지식에 질이 따로 있는건 아니지만) 차별 없이 제공할 수 있다면, 그것만큼 국회도서관의 의미가 강조될 수 있다면 정말 좋은 역할을 수행할 수 있지 않을까요?


Posted by 오승희



스무살이 된 걸(girl)이 보내는 편지


엠건


작년 겨울(벌써 작년이라니 믿을 수가 없다),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를 모티브로 영상을 하나 찍으려 했었다. 나와 내 친구들을 통해 막 20대에 들어선 여자애들의 이야기를 해보겠다며 시작했던 영상은 결국 이런저런 사건사고 끝에 제목이 모든 걸 말해주는('못나서 그래') 자아성찰 다큐로 끝을 맺었다. 그래도 이 영상 찍는다고 친구들을 열심히 찾아다녔던 덕에 한 겨울을 나홀로 방콕하는 대신 친구들 그 해 살았던 얘기 들으며 보낼 수 있었다.

학교를 조용하게는 다녔지만 썩 성실하게 다니지는 않았다. 덕택에 학교친구로 핸드폰에 저장된 이름이 열을 넘지 않는다. 그나마 지금까지 만나는 학교 때 친구로는, 내 친구의 친구들로 곁다리 관계를 시작해 아직까지도 '친구가 되고 있는 중'인 대여섯 명의 여자친구들이 있다. 학교 졸업하고 부쩍 만나는 일이 줄어들면서, 이대로 멀어지는건가 멀찍이서 마음만 헛헛해하고 있던 차였다. 다큐를 찍는다는 명목으로 애들을 찾아다니면서, 이게 그리 벌어지고만 있던 거리를 좁히는 일이 되어주는 것 같아서 좋았다. 친구집에 하룻밤 모여 놀던 날엔, 한 이불 덮고 예전 고등학교 얘기, 대학교 구린 얘기, 이 얘기 저 얘기 오락가락하는 수다들을 찍으면서 빨리 이 카메라 걷어치우고 나도 같이 편하게 얘기하고 싶다 계속 생각했다.



12월의 끝자락, 홍대에서의 풍경


12월이 끝날 무렵, 홍대에서 친구들을 만났다. 살짝 비싼 스파게티도 먹고 거리에서 옷 구경도 하면서 놀기로 예전에 정한 날이었다. 내 딴엔 나름대로 고대했던 카메라 없이 맨 몸으로 애들이랑 노는 그 날이기도 했다. 좀 늦게 도착해서 만나게 된 친구들은 멀리서 보기에도 아가씨 티가 폴폴 나는 옷차림과 화장을 하고 있었다. 점심을 먹으러 유명하다는 맛집에 갔다. 슬슬 배가 불러오때 쯤, 애들이 디카를 꺼내들고 둘씩 셋씩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케이블 TV 프로 '남녀탐구생활'에서 본 게 떠올랐다. 음식을 앞에 두고 끈임 없이 사진을 찍는 내용의 '여자 편' 에피소드였다. 찰칵찰칵. 다 먹고 나선 역시 유명하다는 어딘가에 가서 달달한 케ㅇㅣㅋ을 먹었다. 케ㅇㅣㅋ도 역시 디카로 찍었다. 어쩌다보니 소개팅 얘기를 하고 있었고,옆 테이블에선 인터넷 쇼핑에서 질렀다는 부츠 얘기가 들렸다. 어느 순간 또 화장품이 보였다. 맛없는 케익을 남기고, 이번엔 바로 아래층에 있던 스티커 사진점으로 갔다. 찍는 둥 마는 둥 옆에 서있다가 애들이 사진 꾸미기를 하는 사이 가게 밖으로 잠시 나왔다. 영상을 찍는 동안 조금쯤 좁혔다고 생각했던 친구들과의 거리는 카메라 없이 애들과 홍대에서 지냈던 하루가 끝나자 무한대로 벌어져있었다.



