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면 그때는 참 단순했던 것 같다. 그 날은 날씨도 더워 수업을 들을 기분도 나지 않는 날이었다. 그런 와중에 들리는 학생부장의 교내 방송. 동사무소에서 주민등록증 제작을 하러 학교로 오셨습니다. 수업을 중단하고, 부르는 반 순서대로 차례차례 과학실로 가서 한 줄로 서서 기다리세요. 정말 기쁜 소식이었다. 먼저 재미도 없는 수업을 듣지 않아도 되니까 기뻤고, 그 다음으로는 내가 드디어 ‘성인’이 된다는 소식에 기분이 좋았었다. 아직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마당에 민증이 나와도 딱히 할 일도 없는데, 그 때는 그게 왜 이렇게 좋았는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동사무소 직원이 건네준 종이에 내 이름과 주소, 주민등록번호를 적고 순순히 양 손가락에 인주를 발라 지문을 찍었다. 이 세상에 주민등록번호를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느니, 지문 날인을 거부해서 체포되었던 사람도 있다느니 같은 소리는, 한참 나중에야 진지하게 생각해봤던 일이다.


왜 나를 포함한 아이들은 그렇게 주민등록증을 만든다는 사실에 두근거렸을까? 사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주민등록증을 만든다는 행위는 정부에게 ‘지문’이라는, 매우 중요한, 그리고 고유한 생체 개인정보를 오직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는 이유로 넘겨주는 일이고, 더 나아가서는, 그런 개인정보를, 조금만 의심스러워도 경찰에게, 심지어는 편의점 알바 같은 생판 모르는 남에게 유출할 가능성을 감수하고 보여주는, 그런 용도로 쓰일 수 있는 여지를 만드는 일이다. 단순히 내 이름과 사진, 주소가 박힌 카드를 받는다는 사실이 신기해 그랬던 걸까? 그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랬으면 학생증에 만족을 하거나 동사무소로 직접 찾아가서 청소년증을 만들었겠지.(사실 그 때는 청소년증이라는 게 있는 줄도 몰랐다.) 이유는 무궁무진하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주민등록증이 자기가 성인으로 한 발짝 나아갔다는 것, 다시 말해 이 지긋지긋한 학교생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된다는 것의 상징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주민등록증을 만들고 성인이 되면 평소에는 꿈도 못 꾸던 술도 살 수 있고, 담배도 살 수 있고, 술집에 들어가서 마음껏 술과 안주를 주문할 수도 있다. 게다가 엄마 아빠 주민등록번호를 몰래 도용해서 성인 컨텐츠도 즐길 수 있다! 도저히 기뻐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씁쓸하다. 한국에 사는 청소년은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자유롭지도 않고, 자신이 주체가 되어 어떤 일을 할 수 없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청소년의 현실이, 주민등록증을 만드는 행위를 심각하고 중대하게 받아들이는 대신, 매우 홀가분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행위에 동참하게 만든다.


▲ 성인이 되면 할 수 있는 것(...)

(2012년 9월 25일 보건복지부 앞, 대학 캠퍼스내 금주조치에 항의하는 음주시위에서)


