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덜리즘'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3.06.07 [투덜리즘] 미성숙의 굴레 by 오승희
  2. 2011.09.22 <투덜리즘> 학생인권조례 없는 세상을 원한다. by 오승희

첫 섹스의 기억

내 첫 섹스는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을 코앞에 둔 어느 날이었다. 학생이었던 나는 부모님과 한 집에 살고 있었고, 나보다 1살이 많았던 상대방 역시 그랬다. 그래서 내 첫 경험은 아플 수밖에 없었다. 학생 신분이었던 나와 상대방에게 허락된 공간은 기껏해야 ‘아파트 계단’ 혹은 ‘빌라 옥상’이었고, 피임의 중요성은 충분히 알았지만, 교복을 입은 우리에게 ‘콘돔’을 팔려는 사람은 없었다. 빌라 옥상과 같은, 청결하지도 안전하지도 않은 곳에서, 누가 볼까 벌벌 떨며 나눴던 관계의 끝은 ‘임신’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내 첫 섹스는 참 많이도 아팠다. 그 후에도 다른 사람과 몇 번 더 관계를 맺었다. 요령껏 콘돔을 구할 수는 있었지만, 부모님께 섹스를 했다는 사실을 들켰다. 온갖 폭행과 폭언을 견뎌야 했다. 10대 시절 나의 섹스는 늘 그렇게 아팠다. 만약 그때의 나에게 타인과 안전하게 섹스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 허락되었다면 어땠을까. 청소년에게 독립적이고 경제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공간들이 더 많이 제공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10대의 임신에 대한 우려가, 안전하게 피임을 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의 제공으로 이어졌다면 어땠을까. 부모님께 혹시라도 들킬까 섹스를 하고 난 후에는 방에서 나오는 것조차 못했던 두려움이, 나의 삶에 대한 공감과 지지로 이어졌다면, 그랬다면 내 섹스는 그리 아프지 않았을 것이다. 


첫 투표의 기억

생애 처음으로 대통령 선거 투표를 하면서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선거의 결과는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참담하고 암울했지만, 그 이전에, 선거와 투표라는 것 자체가 나의 10대 시절 섹스에 얽힌 아프고, 억울하고 서러운 기억들과 오버랩 되었다. 투표를 할 수 없는 ‘미성년자’의 신분에서 바라본 선거와 투표는 어른들만의 잔치였다. 더 나은 대한민국을 만드는 것도, 개개인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정책과 공약을 결정하는 것도, 우리를 대변할 수 있는 대표자를 뽑는 것도 모두 어른들만 가능했다. 얼마나 억울하고 서러운가! 유권자는 ‘성숙하고, 사회적으로 공인된’ 성인에게만 주어지는 특권 같은 것이며, 투표라는 행위는 유권자들만 행할 수 있는, ‘성스러운’ 어떤 것으로 존재한다. 섹스도 그렇지 않은가? ‘성숙한’ 이들의 영역에 포함되지 못한 청소년들이, 그 ‘성스러운 행위’를 요구하는 순간, 그것은 어떤 금기이자 위험한 행동으로 간주되어 버린다. 자라나는 아이들은 정치적 이념에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지겹도록 들었고, 그래서 투표란 게 대단한 것인 줄 알았다. 정치는 더 대단한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내 첫 투표는 참 별 거 아니었다. 정치는 더 별 거 아니었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쓰는 것도 정치다. 이 글을 읽는 것도 하나의 정치다. 세상에 정치적이지 않은 것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 청소년도 정치의 중심이자 주인이 되겠다는 외침은 그저 공허할 뿐이다. 내 몸의 주인이자 결정권자가 되겠다는 외침 역시, 너무나 당연한 만큼 공허하고 허무하다. 이 간극을 어떻게 좁혀야 하나. 섹스든 정치든 혼자서 다 해먹으려는 이 욕심쟁이들아!