'학생' 정체성에서의 졸업, '아가씨' 라는 정체성으로의 입학


그 날 홍대에서 내가 친구들에게 느낀 거리감은 적어도 우리가 각자 대학에 가거나 재수를 하고, 홈플러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시청에서 일하게 되는 등, 서로 다른 곳에서 다른 일을 하고 살게 되며 벌어진 '차이'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놀란 건, 그렇게 달라지고만 있는 줄 알았던 친구들이 또 다른 방식으로 너무나 비슷해지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스무 살을 맞고 이십대 여성이 된다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지만, 친구들이 남녀탐구생활의 '여자'와도 겹쳐질 정도의 20대 여성이 되어가는 걸 보면서, 이토록 끈질기게 따라오는 '단일함의 굴레'가 참 무섭구나 싶었다. 수백 명을 '학생'이라는 단일한 존재로 만들려는 괴물 손아귀에 붙잡혀서 십 몇 년을 살았다. 같은 공간, 같은 복장, 같은 시간표, 같은 질서 같은 단일한 조건들을 서로 공유하며 살다보니 수백 명의 다른 존재가 어느 샌가 단일한 존재, '학생'이 되어 있었다. 스무 살이 되었고, 이제 우리는 서로 다른 공간 다른 옷 다른 시간표를 가지고 산다. 하지만 서로 다른 존재들을 특정 이익에 맞는 단일한 틀 안으로 우겨넣는 '같은 질서'는 활동공간을 학교에서 이 사회 전체로 확장한 채 여전히 반복된다. 학생은 학교가 무수한 청소년들에게 강요했던 단일한 정체성이었다. 그리고 그건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적어도 학교 공간 내에서 약화시킬 정도로는 절대적이었다. 여학생들이 더 이상 '학생'이 아니게 된 순간, 졸업과 동시에 또 다른 입학이 시작됐다. 이젠 '20대 여성' 혹은 '아가씨'로서의 정체성이 우리 몸에 올가미를 씌우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의 욕구는 왜 자꾸 아이러니한 결말을 맺는지


성인이 되면서 두 가지를 기억하고 가기로 했다. 19세 미만에겐 허용되지 않는 법적인 권리, 성인으로서의 사회적 권위, 뭐 그런 기득권을 좋든 싫든 갖게 되었다는 경계해야 할 사실이 하나. 또 하나는 술 취한 대학가 위로 겹쳐지는 소비자본주의 울라불라 하는 지배 질서의 음흉한 환영에 덧댄 '새로운 소비자 하나 추가요' 누군가 외치고 있는 것 같은 기분 나쁜 환청이 둘. 그 날 친구들이랑 홍대 거리를 누비고 다니며 했던 건, 함께 어울려 논다는 의미보다는 그저 소비였다. 정확히는 '홍대'라는 환상에 대한 소비였다. 그 환상을 가진 소비자들은 또 다시 홍대의 것을 비롯한 숱한 환상을 조장하는 사람들 손에 소모되고 있는 지도 몰랐다. 예쁜 여자에 대한 환상에 소모되고, 소녀시대의 환상에 소모되고, 남녀평등시대라는 환상에 소모되고. 우리가 하는 소비가 우리에 대한 소모로 돌고 돌았다. 나라고 화장을 아예 안 하는 것도 아니고, (표현이 좀 웃기지만) 어른티 나는 옷을 입어보고 싶은 욕구도 있다. 하지만 내 친구들을 비롯한 여성들이 '예쁘고 늘씬해지는 것'으로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여자라면 응당 그래야한다는 식으로 세간에 상식처럼 퍼져있는 무언의 강요들을 볼 때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누리고 유지하려는 남성 중심적인 사회의 교묘함이 더 깊숙이 다가올 때마다, 내 욕구도 단순히 내 것이라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틀 속에서 내 욕구가 정말 온전한 나의 욕구일까. 남성 중심의 사회와 그 틀에서 생겨난 욕구의 실현이 그저 내 욕구의 충족만으로 끝날 리는 없지 않느냐는 생각. 화장을 하는 것도, 사회에서 인정받는 인간이 되기 위한 투자들도, 내 욕구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하는데도 왜 자꾸만 '놈'들의 욕망을 채워주는 것으로 아이러니한 결말을 맺는지. 약자들은 왜 욕구조차 온전히 자신의 것이 아닌 건지.



사회가 요구하는 정체성이 인해 '나'를 지우기 전에


20대 여성이란 정체성은 내가 이십대 성인이고 여성이라는 단순한 사실의 조합이 아니다. 남성들에게 섹스어필할 수 있는 성인여성, 혹은 가부장의 입맛에 맞는 참한 아가씨, 이 사회가 만들어낸 '20대 여성' 이란 정체성. 이것의 정체라는 게 별 게 있겠나. 그리고 우리는 20대 여성이 되자마자 아르바이트하는 곳에서 마주치는 성희롱을 눈 감고, 대학가 남자동기들의 지극히 마초스런 발언들에 무뎌지고…살아남기 위해서였는지, 어째서였는지, 깊게 체념하고 수긍한 뒤에 속 뿌리부터 진득하게 썩어문드러지는 그런 과정을 밟고 있는 것만 같았다. 조금씩 조금씩 더 '아가씨'가 되어가는 친구들을 보면서, 그 애들을 만날 때마다 자꾸 더해가는 서글픔 때문에 이 글을 쓰게 됐다.