청소년은 성인이 되기 전까지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다. 앞서 말했던 술-담배를 즐길 수 없는 것은, ‘표면적으로 봤을 때’ 할 수 없는 일이다. 만약 학교와 가정의 억압한 환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작정 가출을 했다고 생각해보자. 어찌 보면 청소년이 성인이 되기 전에 스스로 독립을 선언한 것인데, 그 청소년은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할까. 최소한 한국 사회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그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청소년이 ‘미성숙’해서가 아니다. 한국 사회가, 청소년이 주체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행위를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자립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려고 해도, 근로기준법에 서는 청소년은 친권자의 동의를 받지 않으면 노동을 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에는 근로기준법 같은 노동의 기본적인 권리 따윈 가볍게 무시하는 쿨한 사장님이 전국에 널려있으므로 어떻게 알바 자리를 찾아, 최저임금도 지키지 않고 주휴수당은 ‘원래 떼먹는 것’으로 인식하는 사장 밑에서 어찌어찌 돈을 벌었다고 치자. 그렇다고 해도 중학교 3학년이 되지 않으면 은행에 돈을 저축할 수 없다. 은행법에서는 만 14세 전의 청소년이 계좌를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친권자의 동의를 받아야 만들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은행에 돈을 저금하는 대신 자기만의 비밀 장소에 꼭꼭 돈을 모아 그럭저럭 하루하루 살만큼 돈을 모았다고 쳐보자. 사람은 돈만으로 살 수 없다. 인간 생활의 세 가지 기본 요소인 ‘의식주’의 ‘주’(住), 다시 말해 집이 필요하다. 그러나 민법에서는 청소년이 부동산을 거래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합법적인 경로로는 청소년이 자신의 명의로 집을 빌려 거주할 수 없는 것이다. 심지어 숙박업소나 찜질방 같은 곳에 잠깐 묵어갈 수도 없다. 청소년 보호법상, 찜질방은 밤 10시 이후에는 청소년이 이용할 수 없고, 숙박업소에는 아예 들어갈 수가 없다. 가출이 문제가 아니라 여행, 혹은 대학 입시를 치르러 먼 지역으로 갔을 때에도 묵을 데가 없다는 얘기다. 종합해보면 청소년은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돈도 벌 수 없고, 그 돈은 안전한 곳에 맡길 수도 없고, 자신을 보호해줄 집도 구할 수 없다. 가정과 학교에서 시키는 대로, 규정하는 대로만 청소년은 살 수 있다고, 법이 규정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러한 법조항이 처음부터 ‘청소년의 자립을 막기 위해’ 제정되지는 않았다. 경제면에 종종 등장하는 ‘만 5세 아이가 주식 부자가 되었다’는 기사에서 보듯이, 어린 아이 명의로 거래를 해서 세금을 회피하려는 행위를 피하기 위해 청소년의 금융 거래를 제한하는 조항이 만들어졌다. 또한 청소년의 노동에 부모의 동의를 요구하는 것은, 지금은 많이 줄었지만 과거에 만연했던 아동 노동을 예방하기 위해서 삽입한 조항이다. 하지만 이를 감안한다 해도, 여기에는 청소년에 대한 중대한 편견이 포함되어 있다. 바로 청소년은 혼자서, 주체적으로 이러한 일들을 할 수 없는 ‘미성숙한’ 존재고, 만약 한다고 해도 이는 어른들에게 ‘이용당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전제다. 차명계좌만 해도, 청소년뿐만 아니라 금융실명제가 확립된 지금도 다른 사람 명의를 도용해서 돈세탁을 하는 일이 종종 있는데, 왜 어른의 계좌 개설은 청소년만큼 규제하지 않을까? 부동산 거래 역시 마찬가지다. 또한 고용노동부나 각 지역의 노동청은 실제 청소년이 어떤 환경에서 노동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서, 청소년의 노동 행위에 친권자 동의만 받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학교와 가정만이 청소년을 제약하지 않는다. 청소년을 주체적인 존재로 보지 않는 사회가 궁극적으로 청소년을 옥죄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청소년에게 민증을 만드는 일은 곧 자신이 자유로워지는 것과 동일한 행위로 받아들여진다. 민증을 만드는 것이 자기에게 궁극적인 자유를 주지 않고 오히려 국가에 자신을 예속시키는 일이라는 사실은, 청소년에게 중요하지 않다. (그 전에 정부에서 이를 말하지도 않고, 이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소수다.) 성인이 되는 순간 당장 이것도 할 수 있고, 저것도 할 수 있는데, 그것을 보장하는 증이 곧 자기한테 주어진다는 데 어떻게 그 열망을 막을 수가 있을까?


하루가 멀다 하고 인터넷 어느 사이트에서 주민등록번호가 유출됐다느니, 어디서 뭐가 도용됐다느니 하는 보도가 터져나오지만, 다들 그러려니 하는 눈치다. 어쩌면 한국 사회에서 주민등록제도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많은 비판을 듣거나 제대로 퍼지지 않는 것은, 한국인 전체의 25%를 차지하는 청소년이 주민등록증을 ‘해방’과 ‘자유’로 받아들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청소년의 인권이 계속 억압받는 상황 속에서 정부와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이에 별다른 문제를 느끼지 못하고 있고, ‘민증’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전국 곳곳의 학교와 동사무소에서 지문날인을 거쳐 발급되고 있다. 이렇게 공고한 구조 속에서 한국의 청소년은 오늘도 주체성을 얻지 못하고, 정보인권을 훼손하는 주민등록제도는 많은 비판을 얻는 와중에도 계속 굴러간다. ‘민증’은 청소년을 자유롭게 하지 않는다. 대신 또 다른 억압의 길로 인도할 뿐이다.