미성숙한가 미성숙해지는가

나는 청소년에게만 금지된 모든 것들을 청소년 역시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술과 담배가 몸에 나쁜 것은 맞지만, 그것 역시 청소년들이 선택하고 결정하고 책임질 문제이다. 아울러 어떤 공부를 할 것인지, 어떤 정치인을 뽑을 것 인지, 혹은 어떤 삶을 살 것인지- 그 모든 것들을 청소년들이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청소년들이 스스로 무엇을 결정하기도 전에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하고 강요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이다. 청소년이 행하는 행위에 대한 가능과 불가능이 존재하는 현실 이면에는 미성숙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있다. 


청소년은 ‘미성숙’하다는 것, 그리고 ‘미성숙한 이들’의 권리는 제한 당해도 마땅하다는 전제는 이처럼 청소년들의 현실을 비참하게 만든다. 내 18살의 섹스가 ‘죄’였고, 투표가 ‘불가능’이었듯 말이다. 피부색으로, 성별로, 장애의 유무로, 신분과 같은 요인으로 한 개인의 사회적 위치가 결정되고 차별의 근거가 되는 것처럼, 나이에 따른 차별도 분명 존재한다. 나이가 어리면 누군가의 보호와 통제가 있어야 하며, 스스로 무언가를 결정하기엔 경험이 부족하다고들 말한다. 그렇기에 청소년은 실수할 권리나 스스로 성찰하고 발전해 볼 기회도 박탈당한다. 많은 청소년들을 옭아매고 있는 굴레다. 우리 사회가 이 과정들을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혹은 강요하면서 외면해버린 질문들이 있다. 보호와 통제를 핑계로 청소년들의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 온당한지, 어떤 결정을 하게 되었을 때 실수할 권리마저 ‘그럴 줄 알았다’는 조롱으로 빼앗아 버린 것은 아니었는지, 그리고 그 실수들을 통해 성찰하고 반성하며 마침내 ‘성숙해질 기회’조차 밟아버린 것은 아닌지, 그렇게 ‘미성숙’을 우리 사회가 재생산 해내고 있지는 않은지. 지금껏 우리사회는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답은커녕, 사회와 학교, 또 많은 기성세대들은 미성숙의 굴레를 생산해내는 주체가 되지는 않았는가? 


김 여사의 교훈

잊을 만하면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오는 수많은 ~녀의 이야기를 한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일명 ‘김여사 사건’도 하나의 사례였다. 한 여성운전자의 차에 학생이 치이는 장면이 담긴 블랙박스 영상이 공개되면서, 여성운전자들 전반에 대한 비난이 거세게 일었다. 이 현상에 대한 어느 인터넷 기사는 이렇게 지적했다. 그 사고를 일으킨 운전자가 ‘남성’이었다면 과실이나 자동차의 고장, 혹은 사건의 전후사정을 살피며 사건의 원인을 찾지만, 여성이면 근본적인 원인 보다는 ‘여성’이라는 사실부터 비난하고 본다는 것이다. 이 차이는 여성과 남성이 가지는 사회적 지위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글쓴이는 지적했다. 여성이 남성에 비해 사회적으로 약자이며, 만만한 상대이기 때문에, 이런 만만한 상대를 욕하고 비판하며 비겁한 정의감을 느끼려는 욕구가 이 ‘김여사 현상’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김 여사의 처지와 청소년의 처지는 꼭 닮아있다. ‘개념녀’와 ‘기특한 10대’의 불편함 역시 꼭 닮아있었다. 김 여사는 ‘여성’이었기에 만만했다면, 청소년은 ‘10대’이기에 만만한 것 이다. 그렇기에 같은 ‘죄’라도 그 무게는 확연히 다르다. 어떤 범죄를 일으킨 대상이 10대라면 그 앞에는 꼭 ‘무서운’, ‘겁 없는’과 같은 수식어가 붙지만, 나는 단 한 번도 ‘무서운 40대’라는 제목의 기사를 본 적이 없다. ‘기특한 40대’라는 소리도 못 들어봤다. 비겁한 사회다. ‘김여사’가 가진 정체성을 약점 잡아 공격해 상처를 입히면서까지 얻고 싶었던 그 무엇이 ‘비겁한 정의감’이었다면,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보호와 통제를 강조하며 미성숙의 굴레를 덧씌워 당신들이 누리고자 했던 것은 결국 ‘미성숙한 성숙’이다.