이십대가 된다는 게 점점 더 생각이 없어지고 얕아지는 그런 일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십대 여성이 된다는 게, 내게 향하는 폭력보다 그런 폭력이 아무렇지도 벌어지는 세상을 욕하는 것보다 시시때때로 거울보고 화장을 고치는 게 더 익숙하고 자연스러워지는 그런 일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다가는 결국 사회가 요구하는 '20대 여성'만 남고 '나'는 사라져버릴 것 같아서, 홍대에서 같이 놀던 날에도 사실은 그게 가장 두려웠던 것 같다.

그래서 내 욕구도 의심하고, 20대 여성(혹은 아가씨)으로 사회가 호명하는 내 정체성도 띠껍게 봤으면 좋겠다고, 난 이 놈의 사회를 도저히 못 믿겠으니 우리 같이 믿지 말자고, 그런 얘기들을 털어놓고 싶었는데…잘 됐는지 모르겠다. [페미니즘 인 걸]의 꼭지에 대놓고 20대가 어쩌고 하고 있는 게 잘 하는 짓인지도 다 쓰고 나니 문득 불안해진다. 그래도 마음만은 언제까지나 걸(girl)인 필자이니 이번만 너그럽게 봐주셨음 좋겠다. 아님, 페미니즘 인 걸 번외 정도로 치부해도 좋고.


Posted by 오승희


왜 소수자들은, 여성/청소년들은, 오지랖이 넓은가


난다


‘그래도...’의 반복


학교를 그만두기 전, 학교 친구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때, 늘 어느 순간 벽 같은 것에 부딪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신나게 학교 욕, 선생 욕을 하다가도 누군가는 꼭 “너무 우리들 생각만 하지 말고, 선생님 생각도 좀 하자.”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이를테면 체벌에 대해 수다를 떨 때,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그렇게 때리냐? 진짜 그 선생 너무 심하게 때리는 것 같아.”라고 얘기하면, “에이, 그 선생님이 좀 심하게 때리긴 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체벌은 허용되고 그래야, 우리도 스스로를 통제하고 학교도 잘 굴러갈 수 있는 거 아니겠어?” 그리고 친구들의 끄덕거림이 따라온다. 늘 답답했었다. 왜 이 친구들은 자신들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것들에 대해 그냥 그대로 수긍하는 거지?

비슷한 경험은 학교를 그만 두고서 인권활동이라는 걸 하면서도 자주 접했던 것 같다. 인권교육을 가서 학생들의 권리나 인권에 대해 얘기하면 청소년들은 ‘아무리 그래도’ 하면서 ‘선생님들’ 걱정을 했다. 고된 하루를 마치고 돌아온 아빠는 회사 뒷담화를 까다가 내가 발끈하자, ‘그래도’하면서 ‘사장님’을 옹호한다. ‘사장님’도 나름의 고충과 어려움이 있어서 그러는 거라고. 내가 보기엔 아빠가 훨씬 힘들어 보이는데.



구조적 무감각과 ‘착하게’ 길들여지기


사람들은 쉽게 이 사회의 기준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주류적인 기준을 흔드는 것들에 대해 불편함을 느낀다. 곧잘 ‘인권’을 이야기하고, ‘차별’을 이야기하고, ‘변화’를 이야기하지만 어떤 ‘선’을 넘어가지 않으려 한다. 그 ‘선’을 넘어가는 것은 기존 사회의 질서를 흔들고 침범하는 것이라 여긴다.

처음부터 그랬을 것 같진 않다. 청소년들이 “아직 어린 것들이”라는 말에 맞춰 “그래, 우린 아직 어리니까 좀 더 통제 받아야 해.”라고 생각하거나, 여성들이 이 사회 ‘미’의 기준에 맞춰 자신을 더욱 꾸며내고 혹독한 다이어트를 감행한다거나, 혹은 자신에게 상처를 준 남성들을 먼저 이해하고 배려하는 방식으로 상처를 치유하려고 한다.

같은 사회적 약자로 닮은꼴인 청소년과 여성, 그리고 약자들은 웃기게도 강자를 먼저 걱정한다. 그러한 여성성과 약자성(먼저 배려하고 먼저 이해하고)은 약자가 강자에게 훨씬 더 많이 잘 발휘되고 있다. 이는 성인/교사/남성-강자 중심 사회에서 그들 중심의 질서가 학생/여성 속에도 깊이 뿌리를 내려, 자신들을 둘러싼 억압마저 그들의 시선으로 보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어렸을 때부터, 아주 예전부터 ‘남성/비청소년의 이야기’가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정받는 사회를 살며 쌓아온 경험들이 우리들 마음 곳곳에 눌러 붙어 ‘내면화’되었기 때문이다.



생존하기 위해 강자 입장 내면화하기

소수자/약자들이, 권력 있는 자/강자들을 위하도록. 그래서 이 사회가 뒤틀리지 않고, 뒤집어지지 않게 고정시킬 수 있도록. 그렇게 사회는 우리들을 오랫동안 ‘착하게’ 길들여왔다.