<스카이젯>




Posted by 오승희



청소년은 인간이다. 인간은 성적 욕구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청소년은 성욕을 가지고 있다. 쉬운 삼단 논법이다. 굳이 이런 것까지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청소년이 성적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당연한 이야기다. 그런데 왜 2012년 대한민국에서는 청소년과 성은 마치 따로 있어야 하는, 개별 분야인 것처럼 구분되고 가려질까?


성과 연애와 같은 이야기를 청소년들이 부모나 교사에게 상담이라도 할라치면 나오는 대답은 늘 뻔하다. “그런 건 나중에 대학 가서 알아도 돼. 나중에 다 때가 되면 알게 되어 있어. 가서 공부나 열심히 해!” 그래서 아무도 질문하지 않고,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청소년의 성, 나아가 성 전반을 터부시하는 태도가 당연한 상식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니, 뭔가 이상하다. 과연 이 지식들과 경험들을 대학 가서, 나중에 성인이 되어서나 배우고 경험해야 하는 걸까? 


이 만연한 꼰대스러운 태도가 청소년들에게, 더 나아가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혹시,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독자 여러분, 콘돔 제대로 끼우는 법 알고 계시는지?

▲ 바로 이렇게 끼우는 것이다. 반드시 앞부분을 비틀어 공기를 완전히 빼야 한다! 잘못하면 터질 수도 있다.

(그림 제공: 대한민국 성포탈 aoosung.com)


여러분, 이런 거, 집이나 학교에서나, 누가 가르쳐 준 적 있으신지? 아마 그런 경험을 하신 분, 별로 없을 것이다. 나도 물론 그랬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장장 12년에 이르는 정규 교육 과정에서 콘돔 끼우는 법은 물론 제대로 된 피임법도 배우기가 힘들다니! 통탄스런 일이다.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건, 정말 별 거 없었다.


아마 많은 학생들이 위와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성교육 특강이랍시고 와서, 낙태 사례가 담긴 동영상, 아이가 찢기는 동영상만 잔뜩 반복해서 틀어주면서 오히려 성관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만 잔뜩 생기는 경험 같은 것 말이다. 소위 ‘성교육’이랍시고 몇 년간 나에게 행해졌던 학교에서의 여러 교육들은 제대로 된 성 지식을 알려 주기는 커녕, 성을 부끄러운 것, 가려야 하는 것, 그리고 두려운 것으로 여기게 했다. ‘연애’라거나 ‘성관계’, 이런 거 하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그런 분위기는 비단 학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성에 대한 이야기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가족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런 콘돔 끼우는 법과 같은, 현실적이며 정말 기초적인 정보 하나 제대로 몰라 허둥대고 우왕좌왕해야하는 이런 코미디 같은 상황은, 성을 무조건 가리려고만 하는 경직된 분위기에서 비롯되는 거다. 성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며, 가려져서도 안 되는 것인데 말이다.


하지만 분명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당연히 청소년들을 그러한 ‘유해한’ 정보로부터 ‘보호’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말이다. 하지만 청소년을 소위 ‘음란한’ 것으로부터 ‘보호’를 해야 한다는 명분 하에, 오히려 실제로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부분은 가려지고 있다. 물론 ‘보호’ 자체를 부정해야 하는 것도 아니며, 청소년의 ‘미성숙’ 역시, 어쩌면 부분적으로는 맞는 이야기일지 모른다. 하지만 누가 ‘미성숙’과 ‘성숙’을 재단하는가? 단순히 나이에 따라서? 나이가 많다고 성숙한 것이 아니듯이,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그 모든 정보로부터 통제되고 격리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맞는 시기에 제대로 된 교육과 지원이 필요한데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이러한 억지명분에 매몰되어, 청소년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은 전혀 주지 못하고 있다.