차별은 이렇게 다양한 가면을 쓰고 누구에게나 행해질 수 있다. 그렇기에 ‘그 누구도’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움직임의 중심에는 청소년이 있다. 그리고 그들의 절박한 외침이 있다. 사회에서 가장 ‘아랫것’ 취급을 받는 이들도 차별 받지 않는 세상이야말로 정말 ‘차별 없는 세상’이니까. 툭하면 무시당하고 찌질하다는 대접을 받는 이들이 온전하게 고귀한 존재로써 인정받을 수 있는 세상이 정말 ‘평등한 세상’이니까. 미성숙하고 불완전하다 여겨지는 그들이 스스로 성숙해지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약 없이 보장받을 수 있는 세상이 정말 ‘성숙한 세상’이니까. 그런 세상이, 나이 어린 그들도, 성소수자인 그들도, 장애가 있는 그들도, 가난한 그들도, 여성인 그들도 존엄하세 숨 쉬며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니까. 

Posted by 오승희


학생인권조례 없는 세상을 원한다.




  경기학생인권조례가 막 시행됐을 무렵 학교에서 좀 ‘논다’는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떨었던 적이 있다. 이 친구와 내가 정말 싫어했던 영어교사가 있었는데 단어시험에서 틀린 개수만큼 학생들을 때리는 걸 삶의 낙으로 삼은 교사였다. 때리는 부위도 짜증나게 변태마냥 ‘발바닥’만을 고집했다. 단어시험 망한 날은 걸어 다니기가 어려워 대걸레에 서로를 태우고 교실이며, 화장실까지 끌어서 태워다주고 택시비 내놓으라던 생각이 난다. 웃기엔… 너무… 슬퍼! 그 친구에게 ‘인권조례 통과 되서 체벌금지니까 다시 대걸레 탈일은 없겠다?‘라고 물었다. 그러자 친구가 던진 한마디 ‘철수는 교육감이 영어단어 틀려도 때릴껄? 철수 존나 쎄잖아’ 그래 맞아. 내가 좀 잊고 있었다. 그 영어교사는 수업시간에 대놓고 인권조례 때문에 영어단어 틀리는 대역죄인을 처벌할 수 없게 되었다며 무척 아쉬워(?)했단다. 장난하냐!

  근데 솔직히 좀 억울하다. 영어교사가 아쉬워하지 않아도 학교현장에서는 인권조례가 잘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니까 말이다. 교칙개정 과정에서 학생들의 목소리를 사뿐하게 무시해준 부천의 소사고도, 개교 석달 만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20명의 학생을 강제적으로 학교 밖으로 내몰았던 남양주의 가운고등학교도 잘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이제는 인권조례 자체에 대한 찬반논의를 넘어서 인권조례의 정착화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 왔음에도 우리 미성숙하고 적응력 약한 꼰대들은 아직도 인권조례가 ‘되네’ ‘안되네’나 따지고 있으니 성숙한 내가 보기엔 좀 울화통이 터진다.

  저 영어 교사처럼 일부 보수 언론과 교사, 학부모들은 학생인권조례를 두팔 벌려 환영하지는 못할망정 인권조례에 대한 비난과 우려를 쏟아내며 ‘인권조례 무력화’를 외친다. 어떤 사람들은 ‘아직 미성숙한 학생들을 ‘선동’하고 ‘빨갱이’로 키우려는 조례‘라고 비난한다. (앗. 근데 이글을 읽은 그 '어떤 사람'들이 가스통 들고 날 쫓아올것 만 같은 건 기분 탓인가?)