그렇게 길들여진 ‘착한’ 사람들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걸 받아들이고 산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착하고 착실했다. ‘야간자율학습’은 한 번도 빼먹지 않았고, 성적도 그럭저럭 유지했다. 학교의 온갖 규제가 고통스러워도, 선생님들이 우리를 때려도, 나는 그 순간순간을 흘려보냈다. 그런 것들을 그만두라고 말하고도 싶었지만, 그 순간에는 착실하게 참아냈다. 그 순간만 넘기면 되니까. 또는 그 순간에 내 목소리를 내기라도 하면, 눈앞에 징계나 탄압이 떨어질 테니까.

하지만 그런 시간을 보낼수록 선생님들이 우리를 때릴 때마다 그걸 계속 지켜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게,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게 괴로웠다. 나는 왜 아무 말도 못하는 거지? 나는 왜 이렇게 힘이 없지? 이런 고민을 하다가, 그냥 거기에 그럴 만한 의미를 부여해버렸던 것 같다. 어쩔 수 없어, 라고. 선생님도 그만한 이유-학생들을 대학에 많이 보내야 할-가 있어서일 테고, 그건 선생님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니까, 라고.

먹고 사는 것, 여성들의 경우에는 사회적 인식도 그렇고, 학생들은 학교에서의 눈앞에 보이는 탄압이나 징계에 대한 문제 때문에 쉽게 바꿔내야겠다는 생각을 더 못하게 되는 것 같다. 나는 나의 생존을 위해서 이 체제에 편입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편입되는 자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강자의 입장을 이해해야 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을 정당화 시켜야 했다. 나한테 고통을 준 사람도 어느 정도 합당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인 것이고, 이 사람들을 이해하게 되면 나는 덜 불편할 수 있으니. 그리고 그럴 때에야 나는 이 사회의 질서를 어지럽히거나 혼란스럽게 하는 나쁜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으니. 그래서 나도 그러한 나 자신과 학교와 체벌하는 교사에 어떤 의미를 부여했던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학창시절을 추억할 때처럼. 대학에 가고 나서, 자유시간이 많아지니, “아 그래도 고딩 땐 할 게 있었는데~”하는 생각이 드는 것처럼. 수능 보기 전에는 수능공부=쓸모 있는 짓/나머지 전부=휴식이라는 ‘공식’이 있었는데, 수능이 끝나고 이게 허물어지고 나니, 참 허무하더라는 것처럼.

너무 힘든 시절이었지만, 그렇게 힘든 시간만 있었다고 생각하기엔 내가 너무 비참하니까. 그래서 소소하고 시시콜콜한 일들을 더 크게 기억하고 추억하면서 그 때는 그래도 좋았지, 그래서 좋았지, 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 반복되고 반복되어 이 체제를 구성한다.



그래서, 그러니까

이 단단한 구조를 직시하는 것은 여성으로, 청소년으로, 약자로 살아가고 있는 나를 온전히 바라보는 것만큼 어렵고 힘든 일이다. 하지만 우리를 더욱 ‘착한 아이’로 길들이는 국가의 통제가 점점 더 검은 그림자를 펼쳐오는 이 때, ‘착한 아이’가 아니면 무차별적인 폭력으로 쫓아내버려도 된다고 생각하는 이 때, ‘국가’를 위해서는 권리를 주장하는 것도 멈춰야 한다고, ‘모두가 똑같은 손을 들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 때. 우리 이제 더 이상 착해지지 않아도 되었으면 좋겠다. 이 커다랗고 단단한 기준을 뒤집을 만한 발칙함과 깐깐함이 우리에겐 더 많이 필요하다.
Posted by 오승희



▲ 서울에서 셧다운제 반대 1인시위를 하는 청소년


▲ 전주에서 셧다운제 반대 1인시위를 하는 청소년



▲ 근로(학습)시간과 게임시간과의 상관관계를 표현한 그래프.

이것을 통해 과중한 노동과 학습이 게임 몰입에 기여함을 알 수 있다.



▲ 나이와 평일·주말 평균 게임 시간을 비교한 표


(그래프와 표는 2008년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자료에서 참조)





만16세미만 청소년들에게 반영되는 온라인게임 셧다운제가 국회를 통과했다. 올해 11월 시행을 앞두고 있다. 더군다나 모든 청소년들이 게임 사이트에 가입할 때 부모 동의와 본인 인증을 해야 하는 강력한 게임 규제도 도입되고 있다. 게임 과몰입에 대한 합리적인 또는 근본적인 대책 없이, 게임하는 걸 금지하려 달려드는 모습을 보니 이런 말이 절로 나온다. “이 얼마나 미성숙한 어른들인가!”


Posted by 오승희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