사실 ‘보호’와 ‘미성숙’이라는 말 자체가 상당히 기만적이다. 이는 마치 청소년들을 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청소년의 삶에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보호’라는 윤리적인 것처럼 보이는 단어로 억압과 통제를 가려버리고 있다. 그리고 성인들에게는 청소년들을 보호하고 있는 듯한, 무언가 도움을 주고 있는 듯한 착각을 주는데, 이는 그냥 쉬운 길을 택한 걸 정당화시키는 걸로 느껴진다. 올바른 성 지식에서부터 성적 자기결정권, 성에 대한 책임감을 내면화시키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상당히 많은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 이보다는 우선 차단시키고 격리시키고 보는 것이 좀 더 비용과 힘이 적게 들고, 쉽고, 통제하고 싶은 욕망까지 만족시키는 방법이니까 말이다.


‘이팔청춘’이라는 말이 있듯, 전통적으로는 15~16세 정도에 혼인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조선 시대 제민 통제의 근거가 되었던 주자의 ‘가례’에 따르면, 남성은 16~30세, 여성은 14~20세가 혼인 적령기로 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서, ‘어른’들이 참 좋아하는 그 봉건적이고 위계적이며 나이주의적인 ‘가부장적 유교적 질서’ 속에서도, 이미 14~16세 정도면 ‘가정’을 이룰 수 있는 하나의 ‘주체’로 인정해왔던 것이다. 물론 혼인이 곧 성적 결합을 의미하지도 않고, 당시의 관념으로는 성이 단지 ‘자손 생산을 위한 행위’ 정도 수준으로 통제되어왔으니 적절한 예시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19금’을 신성 불가침의 신조로 여기는 ‘꼰대’들에게는 이 정도도 충분히 충격적일지 모르겠다.


당연히 이 또한 제대로 된 해답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통제’의 상한선이 아니라, 기준이 되는 나이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이라도 ‘사람’으로서 똑같은 대우를 받으며, 차별 받거나 사회적으로 배제당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성에 대한 제대로 된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청소년을 단지 아직 둥지를 떠나지 못한 ‘자식’ 정도로만 보고,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마리오네뜨’인 양 여기는 관념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다. 학생인권조례에 성적 지향성에 따른 차별 금지 조항, 청소년의 성적 권리, 임신/육아에 관한 차별 금지 조항이 반드시 들어가야 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정말 믿기 힘들겠지만, 청소년도 사람이다.


과연 무조건 통제하는 것만이 능사일까? 그냥 청소년들 연애하는 것 꼴 보기 싫은 것, 쉬운 길로만 가고 싶은 그런 귀찮음, 청소년들을 자신들의 통제 하에 두고 싶은 그 욕망을 ‘미성숙’이라는, 그리고 ‘보호’라는 담론으로 정당화하려는 것 아닐까? 성을 ‘부끄러운 것’으로 만들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제부터라도 청소년의 성을 음지로 몰아넣지 말고, 무조건 통제하는 대신 제대로 된 길을 갈 수 있는 이정표를 제시해 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말로만 “성은 아름다운 거예요~” 하지 말고 제대로 아름답게 느낄 수 있게 해 달라.


<ㄱ기긱>


Posted by 오승희


▲ 박정희 정권 말기인 1978년에 있었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포스터. 뭔가가 이상해 보인다면 기분 탓입니다. (포스터 제공: 중앙선거관리위원회선거도서관)



2012년에는 큰 선거가 두 번 있었다. 4월에는 제19대 총선이 있었고, 12월에는 제18대 대선이 있었다. 총선이 있던 4월 11일과 그리고 대선이 있던 12월 19일, 흥미로운 광경이 전국의 투표소에서 펼쳐졌다. 총선 때에는 ‘청소년의 정치적 권리 보장을 위한 원탁회의’를 중심으로, 대선 때에는 ‘청소년의 정치적 기본권 “내놔라” 운동본부’를 중심으로 뜻을 모은 사람들이 청소년에게도 투표권을 줄 것을 요구하며 각자 전국에 산재한 투표소 앞에서 청소년 참정권을 요구하며 1인 시위를 벌인 것이다.


한국에서 투표권을 부여받는 나이는 만 19세다. 그것도 원래 만 21세가 되어야만 투표를 할 수 있었던 것이 1960년에 20세로 하향 조정되었고, 21세기에 들어와서야 2005년에 공직선거법상 투표 가능 연령이, 2007년에 국민투표의 투표 가능 연령이 조정되면서 그렇게 된 것이다. 공직선거법상 투표 가능 연령 조정 당시 만 18세 안과 만 19세 안, 그리고 현상 유지 안이 격돌했으나, 결국 만 19세 안으로 정리됐다.