  또 어떤 이들은 ‘교실붕괴’와 ‘교권추락’같은 문제에 우려를 표하며 인권조례 이후의 학교를 걱정한다. 사실 내가 학교를 ‘다녀봐서 아는데’ 교실은 늘~개판이었다. 인권조례 제정 이후든 이전이든 교실은 이미 오래전부터 붕괴하고 있었다. 교사들 교권 추락하는 것도 어디 어제오늘 일이었나? 새삼스럽게 왜들 이러시나? 학교 안다녀본 사람처럼. 교실붕괴와 교권추락 문제에 대해 학생인권조례가 유일한 원인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뭐랄까 좀 게을러 보인다. 생각과 고민을 좀 더 해보셔야 할 텐데 말이다.

  이유야 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학생인권조례 없는 세상’을 원한다. 경기학생인권조례가 지난해 9월 도의회를 통과해 공식적으로 제정된 지 어느 덧 1주년이 다 되어간다. 그사이 서울에서는 주민발의 형식을 통해 시민들이 직접 ‘학생인권조례안’을 발의했고 곧 제정을 앞두고 있으며, 충북과 강원도, 광주와 전북 등 지역 곳곳에서 인권조례 제정을 위한 움직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는 소식들이 들려온다. ‘인권조례’가 시대의 요구사항이 되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 많은 곳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필요성을 공감하고 있는 것이다. 참 기쁜 소식이다.

  사실, ‘학생인권조례’ 만큼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열악한 인권현실을 잘 보여주는 것도 없는 듯하다. 인권조례는 학교 안에서는 ‘인간’이 될 수 없는 ‘학생’들의 처지를 적나라하게 나타내는, 있는 그대로의 반증이 된다는 얘기다. 그래서 나는 인권조례가 수치스럽다. 아니 그러니까 내말은 이거다. 내 머리는 내 마음대로 기르는 것, 아프면 쉬는 것, 질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과 같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생각되는 것들이 왜 이 빌어먹을 나라에선 ‘법’으로써 강제하지 않으면 지켜지지 않는 ‘논외’혹은 ‘금기’의 것들이 되냐는 말이다.

  머리길이의 자유와 같은 정말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사회에서 허용할 수 있는 수준에서의 ‘최대한’의 도구가 되어버린 듯한 학생인권조례를 보며 답답함을 느낀다. 이제 학생인권조례는 최대한의 권리를 보장하는 최소한의 도구가 되어야만 하지 않을까? 청소년들의 인권을 얘기하는데 있어, 대안을 만드는데 있어, 방법을 고민하는데 있어 학생인권조례는 첫 걸음이자 최소한의 가이드라인. 딱 그 정도이길 원한다. 학생인권조례가 학생의 인권도 보장되는 사회를 위한 ‘마지막 보루’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학생인권조례는 미성숙하다는 유보되어 왔던 학생인권, 사회적으로 논의되는 것 조차 ‘금기’ 였던 학생인권, 오랜 시간동안 ‘없는 것, 보이지 않는 것, 가질 수 없는 것’으로 숨겨져 왔던 학생인권의 봉인을 푸는 주문이다. ‘학생’과 ‘인간’이라는 단어 사이의 멀고 먼 거리를 조금씩 줄여나가는 주문이다.

  그러다 마침내 ‘법’으로써 강제하지 않아도 학생들의 인권이 보장되는 학교를 간절히 원한다. 학생인권조례 없이도 ‘학생’ 역시 존엄한 삶을 살아갈 권리가 있는 인간이라는, 너무나도 당연하고 보편적인 인식이 널리 퍼지는 성숙한 사회가 되기를 간절히 원한다. 그렇기에 나는 이제 학생인권조례 없는 세상을 원한다. 너무나도 간절히 원한다.

Posted by 오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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