선거는 하나의 상징이다. 제도적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지의 여부를 판단할 때, ‘4대 원칙을 갖춘 선거가 주기적으로 열리는지’도 중요한 고려사항이다. 당연히 선거가 정치의 전부가 아니지만, 선거에서 투표를 한다는 것은 가장 쉽게 참여할 수 있는, 참정권의 기본 중 기본이다. 대한민국에서는, 만 19세가 되지 못한 청소년들은 제도상으로 완벽하게 선거의 영역에서 빠져있다. 선거법상 만 19세가 되어야만 투표권을 얻으며 만 25세가 되어야만 각종 선거의 후보로 출마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청소년들은 정치적 의사를 표출할 수도 없도록 되어 있다는 점이다. 공직선거법 제60조에 청소년은 ‘선거운동을 할 수 없는 자’로 분류되어 있으며, 이 때문에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발언을 할 수 없다. 작년에 제59조가 개정되어 SNS상에서의 정치적 의사 표현이 자유로워졌지만, 청소년은 그에 해당되지 않는다. 게다가 청소년은 원칙적으로 특정 정당에 가입할 수도 없다. 물론 청소년의 정치적 권리를 배제할 수 없다는 취지에서 청소년 당원을 받는 정당도 있는데, 진보신당이 대표적이다. 통합진보당 또한 통합 이전의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청소년 당원의 가입을 받았고, 진보신당과 마찬가지로 청소년위원회도 갖추고 있었으나, 경선부정 사태가 불거지고 검찰의 수사가 진행되자, 청소년 당원들의 당원 자격을 박탈해버렸다. 당원 명부를 검찰이 압수하고 있는 상황에서 청소년 당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랬다는 해명이 있었지만, 청소년을 정치의 주체로서 인정하지 않는 생각이 기저에 깔려있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 2013년 어린이날에 열린 ‘어린이날 컨퍼런스’ 모습. 어린이날은 원래 어린이들의 주체적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찾기 위해 집회 등 정치적 행동을 함으로써 만들어졌다. (사진제공: 이장원님)

한편 청소년이 집회를 통해 의사를 표출할 권리 자체가 법으로 막혀있지는 않다. 2008년 촛불 정국 때 수많은 청소년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갔음을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기본적인 권리 또한, 대다수의 청소년들의 일상을 맡고 있는 공간인 학교의 학칙이 가로막는다. 학교 측은 학생들이 집회나 시위 등의 방식으로 정치적 의사를 표출하는 데 대해 ‘학교 명예 실추’나 ‘교사 지시 불이행’ 등의 명목으로 불이익을 주겠다며 위협을 가하곤 한다. 실제로 2008년에 ㅅ고등학교에서는 촛불집회에 참여했던 학생이 학생회장으로 출마하려는 것을 학교 측에서 가로막아, 해당 학생이 인권위에 진정을 냈던 일도 있었다. 이렇게 청소년의 삶은 애초에 정치와는 완전히 유리된 상태에 놓여있다.

‘성숙’과 ‘미성숙’을 가르는 것은 권력관계

왜 청소년은 투표권을 갖지도 못하고, 정치적인 의사 표현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며, 정당에 가입해 정치적인 활동을 할 수도 없도록 되어 있는가? 나이가 적으면 ‘미성숙’하기 때문인가? 경험적으로, 우리는 나이가 성숙함을 보여주는 척도로서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이가 많아서 ‘성숙’하다고 할 것이라면, 1941년생으로 올해 73세가 되시는 이명박씨나 그의 형님인 1935년생 이상득씨는 모든 판단을 완벽하게 내릴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 분들은 ‘도덕적으로 완벽’할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완벽’한, 그야말로 성숙의 극을 보여주는 사람이어야 한다. “청소년이 정치를 알기에는 미성숙하다”라는 생각은, 사실은 그 근거가 희박한 편견일 뿐이다. 일단 생물학적으로는 만 15세 정도면 ‘성인’의 뇌와 거의 유사할 정도로 성장한 뇌를 갖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20대가 지나가면 오히려 뇌는 조금씩 퇴화하기 시작한다고도 한다.

설령 청소년의 뇌가 생물학적으로 ‘미성숙’하다고 해도, 이것이 청소년의 참정권을 가로막아야 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만일 ‘충분히 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참정권을 가질 수 없다면, ‘판단력이 흐려지는 나이이기 때문에’ 참정권을 가질 수 없는 경우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감히 누가, 어떤 기준으로 남의 ‘판단력 수준’을 평가한단 말인가? 전국민을 상대로 ‘뇌 기능 수준’을 평가하는 검사라도 벌이겠다는 생각이 아니고서야 이런 주장은 무의미하다. 참정권은 헌법으로 보장되어 있는 국민의 기본권 중 하나다. 단지 이것이 일종의 편견 때문에 가로막혀야 한다는 것은, 우리 나라의 민주주의가 그만큼 후진적이라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 진보신당 청소년위원회는 한국의 대표적인 청소년 정치조직이다. 사진은 2012년 노동절 행진 때 등장한 피켓.


독일에서는 선거권이 만 16세부터, 피선거권이 만 18세부터 주어진다. 독일에서는 10대나 20대의 나이로 선거에 출마하는 후보자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으며, 실제로 19세의 나이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도 있다.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악의 축’으로 지목했던 이란은 15세, 중앙아메리카의 니카라과가 16세, 심지어 북한조차도 17세부터 선거에 참여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물론 전혀 민주적인 선거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북한에서의 선거권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선거권이 충분한 의미를 가질 만큼 민주주의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논외로 한다 해도, 특정 나이를 기준으로 ‘성숙’과 ‘미성숙’을 가르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정도는 알 수 있다.

‘성숙’과 ‘미성숙’을 가르는 것은 사실 권력관계가 대단히 깊게 개입된 문제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 처음으로 선거권을 손에 쥐었던 이들은 극히 일부의 부르주아 남성들이었다. 이들에게는 여성은 ‘정치적으로 미성숙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고, 서민들은 ‘국가에 충분히 세금을 납부하지 않으므로’ 참정권을 가질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영국에서는 생물학적으로 남성인 귀족, 자산가 등에게만 선거권이 주어지다가 1918년에 시민대표법이 제정되어서야 비로소 만 21세 이상 남성들과 30세 이상의 여성들이 ‘성숙함’을 인정받았고, 성 구분 없는 보통선거권은 1928년에야 확립되었다. 남아공에서는 흑인들이 ‘미성숙한’ 존재였다. 지금, 여성이나 서민, 흑인들을 이런 식으로 차별하며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게 한다면 시대착오적이라는 비난을 받을 것이다. 청소년의 참정권 요구는, 여성이나 유색인종이나 서민들이 당대의 지배계층이었던 남성, 백인, 부유층에 대해 참정권을 요구하던 그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혹자는 청소년에게 표가 주어진다면 그들의 표가 누군가의 입김에 의해 좌우되거나, 혹은 뚜렷한 주관이 없이 아무에게나 던져지거나, 또는 포퓰리즘에 쉽게 휘둘릴 수 있기 때문에 제한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되물어보자. 과연 지금 유권자들, 그러니까 ‘성인’들의 정치는 어떤가? 뉴타운에, 혹은 자신에게는 얼마 돌아가지도 않을 감세에, 토건 정책에 표를 준 것은 포퓰리즘인가 아닌가? 아이돌 가수 같은 이가 후보로 나서면 청소년들은 죄다 그를 찍을 것이 아니냐는 비아냥도 들린다. 하지만 그렇게 비아냥대는 성인들은 공당의 전략회의를 도청한 한선교를 그저 익숙하다는 이유로 재선시켰고, ‘데칼코마니의 영웅’으로 돌아온 ‘태권도 영웅’ 문대성을 당선시켰다. 그러나 그 누구도 지금 유권자들의 표를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한선교나 문대성을 당선시킨 유권자들을 비난할 이유도 없다. 그들은 자신의 투표를 했을 뿐이다. 시민은, 설령 그 결정이 현명하지 못하다 하더라도, 자신의 신념에 따라 자신의 대표자를 뽑아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킬 권리를 갖는다. 또한 선거 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여러 정치 영역에 참여해 목소리를 낼 권리도 갖는다.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자신의 목소리’를 내어 정치 영역에 관철시키는 것이 바로 1인 1표의 대의제 민주주의다. 자기가 좋아하고 신뢰하는 사람을, 혹은 자신에게 유리한 공약을 제시하는 사람을 대표자로 내세울 권리는 헌법에 보장되어 있다. 여기에서 청소년과 ‘성인’이 구분되어야만 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러나 지금의 청소년들은 자신의 대표자를 내세울 수도 없고, 자신이 대표자가 될 수는 더더욱 없으며, 정치적 의사표현의 자유마저 제한당하고 있다. 다원주의를 기본적인 가치로 삼고 있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어느 한 집단의 목소리가 전혀 정치 영역에 나오지 못하는 것은 재앙에 가까운 것이다. 청소년들의 목소리가 정치 영역에 나오지 못함으로써 정치권은 청소년과 관련된 정책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고, 순전히 ‘성인’들의 시각에서만 법이 만들어지고 집행된다. 이런 상황은 심지어, 청소년이 그 직접적인 이해당사자가 되는 교육감이나 교육의원 선거에서도 마찬가지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자살하지 못하게 창문을 조금만 열리도록 만들어야 한다”라고 말하는 이가 교육감으로서 교육정책을 집행하고 있는 상황은, 아무리 봐도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의 상황은 아닌 것 같다.

‘탈꼰대’, 청소년에게도 정치를!

청소년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차원의 ‘꼰대질’은 매우 오랜 시간 동안 쌓여온 장유유서의 신화와 입시 문제를 끼고 있다. 나이에 따른 권력 서열이 정해져있다 보니 나이가 많은 사람이 어린 사람에게 대뜸 반말을 던지는 것은 일상다반사, 동등한 입장에서의 토론 또한 이루어지기 어렵다. 무슨 말이라도 할라치면 “네가 뭘 안다고…”로 시작되는 ‘꼰대질’이 날아든다. 독일의 청소년들이 김나지움(고등학교에 해당하는 독일의 교육기관)에 방문한 정치인들과 정치 이야기를 나눌 때에 한국의 청소년들은 9월 평가원 모의고사 문제지 속의 미적분과 씨름한다.

4월 총선이 끝나자마자 한때 “20대, 특히 여성의 투표율이 낮다. 너희들에게 정말 실망했다.”라는 식의 글들이 SNS를 타고 떠돌아다녔다. 물론 아무런 근거가 없는 이야기였고, 곧 출구조사 표본을 바탕으로 한 연령별 투표율 집계가 나오자 쏙 들어가 버렸다. 12월 대선이 끝나자마자 이런 비난은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출구조사 결과 20대 투표율이 65% 정도였는데, 50대의 89.9%와 비교하면 매우 낮다, 젊은이들이 잘못했다, 라는 식이었다. 청소년에게 투표권도 안 줘, 정치적 발언도 못하게 막아, 뭐라도 할라치면 나이와 입시 얘기로 가로막아, 이러다가 갑자기 만 19세가 되자마자 “투표 안 하면 개새끼!”라는 소리들을 하는 것이다. 청소년이 대체 뭘 했다고. 아니, 청소년이 대체 뭘 ‘할 수 있었’다고. 최소한 권리는 줘놓고, 그리고 그 권리를 쓰는 방법은 알려줘 놓고 뭔 소리라도 해야 맞는 순서 아닌가?

이제부터라도 청소년의 정치 참여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진지하게 논의가 되어야 한다. 기본적으로는 투표 가능 연령을 다시 좀더 낮추는 작업도 이뤄져야겠지만, 그보다 시급하고 근본적인 것은, 청소년은 결코 정당 가입이나 정치적 의사 표출을 할 수 없도록 되어 있는 부분부터 고치는 것이다. 청소년 활동가 ‘검은빛’씨는 “정치라는 것은 사실 국회의원을 뽑는 것만은 아니에요. 발언을 하는 것, 의견 표출 자체가 정치이고, 굳이 선거권 연령에만 논의가 국한될 이유가 없어요.”라고 말했다. 투표권 연령에 관한 논의는 사실 ‘적정 연령’에만 매몰되어 소모적인 논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정치는 선거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선거는 정치의 아주 조그만, 부차적인 영역에 불과하고, 진짜 정치는 평소에 이루어지는 정치적 발언이나 행동, 정당 활동 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청소년에게, ‘진짜 정치’의 장이 열려야 한다. 그것이 ‘진짜 민주주의’로 가는 길이다.

▲ 성숙과 미성숙, 애매~합니다잉~? (2012년 1월, 아수나로 전주지부 청소년 인권 아카데미에서)


<세치>

Posted by 오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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